고린도전서에 나타난 '로고스'(λόγος)의 신학적 의미
십자가 복음과 헬라 철학의 충돌
1. 서론
고린도전서는 복음이 당대의 철학과 문화, 그리고 종교적 배경과 충돌하는 지점에서 어떻게 기독교 공동체가 정체성을 형성하고, 복음을 보존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서신이다. 사도 바울은 이 서신에서 당시 고린도 교회 안에 내재해 있던 철학적 오만과 수사학적 자랑, 그리고 복음을 인간 중심으로 해석하려는 시도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특히 고린도전서 1~2장에 집중된 논쟁은 헬라 철학의 핵심 개념인 ‘로고스’(λόγος)를 중심으로 전개되며, 바울은 이를 복음의 중심인 ‘십자가의 도’와 연결시켜 신학적으로 전복하고 재해석한다.
이 논문은 고린도전서에 나타난 ‘로고스’ 개념이 당시 헬라 철학 및 수사학 전통과 어떤 연관이 있으며, 바울이 이를 복음의 중심인 십자가 사건을 통해 어떻게 해체하고 재구성했는지를 고찰하고자 한다. 더불어, 이 ‘로고스 신학’이 고린도 교회 공동체의 실제 문제—분열, 자랑, 설교 중심주의—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탐구하며, 현대 교회에 주는 교훈을 제시한다.
2. 헬라 철학에서의 '로고스'(λόγος)의 의미
‘로고스’는 고대 철학에서 단지 말이나 언어를 넘어 존재의 원리와 진리의 구조를 설명하는 개념이었다. 초기 철학자인 헤라클레이토스는 로고스를 우주에 내재된 변화의 원리이자 신적 질서로 보았고, 스토아 철학은 로고스를 신적 이성, 세계를 관통하는 자연 법칙으로 이해했다. 필로와 같은 유대-헬레니즘 철학자들도 로고스를 하나님과 세계 사이를 연결하는 중재자로 이해하였으며, 요한복음 역시 이를 “태초에 계신 말씀”(요 1:1)으로 사용하여 기독론적 중심으로 재해석하였다.
바울이 활동하던 고린도는 이러한 철학이 살아있는 도시였으며, 특히 수사학(레토릭)은 정치와 교육, 종교 영역까지 깊은 영향을 미쳤다. 로고스는 수사학의 핵심 요소로, 연설자의 설득력과 논리적 일관성을 상징했으며, 이는 곧 리더십의 정당성과도 연결되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바울보다 언변이 뛰어난 아볼로를 선호한 배경도 여기에 있다.
3. 고린도전서 1:18 – λόγος τοῦ σταυροῦ
“Ὁ λόγος γὰρ ὁ τοῦ σταυροῦ...”로 시작하는 고린도전서 1장 18절은 바울 신학의 중심부에 위치한 선언이다. 여기서 바울은 ‘십자가의 도’ 또는 ‘십자가의 말씀’이라는 로고스를 복음의 핵심으로 제시한다. 그는 철저하게 헬라 철학과 수사학적 로고스의 정의를 반전시킨다. 인간의 논리로는 미련하고 실패로 보이는 십자가가, 실은 하나님의 구속 역사 안에서 가장 지혜롭고 강력한 방식이라는 것이다.
헬라인은 지혜(σοφία)를, 유대인은 표적(σημεῖον)을 구하지만, 바울은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말한다(1:22–23). 이는 그 시대의 로고스 기대를 완전히 무너뜨리는 선언이며, 복음은 철학이나 기적이 아니라, 십자가라는 역사적이고 고통스러운 사건에 중심을 둔다는 점에서 전례 없는 신학적 전복이다. 이 로고스는 수사적 설득이 아니라, 성령의 나타남(2:4)을 통해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계시의 로고스이다.
4. 로고스, 능력, 지혜의 삼중 구조와 삼위일체적 통합
고린도전서 1장 24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δύναμις)이요, 하나님의 지혜(σοφία)”라고 말한다. 이 구절은 단지 삼중 개념의 나열이 아니라, 복음의 전달 구조 전체를 계시–선포–실행으로 통합하는 삼위일체적 틀로서 이해될 수 있다. 로고스는 하나님의 뜻이 말씀이 되어 선포되는 계시의 방식이며, 능력은 그 말씀이 역사하는 실제이며, 지혜는 그 역사 안에 내재된 구속의 원리이다.
이 구조는 단순한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신자 공동체 안에서 작동하는 구체적 경험이다. 고린도전서 2장에서 바울은 철저히 ‘성령의 나타남’을 통해 이 복음의 로고스가 전달된다고 밝힌다. 따라서 바울에게 로고스는 이성적 설명이 아니라 영적 사건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것과 연결되는 구속 사건이다.
5. 바울의 수사학적 절제와 설교 전통의 신학화
바울은 2장 1절 이하에서 “나는 너희에게 나아갔을 때 탁월한 말이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2:1)라고 말한다. 그는 헬라 수사학의 전형적 수단인 ‘에토스, 파토스, 로고스’ 삼단 구성에서 철저히 로고스를 배제하는 태도를 보인다. 이는 바울이 단지 수사학을 싫어해서가 아니라, 복음이 인간의 말솜씨에 묶이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내 말(λόγος)과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πειθοῖς σοφίας λόγοις)이 아니요,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였다”고 선언한다(2:4). 여기서 '로고스'는 철학적 논변의 도구가 아니라, 복음의 그릇이며, 그 중심에는 ‘나무에 달린 저주받은 메시아’(신 21:23)가 있다. 바울은 의도적으로 헬라 수사학의 영광을 버리고, 복음의 오점을 부끄러움 없이 드러냄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이 더욱 빛나게 한다.
6. 로고스 경쟁, 아볼로파, 공동체 분열
고린도 교회 내의 분열은 지도자에 대한 언변 선호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고전 1:12–13에서 드러나듯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라는 진술은 로고스 중심의 리더십 추종 구조를 반영한다. 아볼로는 학문과 웅변에 뛰어난 유대인이었으며(행 18:24), 그의 수사적 탁월함은 철학적 배경이 있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매력적으로 비쳤다.
바울은 이러한 로고스 중심 리더십이 복음의 본질을 해친다고 보았다. 그는 “내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느냐?”(1:13)고 되묻는다. 바울에게 로고스는 결코 공동체의 중심이 될 수 없으며, 오직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만이 교회의 중심이어야 한다. 로고스는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며,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 되게 하는 도구여야 한다.
7. 로고스와 하나님 나라: 말이 아닌 능력
고린도전서 4:20은 바울의 로고스 신학을 응축한 선언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λόγος)에 있지 아니하고 능력(δύναμις)에 있느니라.” 바울은 여기서 로고스를 철저히 제한한다. 이는 복음 선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수사학으로 전락시키려는 인간적 시도를 거부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설득력이나 지적 유희로 확장되지 않는다. 그것은 실제로 삶을 변화시키고, 공동체를 새롭게 하며, 죄인을 거룩하게 하는 성령의 능력으로 세워진다. 바울은 로고스를 복음의 전달 방식으로는 인정하되, 그 효과와 능력은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확고히 한다.
8. 결론
고린도전서에 나타난 바울의 ‘로고스’ 신학은 단지 용어의 차원을 넘어, 당시 헬라 세계가 자랑하던 철학, 수사학, 인간 중심적 자랑을 철저히 해체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중심에 둔 복음 구조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혼란—분열, 은사 과시, 윤리적 혼란—의 근원을 철학적 로고스 중심주의에서 찾았으며, 이에 대해 철저히 ‘십자가의 로고스’로 대응하였다.
오늘날 교회도 로고스를 어떻게 이해하고 사용하는지에 따라 그 신학과 사역의 방향이 결정된다. 로고스는 단지 설교의 기술이 아니라, 복음의 영광을 담는 그릇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바울처럼 수사학보다 계시, 논리보다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며,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만을 자랑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고린도전서 장별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