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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의 권위와 기독교 교육의 권위!

샤마임 2011. 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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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서울소재 학교에서는 체벌을 할 수 없다. 서울 교육청은 체벌 자체를 하지 못하도록 못 박았기 때문이다.
체벌을 하지 못하도록 한 이유는 간단하다. 폭력 때문이다. 체벌 자체가 학생을 인격적으로 대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체벌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교사라고 할지라도 학생의 신체의 자유를 억압할 권한은 없다"는 것이다. 즉 개인의 자유를 교사라는, 조직을 통해 억압하는 것은 부당하는 것이다. 개인의 자유를 권위보다 앞세운 경우다. 결국 상대주의적이고 다원주의적인 포스터모더니즘의 시대에 맞은 사상인 것이다. 그렇다면 체벌이 없어진 학교는 어떻게 되었는가? 떠드는 학생을 어떻게 다루고 있을까? 교사에게 욕하는 학생들을 어떻게 처벌하고 있을까? 체벌이 없어진 학교는 누가 이익이고 피해는 누가 보는가?


체벌이 사라진 교실의 분위기는 일단 학생들의 위세가 당당해졌다.
"때리고 싶으면 때려 보세요" 라고 대드는 학생들을 종종 볼 수 있다고 한다.
때릴 수 없는 교사는 이러한 학생들을 그대로 둘 수 없기 때문에 도입한 것이 바로 '벌점제'이다.
말을 듣지 않으면 점수를 깍고 이것을 성적이나 학생의 생활표등에 기입하는 방식을 통해 정식적인 압박을 준다.

이러한 분위기는 교실에서 교사가 학생을 가르치는 권위는 존재가 아니라 지식을 전달하는 직업꾼으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점이다. 공교육의 위기는 다른 데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교사들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는 것이다. 교사들도 교사들로서의 존경의 대상이 아니다. 
직업으로서의 교사일 뿐이다. 금품상납으로 얼룩진 공교육의 실태는 결국 존경이란 단어 자체를 짖밟아 버리고 말았으며, 교사들을 돈을 좋아하는 더러운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들에게 존경이란 말을 얼토당토 않다. 한 마리의 미꾸라지가 온 우물을 흐리게 하듯, 몇 분?의 눈치빠른 교사들의 비상식적인 행동들이 온 교사들의 권위를 땅에 떨어 뜨리고 있는 것이다. 

그건 그렇다치고 학생들은 체벌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때리지 않으니 좋아할 거라는 생각을 하기 쉽다. 그러나 학생들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체벌이 있을 때만 더 편하다는 것이다. 왜일까? 아래는 충암초등학교 초등학생의 글을 정리한 것이다.

먼저 
때리지 않기 때문에 교실 내에서 수업을 방행하고 교사에게 덤비는 학생들 때문에 수업 분위기가 더욱 나빠졌다는 것이다. 
두번째는 
때리지 않음으로 도입된 벌점제로 인해 정신적인 압박을 가중시킨다는 것이다. 
잘못하면 몇대 맞고 말지만, 벌점제를 통해 후일을 걱정하게 생겼기 때문에 공부를 하려는 학생들에게는 오히려 더욱 나쁜 악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세번째는 
체벌이 없어지므로 나쁜 줄 알면서도 스스로 절제하지 못함으로 자신에게 오히려 해를 끼친다.
(참고: 공병호의 개인 블로그 http://blog.naver.com/gong0453/40121817723)

초등학생들에게서 이러한 생각을 하다는 것이 이상해 보이지만, 이것은 초등학생 스스로 자정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무엇이 옳고 경기도 교육감은 체벌이 없어진 것에 대한 좋은 소리를 듣고 했는지는 모르지만 결국 처벌이 없어진다고 할지라도 학교내에서는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옳다. 처벌을 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학교를 다시 살리고 죽이는 것의 근복적인 이유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대도 마치 그것이 공교육을 살리는 핵심전략인 것처럼 떠들어 대는 진보주의자들이 견해는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처벌이 강화됨으로 일반학교에서 명문학교로 변화도 곳도 의외로 많다. 

교육에 대해 잠시만 생각해보자.
일반적으로 사상도 그렇지만 교육도 전통을 중시하는 보수적 교육과 학생들의 자유을 우선하는 진보적 교육 정책이있다. 두 견해는 하늘과 땅의 차이처럼 극명하게 드러난다. 일단 간략하게 그 특성들을 분류해 보자.

전통중심의 교육 / 진보주의적 교육
교사 중심 / 학생 중심
권위적 / 자율적
역사교육 위주 /  자기계발위주
체벌찬성 / 체벌반대
전통을 중시 / 혁명을 중시
역사적     / 반 역사적
역사계승 / 역사단절
우파 / 좌파

이 외에도 많은 차이들이 있을 것이다. 우선 교사의 위치를 본다면 보수주의 교육은 교사는 권위를 가지고 가르친다. 그러나 진보적 교육은 교사는 단치 학생들이 공부하도록 돕는 코치일 뿐이다. 이러한 생각은 근래에 일어난 진보적 성향의 교육정신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대체로 진보주의적 교육사상은 인간의 본성을 선하다고 믿으며, 합리적 사고와 자율을 통해 얼마든지 올바른 사회인으로 성장 가능하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 그에비해 보수주의는 인간은 처음부터 잘못되었기 때문에 어느정도 강압적으로 하지 않으며 제멋대로(진보주의가 말하는 자유) 살아가게 된다. 즉 스스로 인생을 망치는 삶을 살 수 밖에 없다고 믿는다. 우리는 여기서 인간이 본래 악한가 선한가에 대한 인간론의 문제로 급속하게 넘어가는 것을 본다. 이러한 인간에 대한 전제가 결국 교육과 정치와 철학의 문제로 넘어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루소는 성선설을 지지한다.
루소가 주장하는 인간상은 태어날 때는 백지처럼 태어나지만 환경에 의해 악해진다는 것이다. 루소에게 있어서 교육이란 나쁜 환경을 개선하고 올바른 가르침을 주는 것이다. 그래서 루소의 교육사상을 '자연교육'이라 말하는 것이다.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교육의 목적이며, 교사는 학생의 내면에 잠재된 선함을 충분히 계발시켜주는 코치의 역할만을 감당하면 되는 것이다.

그에비해 홉스는 성악설을 지지한다.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본성이 악해진 것이다. 그럼 홉스에게 있어 교육이란 타락한 심정을 잠재우고 교육을 통해 올바른 도덕적 삶을 갖게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홉스는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루소의 교육철학에 대해 조소한다. 인간이 자연으로 돌아가면 서로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무정부상태의 전쟁터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나온 것이 '사회계약'이다. 서로의 욕망을 합의에 해의 조절해야 한다는 것이다. 홉스의 교육은 일정의 강압과 물리적 체벌이 가해지는 것을 정당한 것으로 보았다. 현대의 보수주의적 교육사상과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다.

그렇다면 기독교적 교육사상은 어떤가?
기독교의 교육사상은 전통과 진보의 양면의 칼을 가진 검과 같다고 본다.
먼저는 인간은 타락했다는 전제에서 출발하여 물리적인 체벌이 어느정도 필요함을 성경은 곳곳에서 지적한다.
교육이란 중생을 목적으로 하지는 않지만, 중생된 인간에게 좋은 효과를 가져온다.
바울도 디모데에게 경건의 훈련을 지시했으며, 성경을 가르치도록 권면했다.
일단 성경에 대한 가르침은 역사적 전통을 중시하는 것이며, 인간의 타락을 지지하는 성악설에 교육사상의 전제를 가진다. 그럼에도 교회 교육은 전통적 교육과는 달리 물리적인 체벌이 아니다. 교회교육는 조직에서 나오는 권위가 아니라 사랑에서 나오는 섬김의 권위이다. 역사적인 전통을 잇고는 있지만 사랑과 섬김을 통해 세워지는 권위라는 점에서 세속적인 교육이념과 완전히 다른다. 이것이 바로 보수와 진보의 양날을 가진 기독교교육 사상이다.

진보주의가 인간 그대로의 자유를 말한다면, 기독교 교육은 성령에 의해 주도되는 자유이다. 중생하지 못한 인간들이 말하는 자유는 욕망과 탐욕의 발현 그 자체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자유는 오직 사랑과 섬김이라는 자유로서만 가능하다. 남을 욕한 자유, 비방한 자유는 죄에대한 속박이지 자유가 아니다. 기독교 교육은 이러한 성령에 의한 중생된 자유를 추구하는 자발적 학습으로 만들어져야 한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너무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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