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복음서

고린도전서 11장 묵상 강해설교

샤마임 2025. 5. 1.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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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안에서 질서와 경건을 회복하는 삶

고린도전서 11장은 공동체 안에서 지켜야 할 경건과 질서에 대해 말하는 중요한 본문입니다. 이 장은 두 가지 주요한 주제를 다룹니다. 첫 번째는 남녀의 머리 덮는 문제를 통해 예배에서의 질서와 권위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을 다루며, 두 번째는 성찬의 바른 태도와 주의 만찬의 참된 의미를 강조합니다. 이 두 가지 주제는 표면적으로 매우 다르게 보일 수 있으나, 공통적으로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과 공동체를 세우는 삶을 추구하도록 이끌고 있습니다. 본문은 단지 고린도 교회 내부의 문제를 교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오늘날 우리에게도 예배와 공동체 생활에서 하나님의 뜻과 거룩함을 회복하는 길을 제시해 줍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예배 안에서, 그리고 삶 속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성숙한 믿음의 태도를 묵상해 보아야 합니다.

 

질서의 회복: 남녀의 머리 덮는 문제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지키고 있는 전통을 칭찬하면서도, 한 가지 문제를 언급하며 교훈합니다.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11:3). 이 말씀은 단순한 성 역할 구분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와 권위 구조를 존중하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머리’로 번역된 헬라어 ‘κεφαλή(케팔레)’는 권위나 근원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 → 그리스도 → 남자 → 여자라는 구조는 위계라기보다 관계 속에서 질서와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입니다.

 

바울은 남자가 기도하거나 예언할 때 머리를 덮으면 그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고, 여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고 기도하거나 예언하면 자기 머리를 욕되게 한다고 말합니다(11:4-5). 당시 머리를 덮는 것은 문화적으로 정숙함과 순종의 상징이었으며, 여성이 머리를 가리지 않는 것은 부끄러움 없는 태도로 여겨졌습니다. 바울은 여자가 머리를 덮지 않고 기도하는 것을 남편을 무시하는 태도로 간주했습니다. 반면 남성은 머리를 덮는 것이 로마와 헬라의 이방 제사에 영향을 받은 모습으로 간주되었기에, 기독교적 예배에서는 벗는 것이 올바른 태도였습니다. 이는 단지 당시의 문화적 조건을 반영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남녀의 차이를 인정하고, 그것을 예배의 맥락에서 어떻게 조화롭게 드러낼지를 가르치는 예입니다.

 

바울은 창조 질서를 언급하며 여자는 남자에게서 났고, 남자는 여자를 위해 지음 받지 않았다고 말합니다(11:8-9).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를 통해 남녀의 존재 방식과 순서를 지적하지만, 이로 인해 어느 한 쪽이 열등하거나 우월하다는 판단을 내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그러나 주 안에서는 남자 없이 여자가 없고 여자 없이 남자가 없느니라”(11:11)라고 덧붙이며 상호의존성과 평등함도 분명히 합니다. 이는 당시 남성 중심의 문화와는 다르게, 복음 안에서는 남녀가 서로를 존중하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살아가야 함을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질서를 지키는 것과 동시에 존엄성을 인정하는 균형이 필요합니다. 고린도교회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교회 역시, 예배의 모든 모습이 하나님께 대한 경외와 질서 속에 이루어져야 하며, 남녀 모두 하나님의 뜻 안에서 존중받아야 할 존재임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분열된 공동체: 성찬의 왜곡

11장 후반부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 내에서 성찬의 의미가 왜곡되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너희가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들으니…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11:18-20). 본래 성찬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억하고, 공동체가 한 몸으로 연합했음을 고백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에서는 부유한 자들이 먼저 와서 음식을 마음껏 먹고 가난한 자들은 배고픈 채로 남겨지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는 성찬의 영적 의미를 무시한 채 자기중심적으로 전락한 신앙의 실상을 보여줍니다.

 

바울은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11:22)며 강하게 꾸짖습니다. 여기서 ‘업신여기다’는 헬라어 ‘καταφρονέω(카타프로네오)’는 멸시하다, 가치 없게 여기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교회의 중심은 그리스도이며, 그리스도는 가난하고 연약한 자들을 위한 희생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성찬은 이웃을 무시하거나 차별하는 자리가 아니라, 복음의 겸손과 나눔을 실천하는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찬은 사회적 신분이나 경제적 배경을 초월하여 모든 이가 그리스도 앞에서 평등함을 누리는 자리여야 하며, 이를 무시하는 행위는 곧 복음을 훼손하는 일입니다.

 

바울은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과 잔을 나누신 사건을 인용하며,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라… 이것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11:24-25)라고 말씀하신 내용을 상기시킵니다. 성찬은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현재적으로 경험하고 삶으로 반응하게 하는 거룩한 예식입니다. 성찬은 구속의 은혜를 상기하고, 우리가 누구를 믿고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새롭게 깨닫는 기회입니다. 그러므로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며(11:27), 자신을 살피고 참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11:30)라는 구절은 공동체의 죄와 불순종이 실제적인 심판으로 나타났음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잠자는 자’는 죽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하나님께서 공동체의 죄를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성찬은 삶을 돌아보는 회개의 자리이며, 공동체의 연합을 새롭게 하는 거룩한 은혜의 통로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찢기신 몸과 흘리신 피는 공동체가 얼마나 거룩하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게 해줍니다. 성찬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예배에 대한 경건함과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을 동시에 담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과 공동체를 위한 절제

바울은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11:31)라고 말하며 자기 성찰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예배와 성찬은 단지 의식을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신앙의 태도로 임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날마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하나님의 말씀 앞에 정직해야 하며, 다른 이들을 세워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성찬은 공동체 안에서 섬김과 사랑을 실천하는 자리입니다.

 

바울은 마지막으로 “너희가 먹고 마실 때에 서로 기다리라”(11:33)고 권면합니다. 이는 공동체적 배려와 일치의 정신을 나타냅니다. 나의 속도와 형편만을 따라가며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를 돌아보며 함께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참된 공동체입니다. 신앙은 개인적이지만 결코 사적인 것이 아니며, 늘 공동체 속에서 이루어지는 삶이어야 합니다. 고린도교회의 문제처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경건을 지키는 데에 집중할 뿐 아니라 형제를 위한 절제와 배려를 함께 실천할 때, 진정한 복음 공동체가 이뤄질 수 있습니다. 예배와 성찬, 그리고 삶의 모든 자리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로서 사랑과 질서와 경건을 함께 세워가야 합니다.

 

결론

고린도전서 11장은 예배 안에서의 질서, 성찬의 거룩함, 공동체의 사랑을 함께 조명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결코 방종이 되어서는 안 되며, 모든 것이 하나님의 질서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우리의 예배와 성찬 참여는 하나님을 향한 경외와,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이어져야 하며, 모든 삶의 자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거룩한 제단이 되어야 합니다. 성찬은 단지 개인의 영적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믿음을 새롭게 하고 회복시키는 자리가 되어야 하며, 그 자리에 참여하는 모든 자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살피며 겸손히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겸손과 절제로 예배하고, 서로를 세우는 공동체로 살아가기를 결단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장별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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