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21장 묵상 강해설교
새 하늘과 새 땅, 하나님의 거처가 사람들과 함께
요한계시록 21장은 성경 전체의 결말이자, 구속사의 완성을 선포하는 가장 아름답고 장엄한 장입니다. 이 장은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의 강림, 하나님의 임재와 영원한 위로,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 형태를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요한은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에서 이 땅의 고통과 탄식, 눈물과 죽음을 넘어선 전혀 다른 차원의 새 창조의 실체를 환상 가운데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를 성도들에게 전달하며, 우리가 어떤 종말론적 소망을 품고 이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지를 분명히 증거합니다. 본문을 묵상하며 우리는 하나님께서 마지막에 어떻게 우리와 함께 거하시며, 우리를 위한 궁극적 회복의 처소를 준비하시는지를 깊이 되새기게 됩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종말의 묘사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끝까지 책임지시며 결국에는 함께 거하시겠다는 언약의 성취이기에, 우리로 하여금 현재의 고난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품게 만듭니다.
새 하늘과 새 땅: 창조의 회복이자 완성
1절은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고 선포합니다. 여기서 '새 하늘과 새 땅'(οὐρανὸν καινὸν καὶ γῆν καινὴν)은 공간의 이동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질서로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새롭다'는 의미의 헬라어 ‘καινός(카이노스)’는 단순히 시간적으로 새로운 것이 아니라, 본질과 성격이 완전히 달라진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는 과거의 부패하고 타락한 세상이 철저히 종결되고, 하나님에 의해 전적으로 새롭게 창조된 세상을 말합니다. 즉, 구속의 여정이 창조의 회복으로 연결되는 장면이며, 에덴의 상실이 새 창조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는 선언은, 단순히 지리적 해양의 부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전체에서 바다는 종종 혼돈, 악의 세력, 분리와 죽음의 상징으로 사용되었습니다(시편 74:13, 이사야 57:20). 요한은 여기서 바다를 제거함으로써, 새 창조에는 더 이상 죄와 사망, 불안과 위협이 존재하지 않으며,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에 어떤 장애물도 없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완전한 통치가 이루어졌다는 선언이며, 평화와 질서가 영원히 유지되는 상태로서의 새로운 피조 세계를 묘사하는 것입니다.
새 예루살렘의 강림: 하늘에서 내려온 신부
2절에서 요한은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새 예루살렘'은 단지 건축물로서의 도시가 아니라, 하나님 백성 전체를 가리키는 상징이며, 그리스도의 신부로 표현된 교회를 의미합니다. 헬라어로 ‘신부’(νύμφη, 뉌페)는 사랑받고 기다림의 대상이 되는 존재로서,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정결하게 된 자들을 나타냅니다. 이 도성은 땅에서 만들어 올려진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온다는 점에서, 이 거룩한 공동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으로 주어지는 존재입니다.
3절은 본 장 전체의 중심 선언이자 요한계시록의 정점입니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거하시리니.” 여기서 ‘장막’(σκηνή, 스케네)은 출애굽기에서의 회막, 곧 하나님이 백성 가운데 임재하셨던 장소를 떠올리게 합니다. 이는 단지 물리적 공간이 아닌, 하나님이 직접 사람들 가운데 거하시며 관계하시는 상징입니다. 구약의 언약 신학에서 반복되던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레 26:12, 겔 37:27)는 약속이 이제는 상징이 아닌 실재로 이루어지는 순간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더 이상 간접적이거나 성막, 성전 안에 제한되지 않고, 성도 한 사람 한 사람 가운데 영원히 거하시는 방식으로 성취됩니다.
이러한 임재는 그분의 백성에게 참된 안식과 평안을 주며, 인간이 태초에 상실했던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제를 다시 회복하게 되는 사건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보상이 아니라, 구원의 목적이자 종말론의 종착지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더 이상 가려지지 않고, 마침내 드러난 그분의 얼굴 앞에서 우리는 영원한 생명과 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눈물을 씻기시는 하나님: 영원한 위로의 시작
4절은 요한계시록 21장의 절정입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여기서 ‘눈물을 닦아주신다’는 말은 단지 위로의 제스처가 아닙니다. 헬라어 ‘ἐξαλείψει(엑살레이프세이)’는 흔적까지 완전히 지운다는 뜻을 지닌 강한 표현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과거의 고통, 상실, 상처의 흔적까지 모두 지워버리시고, 새롭게 하시는 절대적인 치유와 회복의 은혜를 상징합니다.
‘사망이 없고 애통이나 고통도 다시 있지 않다’는 선언은 단지 미래에 일어날 일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실제적 위로이자,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누릴 궁극적 평화의 상태입니다. 이 구절은 욥의 고난과 같은 깊은 고통 속에 있는 성도들에게, 모든 눈물이 다 닦여지는 날이 반드시 온다는 하나님의 언약적 선언으로 다가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지금의 고통이 결코 영원하지 않다는 진리를 마음에 새기며, 결국에는 하나님 앞에서 모든 아픔이 의미 있게 치유될 것임을 믿고 나아가야 합니다.
5절에서 하나님은 직접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여기서 ‘새롭게 하다’는 헬라어 ‘καινὸς ποιῶ(카이노스 포이오)’는 본질적인 갱신과 재창조를 뜻합니다. 이는 단지 회복이나 수선을 넘어서, 전혀 새로운 차원의 창조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파괴된 세계를 복원하는 분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전적으로 새로운 피조 세계를 친히 지으시는 창조주이십니다. 그분의 말씀은 “신실하고 참되니” 반드시 성취될 것입니다. ‘신실함’(πιστός)과 ‘참됨’(ἀληθινός)은 단순히 하나님의 성품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약속과 언약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보증하는 본질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이유입니다.
생명수 샘과 두 번째 사망
6절과 7절은 그 약속의 구체적인 내용이 선포됩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여기서 생명수 샘물은 요한복음 4장의 사마리아 여인에게 주신 생수와 연결됩니다. 목마른 자에게 주시는 생명수는 성령의 충만함이며, 하나님의 생명을 상징하는 복음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은 '값없이'(δωρεάν, 도레안) 주어진다는 사실은, 하나님 나라의 복이 철저히 은혜에 기초해 있음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 은혜의 빛은, 거부한 자에게는 심판의 기준이 됩니다. 8절은 경고의 말씀입니다.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 이들은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못하고,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며 둘째 사망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 '둘째 사망'(ὁ δεύτερος θάνατος)은 단지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영원히 단절되는 심판을 의미합니다. 이는 회개와 믿음 없이 살아간 자들에게 주어지는 결과이며, 하나님의 거룩함과 공의가 완전하게 드러나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무조건적 보상이 아니라, 거룩한 부르심에 응답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두려움이 아닌 경외함으로 자신을 돌아보아야 하며, 오직 생명책에 기록된 자로서의 삶을 성실히 살아가야 합니다.
결론
요한계시록 21장은 성경 전체가 가리키는 궁극적 목적지이며, 구속사의 완성 지점입니다. 하나님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친히 창조하시고, 새 예루살렘을 하늘에서 내려 보내시며, 우리와 함께 영원히 거하실 처소를 마련하십니다. 이 장면은 장차 올 어떤 신비한 세계의 묘사가 아니라, 지금 이 땅에서부터 우리가 품고 살아가야 할 소망의 본질입니다. 모든 눈물이 닦이고, 고통이 사라지며,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영원한 평화를 누리는 그 날을 바라보며, 오늘도 우리는 믿음으로 흔들림 없이 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장별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