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서신서

고린도전서 14장 묵상 강해

샤마임 2025. 5. 1.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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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덕을 세우는 은사의 질서

고린도전서 14장은 성령의 은사들 가운데 방언과 예언에 대한 구체적인 교훈을 중심으로, 공예배에서 은사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에 대한 실천적 지침을 제시합니다. 바울은 앞선 13장에서 ‘사랑’을 가장 크고 영원한 은사로 강조한 뒤, 사랑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신령한 것들’, 특히 예언을 사모하라고 권면합니다. 이는 사랑의 틀 안에서 은사를 질서 있게 사용하는 것이 교회의 성숙과 연합을 이루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는 바울의 중심 교훈입니다. 고린도교회는 방언의 은사를 과도하게 추구하고 자랑하는 경향이 있었으며, 이는 공예배의 혼란과 공동체적 무질서를 야기했습니다.

 

성령의 은사는 본질적으로 공동체의 유익을 위한 것이며, 성도들의 신앙을 세우고 교회를 하나로 만들기 위해 주어진 도구입니다. 그러나 은사가 사랑 없이 사용될 때 그것은 분열과 혼란을 일으키고, 오히려 하나님 나라의 질서에 반하게 됩니다. 바울은 이 장에서 강력하게 ‘사랑 안에서의 은사 사용’, ‘질서 있는 공예배’, 그리고 ‘하나님의 성품에 합당한 예배의 흐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며,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교회의 유익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어떻게 질서를 따라야 하는지를 깊이 배우게 됩니다.

 

방언보다 예언을 사모하라

바울은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더욱 예언을 하려고 하라”(14:1)라고 권면합니다. 여기서 ‘예언’은 헬라어 ‘προφητεία(프로페테이아)’로,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고 교회를 권면하며 믿음을 세우는 말씀의 은사를 뜻합니다. 반면 ‘방언’은 ‘γλώσσαις(글로싸이스)’로, 인간의 언어 혹은 천사의 언어를 말하는 특수한 은사로 이해되었습니다. 방언은 주로 개인과 하나님 사이의 영적 교류를 위한 은사로, 공동체를 위한 메시지가 아닌 경우 그 효과는 제한적입니다.

 

바울은 방언의 은사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예언의 은사가 공예배에 더 유익하다고 강조합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니라”(14:2-3). 예언은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일이며, 공동체가 함께 듣고 반응하며 성숙해지는 데 필수적입니다. 방언은 자기 영을 세우는 데에 유익하지만, 통역이 없는 한 공동체의 유익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분명히 말합니다. “교회를 세우는 자라야 더 크다”(14:5). 여기서 ‘세우다’는 ‘οἰκοδομεῖ(오이코도메이)’라는 단어로, 집을 짓는다는 의미이며, 교회의 유익과 질서를 세우는 것을 뜻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바울은 단순히 성령의 역동성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역동성이 실제로 교회를 세우는 방향으로 사용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초대교부 크리소스톰은 이 구절을 주석하며, “교회는 성령의 권능으로 세워지되, 반드시 사랑과 질서의 구조 안에서 세워져야 하며, 자기 자랑이나 이기심은 성령의 흐름을 막는다”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은사의 위대함은 그 효과보다도, 그것이 얼마나 공동체를 세우는 사랑의 통로로 사용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질서 있는 공예배의 중요성

바울은 방언이 교회 안에서 아무 유익이 없다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방언이 통역될 때에는 유익하다고 덧붙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방언을 말할 때에 통역하지 아니하면 말하는 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으니 허공에 말하는 것이라”(14:9). 여기서 ‘허공’은 의미 없는 소리, 낭비된 에너지로 해석될 수 있으며, 바울은 은사의 사용이 ‘유익’과 ‘분명한 전달’이라는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는 점을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은사는 신비함으로 포장된 종교적 체험이 아니라, 말씀처럼 ‘가르치고 권면하고 위로하며’ 교회를 건강하게 성장시키는 통로입니다. 바울은 “교회에서 내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을 수 있는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14:19)라고 고백합니다. 이는 바울 개인의 방언 경험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공예배에서는 공동체의 유익이 더 중요하다는 신학적 기준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며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14:20)고 권면합니다. 이는 성숙한 신앙인의 태도는 영적인 체험이나 특별한 은사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질서를 고려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임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신앙의 성숙은 자기 유익이 아니라 공동체의 덕을 구하는 데에 있습니다. 공예배는 신비한 체험보다 공동체 전체가 함께 듣고 배우며 자라가는 자리여야 하며,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말하는 방언은 그 의미가 설명되지 않는 한 공동체를 혼란스럽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예언과 방언이 각각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에게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설명합니다. 방언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 표적이 되지만, 해석이 없을 경우 혼란을 초래하고, 예언은 믿는 자들에게 직접적인 도전과 위로가 되어 그 마음을 드러나게 합니다. “그가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신다 전파하리라”(14:25). 이는 예언의 은사가 공동체 안에 하나님이 실제로 임재하심을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실제로 바르게 사용된 은사는 외부인들에게도 회개의 통로가 되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확장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다

바울은 예배 중 은사의 사용에 있어서도 순서와 규율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하게 강조합니다.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14:26). 여기서 바울은 은사의 다양성과 자발성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무분별하게 흘러가지 않도록 ‘질서’를 강조합니다. 방언은 두세 사람이 순서대로 말하고, 반드시 통역자가 있어야 하며, 없을 경우에는 조용히 하나님께만 말하라고 합니다. 예언도 마찬가지로 두세 사람이 말하고, 나머지는 분별할 것이며, 새로 계시를 받은 자가 있으면 먼저 말하던 자는 잠잠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공동체 안에서 누구도 은사의 이름으로 무제한 발언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14:33). 이 말씀은 성령의 역사도 언제나 하나님의 성품을 따르며, 공동체 안에서 조화를 이루는 방향으로 흘러야 한다는 원칙을 세웁니다. 방언과 예언이 질서 안에서 사용될 때,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반영하게 되며, 그 안에서 진정한 화평과 연합이 이루어집니다. 공예배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가장 영광스러운 모임이기에, 그 안에 흐트러짐이나 혼란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여성의 예배 참여에 대한 언급도 포함시키며,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말합니다(14:34-35). 이는 당시 고린도 사회와 교회 내 문화적 배경 속에서 특정 상황을 다룬 규범으로 해석되어야 하며, 바울이 다른 곳에서는 여성의 기도와 예언을 허락한 것을 보면(고전 11:5), 이 구절은 공예배의 무질서를 바로잡기 위한 맥락적 지침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바울의 본의는 여성을 침묵시키는 것이 아니라, 예배의 질서를 세우기 위한 목회적 고려였습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모든 것을 품위 있게, 질서 있게 하라고 권면하며(14:40), 이는 은사의 사용뿐 아니라 예배의 전반적인 태도, 곧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결론입니다. 교회는 성령의 자유함과 하나님의 질서가 함께 흐르는 곳이며,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자유 속의 질서’, ‘은사 속의 사랑’, 그리고 ‘체험 속의 유익’입니다.

 

결론

고린도전서 14장은 성령의 은사가 교회 안에서 어떻게 사용되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방언이나 예언 같은 특별한 은사가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질서와 사랑 안에서 사용되어야 하며, 하나님은 무질서가 아닌 화평과 질서의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서로를 세우는 통로가 되도록 점검해야 합니다. 은사의 중심은 자기 자랑이 아니라 공동체의 덕이며, 그 위에는 언제나 사랑과 순종이 덧입혀져야 합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모든 은사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건강을 위한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사랑 안에서, 질서 안에서, 겸손 가운데’ 사용할 줄 아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장별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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