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5장 묵상 강해설교
그리스도의 사랑에 붙잡힌 인생, 화목의 사신으로 부름받다
죽음 이후에 무엇이 있는지에 대한 물음은 인간의 영혼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본능적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철학자들만의 영역이 아니라, 일상의 삶 속에서 병상에서, 장례식장에서, 혹은 깊은 밤 홀로 깨어 있는 순간마다 누구나 마주하게 되는 질문입니다. 믿음의 사람들도 삶과 죽음을 넘나들며 이 질문 앞에 선 적이 많습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에서 그리스도인의 소망이 단지 현재의 위로에 머물지 않고, 죽음 너머의 영광까지 바라보게 하는 확신임을 밝힙니다. 그리고 이러한 소망은 오늘의 삶을 무의미하게 만들지 않고, 오히려 더 진지하게, 더 열정적으로, 더 헌신적으로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됩니다. 이 장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사명, 그리고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밝히는 영적 선언문과 같습니다.
장막에서 영원한 집으로: 죽음을 넘어선 소망
바울은 비유로 시작합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5:1). 여기서 "장막 집"은 인간의 육신을 의미합니다. 장막은 임시 거처이며, 언젠가는 무너질 구조입니다. 반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은 영원한 실체로, 죽음 이후에 누ㅇㄹ릴 부활의 몸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이어서 우리가 이 땅의 몸을 입고 탄식한다고 말합니다. 고난과 연약함 속에 있는 육체의 상태는 탄식을 동반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절망의 탄식이 아닙니다. "우리가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5:2). 여기서 "덧입는다"는 표현은 헬라어로 'ependusasthai', 즉 현재 몸 위에 부활의 몸을 입는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죽음을 해체가 아닌, 변화로 이해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끝이 아니라, 부활의 생명으로 덧입는 새ㄴ로운 시작으로 바라봅니다. 그리고 이 덧입음은 소망의 사건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보증하신 미래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결정적으로 말합니다. "이는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5:4). 죽음이 생명을 삼키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죽음을 삼키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반전은 부활 신앙의 본질이며, 그리스도인이 고난 중에도 낙심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주셔서 그것이 보증이 되게 하셨습니다(5:5). 보증(헬라어 'arrabōn')은 계약의 확증이며, 성령은 장차 누릴 영광을 보장해주는 하나님의 서명입니다. 즉 성령은 단지 은사나 위로의 영이 아니라, 장차 도래할 영원한 생명을 앞당겨 누리게 하는 표징이기도 합니다.
주의 심판대 앞에서의 삶: 두려움과 사랑 사이에서
바울은 하늘의 집을 소망하면서도 현재의 삶에 대해 무책임하지 않습니다. 그는 분명하게 말합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5:10).
그리스도인도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 이는 구원의 여부를 결정짓기보다는, 구원받은 자로서 어떻게 살았는지를 평가받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오늘의 삶을 더욱 경건하게 살도록 이끕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복음 전도에 대한 열정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들을 권면하노라”(5:11). 여기서 ‘두려움’은 심판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거룩한 경건함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동기를 설명하며, 자신이 미쳤다 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고, 정신이 온전하다 해도 그것은 성도들을 위한 것이라 말합니다(5:13). 그는 그 중심에 무엇이 있는지를 밝힙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5:14).
여기서 '강권한다'(synechei)는 말은 밀어붙이고 포위하며 결박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선택이 아니라 필연이며, 우리 삶을 완전히 포위하는 절대 동기입니다. 바울은 그 사랑 앞에서 자신이 더 이상 자기를 위해 살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5:15).
이 말씀은 복음이 단지 용서의 메시지가 아니라, 삶의 방향을 바꾸는 부르심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습니다. 그는 이제부터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나의 과거를 덮을 뿐만 아니라, 나의 미래를 새롭게 인도합니다. 그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가치와 목표를 가지고 이 세상 속을 살아가게 합니다.
새로운 피조물과 화목의 사역
이제 바울은 복음의 중심 진리를 선포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5:17).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단지 그를 믿는다는 차원이 아니라, 그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한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새로운 피조물(kainē ktisis)은 단순한 윤리적 변화나 감정적 위로가 아니라, 정체성의 완전한 전환을 말합니다. 이제 우리는 죄와 죽음의 권세 아래 있던 옛 자아가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 안에서 새롭게 창조된 존재입니다. 이 변화는 표면적인 도덕적 개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적 능력으로 인한 본질적 변화를 의ㅇ미합니다.
그리고 이 새로운 피조물에게는 새로운 사명이 주어집니다. 그것은 '화목하게 하는 직분'(diakonia tē katallagēs)입니다.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화목하게 되었고, 이제 그 화목의 소식을 전하는 사신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5:20).
복음 전도는 단지 정보의 전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대사로서,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전하는 사명입니다. 우리는 단순한 봉사자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사신들입니다. 우리의 말과 삶, 관계 속에서 그리스도의 화목의 복음이 선포되어야 합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 삶의 모든 동선은 하나님이 이 땅에 보내신 화목의 대사로서의 발걸음이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복음의 핵심을 단 한 절로 요약합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5:21).
이 구절은 복음의 정수입니다.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정죄받으셨고, 우리는 그 안에서 의롭다 칭함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속죄의 대속적 교환'입니다. 복음은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을 통해 성취된, 거룩하고 두려운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십자가 위에서 완전하게 만난 이 사건이야말로 복음의 중심이며,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결론: 그리스도의 사랑에 붙잡혀, 화목의 사신으로 살아가자
고린도후서 5장은 그리스도인의 존재론과 사명론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우리는 장막에 불과한 육신을 입고 있으나, 하늘의 집을 소망하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을 기억하며, 주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우리를 위해 죽었다가 살아나신 그분을 위해 삽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고, 이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자로서 세상을 향해 그 화목을 전하는 사신으로 부름받았습니다. 이 모든 삶의 중심에는 한 가지 동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단지 감정적인 것이 아니라, 삶 전체를 움직이는 능력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누구를 위해 살고 있습니까? 오늘도 그리스도의 사랑에 붙잡혀 살고 계십니까? 복음은 우리를 새로운 존재로 만들고, 새로운 삶의 방향을 부여합니다. 이제 더 이상 나를 위해 살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가는 삶.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길입니다. 이 길은 좁고 험하지만, 영광스럽고 확실한 길입니다.
그 길을 오늘도 걷는, 화목의 사신으로 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고린도후서 장별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