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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고전으로 인간을 읽다

샤마임 2017. 7.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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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고전으로 인간을 읽다



기독교 고전에 관련된 자료를 찾고 서평이나 소개글을 어떻게 썼는가 싶어 알라딘에 <기독교 고전으로 인간을 읽다>를 구입했다. 지난 주에 구입한 책인데 어제 양산에서 돌아와 보니 집에 도착해 있다. 


표지는 그런대로 마음에 든다. 일단 제목도 그리 나쁘지 않다. 제목 위에 부제로 보이는 '성경 다음으로 읽어야 할 위대한 책 25'이란 글도 야단스러 보이기는 하지만 고전을 알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는 명료하게 다가 온다. 하지만 전반적인 분위기에서 이 책은 결코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들 것 같다. 왜?


먼저, 독자가 불분명하다. 

즉 누가 읽을 것인가? 기독교인이다. 출판사가 이걸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하지 않은 것 같다. 한국은 특이한 교단이 아닌 이상 '하느님'이 아닌 '하나님'을 사용한다. 먼저 그 것부터 잘못되었다. 이것은 대다수의 개신교 독자를 배려하지 않은 번역체다. 그렇다고 내가 하나님을 하느님으로 부른다고 해서 틀렸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다만 한국교회 정서상 어색하다. 보수적 성향의 대부분의 한국교회 교인들은 그 한 단어에서 벌써 거부감을 일으킨다. 굳이 하느님으로 번역해야 하나? 이상하다.


둘째, 책은 어떤 기준일까? 25권인데 대체로 기독교적 성향의 책들이다. 만약 이 책들이 중세 이전이나 18세기 이전 책들만 선택했다면 이해가 된다. 하지만 아니다. 체스터턴이나 디트리히 본회퍼는 우리 시대와 별단 다르지 않는 근대 사람이다. 토머스 머튼은 또 어떤가? 심지어 헨리 나누웬의 책도 있다. 난 그들은 모두 좋아하고 환영한다. 하지만 '기독교 고전'이란 타이틀을 달지 않았는가? 그런데 왜 현대인들이 들어가 있단 말인가? 참 의외이다. 


셋째, 번역체가 이상하다. 번역자가 이종인으로 나온다. 폴 칼라니티의 <숨결이 바람 될 때>도 이종인이 번역했다. 잘된 번역이다. 난 이종의 번역를 탓하지 않는다. 다만 기독교 적이지 않다는 것이 문제다. 기독교 고전을 번역하는데 기독교적이지 않는 번역체를 사용한 것이다. 그러니 책이 무엇이 되겠는가? 마음이 심히 아프다. 누구를 탓하기 전에 책을 사랑하는 독자로서, 기독교 고전을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서 개운치가 않은 것이다. 


한 권의 책, 책을 소개하는 또 다른 책. 그 책도 책이다. 좀더 성의있게 고민하며 만들었으면 얼만 좋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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