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교육칼럼-시대를 담는 주일학교를 만들자
교회교육칼럼
시대를 담는 주일학교를 만들자
바야흐로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 고전적 전통에서는 지혜를 선대에게 물었다. 지금은 젊은이들에게 물어야 한다. 지하철 타는 법부터 시작하여 전화하는 법까지 젊은이들의 도움이 아니면 살아남기 힘든 시대가 되었다. 우스갯소리로 근래에 들어선 아파트 이름들이 영어나 불어로 칭하는 이유는 시어미를 못 오게 막으려는 꼼수?라고 한다. 웃어야할지 말아야할지 모를 농담들이 어른들을 당혹케하고 난처하게 한다. 이러한 웃지 못 할 예는 세대 간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더 이상 어른들이 필요하지 않다는 우회적 표현이며, 어른들 또한 젊은 세대와 공감하지 못한다는 뜻일 게다.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어른들은 자기만이 경험에 근거한 주장을 강요한다면 젊은 세대를 어른들을 공경하지도 않을 뿐더러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무시당한다. 요즘 아이들이 쓰는 용어를 잠깐 빌리자면 '개무시' 당한다.
필자는 정확하게 90년 4월에 교회에 첫발을 디뎠다. 물론 오래 전부터 교회는 가끔씩 다녔지만 회심의 경험은 없었다. 본격적으로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벌써 24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90년대 초반 교회 안에서는 더 이상 교회성장이 안 된다는 말들이 난무했다. 90년대 중반이 되자 마이너스 성장이란 말이 가끔씩 흘러 나왔다. 여러 곳에서 이러다 한국교회 다음세대가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과 하나님께서 한국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종말론적 불안이 교회 곳곳에 스며들었다. 그러다 십년 후 2000 뉴밀레니엄이 시작되면서 교회는 급속한 퇴보가 일어났다. 90년대 후반부터 주일학교 현장 사역자로 몸담아온 필자로서 주일학교의 퇴보를 해년마다 확인했다.
어림잡은 통계에서도 주일학교의 급속한 몰락 현상은 확인이 가능하다. 필자가 국민학교-초등학교에 다닐 적에 시골교회에서 행사를 한다고 가끔씩 잔치를 벌였다. 아직도 분명하게 기억나는 건 장년부는 고작 50명 정도였음에도 주일학교(초등학교1-6까지) 학생수가 90명을 넘었다. 중고등학교 청년부까지 합하며 150명을 훌쩍 넘겼다. 주일학교 학생수가 장년의 두 배 내지는 세배였다. 그러다 90년대 초반이 되자 장년 출석에 약간 못 미치는 수준이 되었다. 지금은 어떤가. 장년이 200명이 넘는 교회에서도 영아부에서 고등학생까지 다 합해도 100명이 되지 않는 교회가 허다하다. 심지어 아예 주일학교가 없는 교회도 적지 않다. 불과 20년 만에 주일학교 학생들의 2/3가 교회를 떠난 것이다.
20년 전 십대들이 지금은 삼십대 중후반이 되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삼십대는 교회에서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가끔씩 부모 때문에 나오는 몇 몇의 가정 말고는 삼십대가 교회에서 씨가 말랐다. 즉 당시 십대 주일학교 학생들은 지금 교회 밖에 있는 것이다. 십년 전부터 시작된 한국의 고령화 추세는 교회에도 여전히 나타나고 있다. 20년 전 교회 주방에서 일하던 3-40대 주부들이 5-60대가 되어 아직도 교회 주방에서 음식을 준비하고 설거지를 한다.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것이다. 식당에서 일하는 권사님의 하소연은 '젊은 사람이 없고, 있어도 직장에 다니느라 교회에서 일하지 않는다'고 한다. 주일 날 강대상에서 교인들을 보면 새까만 머리가 그리 많지 않다. 20년 전에 열심을 내던 청년들과 젊은 집사님들이 나이가 들어 여전히 교회에 있고, 당시 주일학교 학생들은 교회를 떠나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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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 그림2 그림3
그림1이 90년 이전의 교회 나이분포라면 그림2는 90년대 초중반이고 그림3은 현재의 교회 안 성도들의 나이분포도다. 만약 현재와 같은 나이 분포도가 20년 이상 지속된다면 한국교회는 현재의 1/10로 감소될 수도 있다. 이런 우려는 오래전 이미 예언되었고, 현재는 현실화 되고 있다.
젊은이들은 왜 교회를 떠날까? 학생들이 교회에 나오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진단은 중요하다. 어떻게 진단하느냐에 따라 대책이 나오고 대안이 달라진다. 어떤 분들은 주일학교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를 무척 싫어하면서 '하나님의 교회인데 왜 그런 식으로 비판적으로 보는가?'라고 따졌다. 황당할 뿐이다. 좀 더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작금의 교회 안에서 주일학교에 대한 비전이나 전문성을 가진 교회가 몇이나 될까. 늘 연말이면 교회는 재정을 운운하며 가장 먼저 예산을 줄이는 곳이 주일학교다.
매년마다 하는 전도축제에 수천만 원씩 투자하면서 주일학교에 투자는 형편없다. 다시 한 번 묻건대 전도 축제를 통해 전도되어 오는 새신자가 과연 몇이나 되는가. 여기에 솔직하게 답변할 목회자가 몇이나 될까. 필자도 여러 차례 해피데이나 새가족 전도축제, 새 생명 잔치를 도왔고 기획했다. 그러나 한 주만 지나도 그 많던 전도대상자들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고작 3-4명 정도만 남는다. 그것도 한두 달 다니고 나면 그들도 보이지 않는다. 정착율을 80%를 자랑하는 어떤 교회도 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 그런 교회가 왜 10년 동안 그 많은 정착율에도 성장률은 10%도 되지 못하는가. 80%정착율은 무엇을 근거로 산출하는지 모르겠다.
시대가 변했다. 아이들은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고 어른들이 상상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자기들끼리 하고 있다. 어른들은 아직도 볼펜이나 사탕 몇 개로 아이들을 꼬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생각의 게으름이 아닐까. 시대를 알고 싶지 않는 게으름. 시대가 변해도 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았다는 교리숭배 사상에 고착된 것은 아닐까. 아직도 천국과 지옥을 외치면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올까. 소나무 뿌리 몇 개 뽑으면 삼천 명이 회개할까. 이것이야말로 소니워커맨으로 아이들을 교회에 붙들려는 순진한 생각이 아닐까. 이젠 바꿔야 하지 않을까. 시디플레이어도 한물간 시대가 아닌가.
시대를 담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가?
시대를 담는다는 말은 새로운 기기와 방법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시대를 담는다는 말은 시대를 통찰하는 안목이며, 시대에 맞게 새로운 관점에서 주일학교 재편하는 것을 말한다.
1. 주일학교에 전문성을 부여하자.
가끔씩 학부모로부터 전화를 받는다. '그 교회는 영아부 있나요?' '주일학교는 전도사님이 맡나요 목사님이 맡나요?' 처음 전화를 받을 때는 무슨 뜻인지 모르고 닫힌 답을 주었다. '없습니다.' '네 전도사님 맡고 있습니다' 나중에 무슨 뜻인지를 알아챘다. 당신의 교회는 전문성이 있습니까? 당신의 교회는 차별화된 교육을 실시하고 있습니까?였다. 부모들의 관심이 주일학교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다. 얼마나 전문성이 있느냐이다. 전문성은 잘한다는 것이 아니다. 교회의 관심이 무엇이며, 진심으로 주일학교에 대한 비전이 있는가를 묻는 것이다.
2. 미래 지향적 비전을 공유하자.
비전은 무엇을 이루기 위한 거창한 목표가 아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다. 미래지향적이라는 말은 결국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되기 위한 장기적 목적이다. 즉 단기간에 끝장낼 프로그램이 아니다. 주일학교 없이 청년부도 장년부도 없다. 담임목사는 장기적 비전을 가지고 나아가야 한다. 장기적 비전은 당연히 전문성을 필요로 하고, 전문성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내일을 위해 차곡 차곡 자료와 실력을 준비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는 내지 않을 것이다.
3. 소그룹 중심으로 운영하라.
개인이 중요한 시기다. 리더 한 사람의 강요는 공동체를 힘들게 한다. 서로를 존중하고 세워야 한다. 주일학교도 소그룹 중심으로 운영 패러다임을 바꾸지 않으면 시대를 담을 수 없다. 2001년 NCD에서 빌 벡햄의 <제2의 종교개혁>을 번역했다. 루터와 칼빈에 의해 주도된 1차 종교개혁은 교리 개혁이다. 벡햄은 1차 종교개혁은 교리개혁에만 그쳐 미완성의 개혁으로 보고, 완전한 개혁은 조직을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정신은 21세기 사람인데 의복은 조선시대 복장을 하는 것과 같다.
현대는 상명하달식의 운영으로는 시대를 담을 수 없다. 서로 소통하고 존중하는 쌍방 소통구조로 변화 시켜야 한다. 주일학교는 함께 만들어야 하고, 학생들을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존재로만 비하시켜서는 안 된다. 학생들도 생각이 있고, 고민이 있다. 그들에게 발언권을 주고 자기를 스스로 만들어 가도록 격려해 주어야 한다.
4. 세상과 소통하라.
마지막으로 하나 더 이야기하고 싶다. 시대가 변했다는 말은 죄성이 없어졌다는 말이 아니다. 지식과 정보를 받아들이는 통로가 달라졌다는 뜻이기도 하고, 관계를 이해하는 방식이 달라졌다는 말도 된다. 이젠 교회가 예수천당식의 우격다짐을 버려야 한다. 이슬람이 다른 나를 정복할 때 한 손에는 코란을 한 손에는 칼을 들었다. 코란을 받아들이든지 칼에 베임을 받아 죽든지를 선택하게 했다. 교회가 마치 이슬람의 어리석음을 따라가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한다. 믿으면 천국, 안 믿으면 지옥 간다. 믿기 싫으면 그만 두라는 식의 무성의한 태도는 옳지 않다.
이야기가 축적되어야 한다. 학부모들의 고민이 무엇인지, 자녀에 대한 생각은 무엇인지를 함께 나누어야 한다. 즉 학부모가 교회를 믿고 신뢰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아이들이 소중한 때다. 부모가 교회를 결정하는 시기는 지났다. 주일학교가 잘 된 곳, 믿을 수 있는 곳을 선호한다. 이것만 보더라도 주일학교에 관심을 두고 신경을 써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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