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에세이] 헤르만 헤세의 독서의 기술
헤르만 헤세의 독서의 기술
2014년 12월 13일
새벽 기도회를 마치고 교회 마당에 들어서니 두 번째 눈이 내린다. 새벽 미명 아무도 일어나 있지 않을 시간이다. SUV차량 본네트 위로 흩뿌려진 눈송이들이 겨울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알린다. 아직 쌓이지 않는 눈을 보며 앞으로 일어날 겨울을 본다.
삶은 읽기다. 자연을 읽고, 사람을 읽고, 인생을 읽는다. 읽기는 불가피하게 과거를 요구한다. 축적된 경험과 지식이 있어야 읽기가 가능하다. 분석되지 않는 수많은 정보로 그대로 흘러가 버린다. 동일한 경험이 반복될 때 비로소 '아 그것이구나!' 인식한다.
하늘에서 하얀 결정체가 지상으로 낙하할 때 우리는 겨울이 왔음을 읽고, 노오란 개나리가 얼굴을 내밀면 봄을 읽는다. 이제 앞으로 무성한 푸름이 산을 수놓은 것도 예상한다. 조락의 풍경을 통해 한 해가 다 저물어 가고 있음도 읽는다. 읽기는 결국 오래된 기억의 재생이다. 반복의 새로움을 통해 읽기는 가능하다.
사람 읽기도 마찬 가지다. 성실함, 진실함, 올곧음, 다혈질, 점액질, INTP 등도 만남이 반복될 때 읽혀진다. 성실함이 사소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동일함을 발견할 때 읽혀지듯, 사람 읽기는 인내가 필요하고 무료한 일상이 겹겹이 쌓여야 한다.
책은 어떨까? 헤르만 헤세는 자연과 사람 읽기에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의무감이나 호기심으로 딱 한 번 읽는 것만으로는 결코 진정한 기쁨과 깊은 만족을 맛볼 수 없으며, 기껏해야 일시적인 흥분을 야기할 뿐 금세 잊히고 만다. 하지만 어떤 책을 처음 읽으면서 깊은 인상을 받았거든 얼마쯤 지난 후에 꼭 다시 읽어 보라. 두 번째 읽을 때 비로소 그 책의 진수를 발견하게 되고, 표면적인 것에 불과했던 긴장감이 사라지면서 글 고유의 힘과 아름다움이라 할 내면의 가치가 모습을 드러내는데, 얼마나 경이로운 경험인지 모른다. 그리고 이렇게 두 번을 즐겁게 읽은 책이라면, 비록 책값이 만만치 않을지라도 반드시 구입하도록 한다."(p167)
다시 읽기야 말로 진정한 독서라 할 만하다. 다시 읽기 할 필요가 없는 책이라면 살 필요가 없다. 두 번 읽을 필요가 있는 책은 깊이가 있는 책이다. 읽으면 읽을수록 마음을 울리고, 영혼을 살찌게 한다. 젊은 시절 흠뻑 빠져 읽었던 책들이 노년에 이르러 다시 읽어 감동이 된다면 그 책은 명저임이 분명하다.
에빙하우스의 암기법에 핵심은 '반복'이다. 주기적 반복을 통해 단기 기억에서 장기기억으로 넘어간다. 한 입에 배부르지 않는다 했다. 속도를 요구하는 현대인들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빠르게 읽기'가 아니다. 오히려 '천천히 읽기'며, '깊이 읽기'다. 깊이 뿌리를 내려야 높이 올라가는 법이다. 한꺼번에 많은 양의 지식을 얻으면 곧장 사라지고 만다. 벼락치기 공부가 그렇듯 읽기도 천천히 읽고, 다시 읽지 않으면 내 것이 되지 않는다.
다시 읽기는 피상성을 극복하는 가장 탁월한 방법이다. 리차드 포스터는 이렇게 말한다.
"피상성은 우리 시대의 비극이다. 즉시 만족을 누리고자 하는 사상은 근본적인 영적 문제이다. 오늘날 절실히 요청되는 사람은 지능이 높거나 혹은 재능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깊이가 있는 사람이다."
조금함은 피상성을 낳고, 피상성은 그름을 만들어 낸다. 잠언의 충고를 보자.
네가 말이 조급한 사람을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희망이 있느니라 (잠29:20)
올바른 읽기는 빠름이 아니다. 자신에 '천착'하고, 일상에 '머뭄'을 통해 가능하다.
목사로서 목회를 돌아보면, 이 역시 ‘천천히’와 다시 만남을 요구한다. 급하게 설교하지 않고, 천천히 성도의 말을 경청하고, 충분히 울림이 있는 언어와 삶으로 설교해야 한다. 성장주의와 외형주의에 빠지면 결코 천천히 목회하지 못한다. 천천히 읽을 때 깊이 읽고, 깊이 읽을 때 바르게 읽는다. 목사는 성도의 삶을 찬찬히 들여다보아야 하고, 그곳에서 그름과 바름, 헛됨과 진리를 찾아내야 한다. 중국의 위대한 사상가였던 장자와 열자, 맹자를 읽었던 헤세는 이렇게 평가한다.
"장자와 열자, 맹자 등을 읽어보면 중국의 이들 대스승들과 현인들은 웅변가들과 정반대여서, 놀랍도록 소박하며 서민과 일상에 밀착해 있었다."(p46)
허공에 떠있는 사상이 아니었다. 그들은 촌부와 서민의 일상에 밀착했다. 사람을 읽는 최고의 기술을 요하는 목회야 말로 교우들의 일상에 밀착해야 하지 않을까? 천천히, 그리고 자주. 난 그렇게 <헤르만 헤세의 독서의 기술>을 읽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나태주의 들꽃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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