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서신서

고린도전서 8장 묵상 강해설교

샤마임 2025. 5. 1. 12:49
반응형

지식보다 중요한 사랑의 원리

고린도전서 8장은 당시 고린도 교회 안에서 실제적인 논쟁이 되었던 문제, 곧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는 문제에 대해 바울이 다룬 말씀입니다. 이는 단순한 식생활의 규칙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자유와 공동체를 위한 책임 사이에서 성도가 어떻게 균형을 잡아야 하는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바울은 참된 자유가 공동체의 유익과 약한 형제를 위한 사랑에 기초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 지식과 자유가 아무리 옳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결국 공동체를 해칠 수 있다는 사실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더 깊이 이해하고,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세워가는 사랑의 길을 선택하기를 소망하며 이 말씀을 나눕니다. 성도의 참된 성숙은 자유의 사용이 아닌, 사랑의 실천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세운다

바울은 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여기서 ‘지식’은 헬라어 ‘γνῶσις(그노시스)’로, 단순한 정보의 습득이 아니라, 깊은 통찰과 이해를 의미합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 안에는 헬라 철학적 배경에서 비롯된 영지주의적 사고방식이 퍼져 있었고, 일부 신자들은 자신의 지식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며, 제물 자체에 신비한 효과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그것을 자유롭게 먹는 자신들의 행동이 정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지식이 인간을 교만하게 할 수 있음을 지적합니다. ‘교만하게 하다’는 헬라어 ‘φυσιόω(퓌시오오)’는 마치 공기처럼 자신을 부풀린다는 의미를 가지며, 실제보다 더 위대하게 여기는 자기 기만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반면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 하는데, ‘덕’은 ‘οἰκοδομή(오이코도메)’로 집을 짓는 것처럼 공동체를 세우고 견고하게 한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지식이 옳음을 주장하는 것이라면, 사랑은 다른 이를 배려하며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 지식은 판단의 도구일 수 있지만, 사랑은 생명을 살리는 능력입니다.

 

바울은 이어서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8:2)라고 말합니다. 이는 지식에 대한 겸손을 요청하는 말씀입니다. 진정한 지식은 자신이 얼마나 모르는지를 아는 데서 시작된다는 뜻입니다. 지식이 깊어질수록 겸손해지는 것이 진정한 성숙입니다. 이어 바울은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8:3)고 말함으로써, 지식보다 중요한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삶임을 보여줍니다. 사랑은 단지 감정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실천이며,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삶입니다.

 

하나님은 유일하시며 우리도 그분 안에 있음

4절부터 바울은 우상의 제물 문제에 대한 신학적 원칙을 제시합니다. “우상에게 바친 제물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이는 고린도 신자들 중 일부가 가진 ‘지식’을 확인해주는 문장이며, 실제로 바울도 이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우상은 본질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허상이므로, 우상에게 바친 제물 역시 영적으로 아무 효력이 없습니다.

 

바울은 “비록 하늘이나 땅에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8:5)라는 표현을 통해, 당시 헬라-로마 세계의 다신론적 문화를 언급합니다. 수많은 신들과 신전들이 있는 도시 고린도에서, 이방인들은 신의 수호를 받기 위해 음식을 바치고 제사를 드리는 것이 일상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8:6)라고 선언하며, 유일신 사상과 그리스도 중심 신앙을 분명히 합니다.

 

“모든 것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이 구절은 바울 신학에서 매우 중심적인 표현입니다. 창조주로서의 하나님 아버지와, 구속자이자 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함께 언급함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과 삶의 근원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강조합니다. 이러한 인식이 있는 신자라면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이 본질적으로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문제의 전부는 아닙니다.

 

바울은 “이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니”(8:7)라고 말하며, 다시 공동체 내의 약한 자들에 대한 시선을 되돌립니다. 믿음이 약한 자들은 여전히 우상과의 연결성을 인식하며, 우상에게 바쳐졌던 제물을 먹는 것에 대해 죄책감이나 두려움을 갖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지식이 없는 자들을 비난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양심을 존중하라고 말합니다. 이는 교회의 건강성과 일치를 지키기 위한 근본적인 태도이며, 신앙의 강함은 타인의 약함을 품을 때 가장 아름답게 나타납니다.

 

자유의 한계를 아는 것이 성숙입니다

바울은 9절에서 경고합니다.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여기서 ‘걸려 넘어지다’는 헬라어 ‘πρόσκομμα(프로스코마)’는 실제로 사람을 넘어뜨리는 장애물이라는 의미입니다. 자유는 본래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복음의 선물이지만, 그 자유가 타인에게 상처가 된다면 복음의 본질을 흐리게 됩니다. 자유는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한 책임을 동반해야 합니다.

 

바울은 이어서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전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양심이 약한 자가 담력을 얻어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8:10)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담력을 얻는다(οἰκοδομεῖται)는 표현은 본래 긍정적인 뜻이지만, 여기서는 부정적인 방식으로 사용되어, 잘못된 모방이나 양심을 거스른 실천으로 연결될 수 있음을 나타냅니다. 즉, 약한 자는 강한 자의 행동을 보고 본래 자신의 신념과 다른 행위를 하게 되며, 그로 인해 자신의 내면에서 갈등과 파괴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단순히 오해나 논쟁을 넘어선 문제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그 형제가 네 지식으로 말미암아 멸망하게 되느냐”(8:11)며, 강한 자의 책임을 엄중하게 지적합니다. ‘멸망’은 헬라어 ‘ἀπόλλυμι(아폴뤼미)’로, 단지 상처받는 차원을 넘어, 구원의 길에서 완전히 이탈하게 되는 심각한 결과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피값으로 사신 형제가 나의 자유로운 행동 때문에 넘어지거나 신앙을 포기하게 된다면, 그것은 그 어떤 이론적 정당성도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입장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8:13). 이는 단지 일시적인 금욕이 아니라, 복음을 위해 자발적으로 자기 권리를 포기하겠다는 헌신의 표현입니다. 자유를 가졌으나, 그 자유를 사용하지 않는 것, 이것이야말로 복음의 능력입니다. 사랑은 자유를 포기할 수 있는 용기에서 시작되며, 이는 참된 제자의 삶을 이루는 기초입니다.

 

결론

고린도전서 8장은 지식과 자유,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의 사랑이라는 중요한 주제를 다룹니다. 지식은 옳음을 말하지만, 사랑은 유익을 선택합니다. 자유는 은혜의 선물이지만, 사랑은 그것을 공동체의 덕을 위해 절제하게 합니다. 바울은 약한 형제를 위한 배려가 단지 개인의 선택 문제가 아니라, 복음을 드러내는 공동체 전체의 사명임을 강조합니다. 성도는 단지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라, 서로를 세워가는 책임의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 말씀을 따라, 나의 자유와 권리를 하나님의 사랑과 공동체의 유익 아래 두는 겸손을 배우며, 진정한 성숙과 섬김의 길을 걷기를 소망합니다. 참된 신앙은 옳음의 경주가 아니라, 사랑의 발걸음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장별요약

 

반응형
그리드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