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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기] 단어의 발견

샤마임 2017. 1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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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기] 단어의 발견 

2017년 10월 6일 

*이 글은 그리스찬북뉴스에 기고한 글입니다.

이틀째 이동영의 <송영의 삼위일체론>을 읽고 있다. 그런데 이곳에 '묘파'라는 단어가 종종 보인다. 금시초문의 단어다. 문장 속에서 뜻이 뭔가를 드러내 보인다.여서 굳이 찾을 필요가 없겠다 싶어 넘어갔다. 그런데 한 두 번으로 그치지 않고 자주 사용된다. 궁금해서 사전을 찾았다.  

묘파(描破)는 명사로, 남김없이 밝히어 그려 냄이란 뜻이다. 한자어는 '그릴 묘'(描)와 '깨뜨릴 파'(破)를 사용한다. 동사로는 '묘파하다'를 사용한다. 뜻 역시 '남김없이 밝히어 그려 내다.'이다. 적지 않은 책을 읽는 필자에게 묘파라는 단어는  신세계를 발견하는 듯한 묘한 긴장감을 선사했다. 단어의 뜻을 좀 더 분명하게 하고 싶어 용어의 용도를 살폈다.  가장 먼저 보이는 단어는 점묘파(點描派)라는 단어다. 뜻을 보니 '점묘주의(主義)를 신봉(信奉)하는 화가(畫家)의 한 과(科)'라고 나온다. 그렇다면 점묘주의는 뭘까? 다시 사전을 검색했다. 

점묘주의 (點描主義) (미술) pointillism 

[명사] <미술> [같은 말] 신인상주의(1886년 프랑스의 쇠라, 시냐크 등을 중심으로, 인상파의 수법을 더욱 과학적으로 추구하여 일어난 회화의 한 경향).  

점묘주의는 신인상주의로 전이한다. 분명 점묘주의와 신인상주의와 같은 말이라고 나오지만 단어 해석은 조금 다르다. 점묘주의에 비해 신-인상주의가 좀더 구체적이다. 그런데 이런 뜻으로는 점묘주의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가 없다.  

신-인상주의新印象主義 

명사 <미술> 1886년 프랑스의 쇠라, 시냐크 등을 중심으로, 인상파의 수법을 더욱 과학적으로 추구하여 일어난 회화의 한 경향. 색조의 분할을 철저히 한 점묘법을 특징으로 하였으며, 화면 구성을 중시하였다. [비슷한 말] 네오임프레셔니즘ㆍ점묘주의ㆍ푸앵티이슴. 

하는 수 없이 영어인 'pointillism'로 구글을 시도했다. 그랬더니 단박에 그 의미가 발혀진다. 무식한 말로 그림을 터치 즉 붓을 그어서 그리는 일반 화법이 아니라 점을 찍어 그림을 그리는 방법을 말한다. 왜 과학적이라고 표현하는지 알 수없지만 뜻은 분명한다.  

이것으로 만족하지 못해 점묘주의를 계속 검색하니 쇠라의 그 유명한 그림,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이 검색되어 나왔다. 그제서야 점묘주의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소위 점묘주의자들로 불리는 화가들은 점묘주의가 자신들의 과학적 화법을 제대로 정의하지 못해 '분할주의'로 불려 지기를 선호했다고 한다. '과학적'이란 수식도, 다양한 순수한 색들이 어우러져 그림처럼 보이는 광학과 색체혼합의 기법을 사용한 탓이라고 한다. 실제로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는 크기가 207х308cm나 된다고 하니 일반 그림과는 차원이 다른 크기인 셈이다. 가까이에가면 점으로 보이지만 멀찌감치 떨어지면 삼차원적인 느낌이 난다고 한다. 마치 무성 영화 시대에 최첨단 CGV 영화를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켜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구글에서 다시 '묘파'를 검색하니 결과가 검색되지 않는다. 유일하게 네이버 사전에 "이 소설은 여성들의 다채로운 심정을 예리하게 묘파하였다."라는 예시 문장만 나올 뿐이다. 묘파는 그만큼 희소한 단어다. 그럼에도 이도영은 '묘파'라는 단어를 즐겨 사용한다. 묘파라는 단어를 신학적 진술에 사용한다면, 하나님을 잘 설명해주는 것쯤으로 이해하면 무리가 없을성 싶다. 미술 단어를 신학적 해석에 사용한 예는 적지 않다. 찾아 놓은 문장이 없어 즉시 제시할 수는 없어도 그런 예는 흔하다.  

책을 읽다가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심쿵해 진다. 예전에 어떤 책을 읽다 '함초롬하다'를 발견하고 도무지 알 수 없어 사진을 찾았다. 형용사로 '젖거나 서려있는 모습이 가지런하고 차분하다'는 뜻이다. 의미를 확장하여 '순진하다' '착하다' '다소곳하다'는 의미로 사용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옆집 소녀가 거니는 모습이 함초롬했다.를 '차분하게 걸었다.' '걷는 모습이 청순하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하나의 단어를 안다는 것은 하나의 삶을 아는 것이다. 앎은 곧 경험이고, 경험된 삶은 인지와 인식의 세계를 확장 시킨다. 그러나 작가라면 단어를 알기 이해 발버둥 쳐야하고, 평이한 단어에 머물기를 고집해서는 안 된다. 지혜로운 작가라면 가끔 독자들에게 사전 찾는 수고를 선물해 줄 필요가 있다. 단어의 발견, 삶의 발견이 아닐까? 단어는 언어의 제한을 받는 인간의 사유를 통제한다. 풍부한 언어는 풍부한 사유로 이끌고, 풍부한 사유는 또 다시 새로운 언어를 갈망한다. 단어는 삶의 재현이고, 상징이 되는 법이다. 적절한 단어 사용이 가져다주는 삶의 얼굴이 얼마나 다양한지 고 박완서 선생의 글에서 종종 발견하곤 한다. 

"정말 비통할 때는 눈물이 잘 안 나오다가도 슬픔에 적당한 감미로움이 섞이면 울음이 잘 나오는 특이체질도 있다는 것 이해받고 싶었다. 지섭이를 보낸 허전함에도 눈물을 자극하기 알맞은 달착지근한 맛이 섞여 있었던 것이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331쪽 

독서의 극미(極美)의 쾌락을 주는 이유가 결국 자신을 보여주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독서를 통한 단어의 발견은 '나를 발견함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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