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장 묵상 강해설교
하나님의 지혜는 성령으로만 이해됩니다
고린도전서 2장은 복음의 본질을 다시금 깊이 조명하며, 복음이 인간의 지혜로는 결코 이해될 수 없고 오직 성령을 통해 계시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바울은 1장에서 십자가의 도가 세상의 지혜에 의해 판단될 수 없다는 사실을 천명한 데 이어, 2장에서는 성령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지혜가 어떻게 성도들에게 열려지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복음은 단지 인간의 설득이나 철학적 논증에 기초하지 않으며, 영적인 차원의 계시를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신앙의 출발점이 인간의 설득력이나 논리가 아니라, 성령의 조명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묵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깊은 뜻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세상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이 아니라 성령의 안목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 본문을 묵상하며, 우리는 신앙생활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깊이 성찰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바울의 선언은 단지 고린도 교회를 향한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인간의 말과 하나님의 능력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이 처음 그들 가운데 나아갔을 때의 모습을 이렇게 회상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2:1). 여기서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이란 고대 그리스에서 중시되던 수사적 기교와 철학적 설득을 의미합니다. 당대의 수사학은 청중을 사로잡기 위한 기술이자 권력의 수단이었고, 많은 철학자들과 연설가들이 그 지혜와 말솜씨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러한 접근을 의도적으로 거부합니다. 그는 철학자처럼 고린도 교회 앞에 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2:2)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작정하였음’이라는 헬라어 ‘ἔκρινα(에크리나)’는 결단과 선택의 의지를 담은 말로, 바울이 단순히 철학적 방법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십자가만을 드러내기로 했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복음의 중심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 외의 어떤 장식된 수사나 논리는 본질을 흐릴 뿐이라고 바울은 믿었습니다.
당시 고린도는 수사학과 철학의 도시였습니다. 논리와 웅변은 도시의 엘리트 문화의 핵심이었고, 지적 설득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주요 수단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런 문화에 깊이 노출된 교회가 복음을 인간적 기준으로 판단하고 있었던 것을 우려했습니다. 그는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다”(2:3)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은 단지 인간적인 나약함의 표현이 아니라, 인간의 능력에 의존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바울은 복음 전파의 초점을 청중의 반응이나 자신의 언변이 아니라, 복음 자체의 능력에 두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2:4). 여기서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이라는 표현은 헬라 철학자들이 사용하던 언어 기술을 뜻하는 반면,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은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신 사건을 의미합니다. 이는 단지 기적이나 감정적 체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들은 자들의 마음 깊은 곳에서 일어난 근본적인 변화, 곧 회심과 신앙의 반응을 뜻합니다. 이 변화는 외적인 설득이 아니라 내면의 변혁이며, 그것은 오직 성령의 사역을 통해 가능하다고 바울은 확신합니다.
이러한 사역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2:5). 믿음은 지식의 동의나 감정의 고양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의 능력 가운데 세워지는 실체이며, 하나님의 은혜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구절을 주석하며, 신앙은 인간의 설득으로 흡수되는 개념이 아니라, 은혜의 사건 속에서 각 개인이 부르심에 응답함으로 시작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신이 이해한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개입하신 결과로 시작되며, 그 중심에는 성령의 역사하심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감추어진 하나님의 지혜
바울은 6절 이하에서 또 다른 차원의 지혜를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2:6). 여기서 '온전한 자들'은 헬라어 'τελείοις(텔레이오이스)'로, 성숙한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복음은 단순한 자들에게도 열리지만, 동시에 신령한 깊이를 추구하는 자들에게는 더욱 깊은 지혜로서 드러납니다. 성숙한 신자는 복음의 겉모습을 넘어서 그 내면의 진리를 탐구하는 이들입니다.
이 지혜는 “감추어졌던 것”이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고 합니다(2:7). ‘감추어졌다’는 헬라어 ‘ἀποκεκρυμμένην(아포케크뤼메넨)’은 의도적으로 숨겨졌다는 뜻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구속 계획이 단지 구약 시대에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았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지성으로는 도무지 도달할 수 없는 차원에 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이 진리는 시간이 되기까지 숨겨진 것이며, 때가 차매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계시입니다.
바울은 또한 이 지혜를 깨닫지 못한 세상 권력자들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말합니다(2:8). 여기서 ‘영광의 주’라는 표현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뜻하는 ‘카보드 야훼’와 연결되며,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 영광의 실체이심을 나타냅니다. 만일 그들이 그리스도의 본질을 알았다면 결코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지혜는 하나님의 영광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제한적입니다.
이제 바울은 구약의 이사야 64장 4절을 인용하며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2:9)고 선언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이 오직 계시를 통해서만, 그리고 그것도 성령의 도우심 가운데서만 가능하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구절을 두고, 하나님은 자기를 사랑하는 자에게 신비 안에서 자신의 영광을 보여주신다고 해석했습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만이 그 지혜의 깊이에 다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조명으로 알게 되는 영적 진리
바울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2:10). 여기서 '깊은 것'이라는 표현은 헬라어 'βάθη(바테)'로, 바다의 심연처럼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하나님의 내면을 뜻합니다. 이러한 깊이를 탐색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성령이시며,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과 의도를 온전히 아십니다.
바울은 이어 인간의 영과 하나님의 영을 비교합니다.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2:11). 이는 존재의 깊이를 이해하려면 그 본질에 속한 자만이 알 수 있다는 논리를 제시하며, 성령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깊은 뜻이 열릴 수 있음을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단지 감동을 주는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가능하게 하는 인격적 동반자이십니다.
이 성령을 바울은 “세상의 영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이라고 표현하며,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신다”(2:12)고 말합니다. 성령은 단지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그 뜻 안에 참여하게 하시는 분이기도 합니다. 에라스무스는 이 구절을 인용하며, 진정한 지혜는 오직 내면의 계시, 곧 성령의 빛 아래에서만 형성된다고 말했습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이 계시는 인간의 말로 설명되거나 세상의 지혜와 연합되지 않습니다. 바울은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2:13)고 말합니다. 이 구절에서 ‘신령한’이라는 표현은 ‘πνευματικοῖς(프뉴마티코이스)’로, 성령에 속한 것 또는 성령에 의해 해석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리의 해석은 세상의 언어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직 성령께서 각 사람의 마음 안에서 해석하시고 깨닫게 하실 때 가능해집니다.
반대로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2:14)라고 말하면서, 믿지 않는 자의 한계를 지적합니다. ‘육에 속한’이라는 표현은 ‘ψυχικὸς(프쉬키코스)’로, 단순히 육체적이라는 의미를 넘어서 영적인 이해 능력이 닫혀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러한 자는 하나님의 일들이 미련하게 보이며, 그것들을 이해할 수도 없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이는 성령이 없이는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인식과 반응이 일어날 수 없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결국 바울은 영적인 사람, 즉 ‘πνευματικὸς(프뉴마티코스)’는 모든 것을 판단하지만, 아무에게도 판단받지 않는다고 말하며, 그 이유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2:16)는 선언으로 마무리합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마음’이란 단순한 감정이나 태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형성된 하나님의 뜻과 동일한 통찰력을 의미합니다. 이는 단순한 지적 동의가 아니라, 전 존재를 통해 하나님의 의도에 참여하고 순종하는 삶을 뜻합니다.
결론
고린도전서 2장은 성령 없이 신앙은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강하게 증언합니다. 하나님의 깊은 지혜는 인간의 논리로 접근되지 않으며, 오직 성령께서 주시는 계시와 조명을 통해서만 드러납니다. 신앙의 본질은 단순한 교리의 동의가 아니라, 성령과의 인격적 교제 속에서 점차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는 여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성령의 도우심 안에서 날마다 하나님의 깊은 뜻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 각 사람에게 동일한 성령을 통해 말씀하시며, 그 음성을 들을 귀를 가진 자는 그분의 지혜 안에서 참된 자유와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장별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