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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기] 성경을 읽는다는 것의 의미

샤마임 2017. 1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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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기] 성경을 읽는다는 것의 의미

20171113

1113, 그러니까 오늘이 벌써 11월 중순(中旬)이 된 것이다. 시간이 이토록 빠르다는 것은 시간의 상대성 원리에 의하면 지금 이 순간들이 아까운 것일 테고 좋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나의 삶은 어떤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지난한 삶이다. 그럼에도 시간은 왜 이리 빨리도 흐르는 것일까? 나이 탓일까? 그렇지 않아도 짧은 가을은 순식간에 피안(彼岸)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듯하다. 어쩌면 시간에 대한 인식은 천국을 소망하는 간절함과 이땅에서 아무런 열매 없는 삶에 대한 조바심이 아닐까?


오늘 수원에서 개척교회를 하시는 K 목사님께서 방문하셨다. 미리 개척하신 분으로서 여러 가지를 조언해 주셨다. 한 말씀 한 말씀을 가슴에 꼭꼭 담아 눌렀다. 누군가에게 말하지 못했던 마음의 걱정과 두려움, 무기력과 자존심의 문제들을 들려주셨다. 무엇보다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어 도움 구하는 것을 너무 마음 상해지 말고, 자존심을 내려놓으라 하신다. 도움을 구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하셨다. 사실, 그 부분 때문에 마음이 적지 않게 상해 있었다. 그리고 공식적으로 누군가의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맞는가. 걱정도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시면서 교회 성도 한 분이 도와주고 싶다고 해서 가져왔다고 봉투를 내밀었다. 개척교회 임에도 몇 분을 도와주기로 작정한 것이 있어 모아둔 돈도 일부 가져왔다고 하셨다.

 

마음이 어찌 그리 아플까? 도움을 받아야 할 분이, 우리보다 사정이 나은 것도 없도 없는데 적지 않은 돈을 가져오신 것이다. 빚이 자꾸 늘어간다. 하나님께 물었다. 왜 우리를 돕는 분들이 풍족한 분들은 거의 없고 힘들고 어려운 분들만 있냐고. 오히려 도움을 받아야 할 분들이 왜 도움을 주느냐고. 오늘 아침 묵상했던 산상수훈에서 '긍휼'이란 단어가 기억이 났다. 누군가를 돕는다는 것은 재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돕지 않으면 자신의 마음이 너무 아파서 어쩔 수 없이 돕는 것이라고. 기독교에서 도움이란 동정을 넘어, 일종의 연대이며 연합이다. 하나님과 친밀한 사람일수록 사람을 긍휼히 여긴다. 주님은 그것이 '하늘 아버지의 뜻'이라고 말씀하신다.

 

한 달 전부터 마태복음을 묵상하며 글로 옮겨 에레츠 카페에 쓰고 있다. 글이란 참으로 묘하다. 그냥 읽는 것과 읽고 글로 쓰는 것은 많이 다르다. 듣는 것이 바람이라면 읽는 것은 물이고, 읽은 것이 물이라면 쓰는 것은 건축이다. 바람은 느낄 수 있으나 잡을 수 없다. 물은 잡을 수 있으나 무엇인가 만들 수 없다. 그러나 건축물은 어떤가? 설계도가 있어야 하고, 건축에 필요한 도구와 재료가 있어야 한다. 하나하나 쌓아 올리기 이해서는 역학이 필하고 공법도 있어야 한다. 말이 글이 된다지만, 글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것이 추가되고 전제되며 정립되어야 한다. 읽을 때 편하게 흘려보냈던 문장과 단어의 의미를 찾고, 그 의미들을 연결해 하나의 완성된 문장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렇게 하고 나니 불필요한 것은 덜어야 하고, 강조할 부분을 더해야 한다. 또한 말씀을 깊이 보지 않고는 글이 되지 않는다. 이것이 묵상을 글로 써야 하는 이유인 셈이다.

 

오늘 마태복음을 더 깊이 묵상하기 위해 두 권의 주석과 다른 몇 권의 책을 성서한국의 집에서 구입했다. 주석은 도날드 헤그너의 <WBC 마태복음>(솔로몬)과 마이클 그린의 <마태복음 강해>(IVP)이다. 성경해석법을 위해서는 세 권을 구입했다. 존 스토트의 <성경연구입문>(성서유니온선교회)와 노튼 스테레트의 <성경해석의 원리> 그리고 고든 D. 피의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이다. 출판사를 보니 세 권 모두 성서유니온이다. 성경 묵상에 대한 독보적 입지를 차지고 있는 출판가 확실하다. 마지막 로렌스 형제의 <하나님의 임재 연습>(CH북스)를 샀다. 이 책은 기독교 고전으로 다른 신문사에 기고할 책이다.

 

성경 읽기란 무엇일까? 벌써 몇십 독을 하고, 날마다 성경을 묵상하고 주해해도 성경에 대한 갈급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주님은 영생을 물으러 온 율법사에게 '네가 어떻게 읽느냐'(10:26)고 묻는다. 이것은 해석의 차원을 넘어 삶의 문제다. 주님의 질문에는 너는 어떻게 읽고 그것을 해석하느냐다. 해석은 곧 삶의 적용이며 관점이다. 엄밀하게 '너는 어떻게 읽느냐''너는 누구냐'의 또 다른 질문이다. 여기에는 어떻게 사느냐가 읽혀져야 한다. 주님은 율법사의 말을 들은 다음 '너도 이와 같이 하라'(10:37)고 하신다. 즉 너는 삶이 없다는 것이다. 주님은 율법사의 질문에 곧장 답하지 않으시고 그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이다. 앎이 삶으로 연계되지 않으면 성경 읽기는 의미를 상실한다. 고든 피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또한 상황이 다양한 교회에서 정기적으로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단순히 학자로만 부름 받지 않고, 성경을 어떻게 적용할지 매번 씨름하는 일에도 부름을 받았다."(17)

 

성경 읽기 첫 번째 목적이 성경의 뜻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다. 이해하지 못하면, 적용할 수 없다. 그러나 그다음 목적은 성경을 아는 것으로 우리 삶을 성찰해야 하고, 옳고 그름을 깊이 고민해야 한다. 그런 다음 삶으로 적용해야 한다. 생명은 반응하다. 오직 죽은 자만 반응하지 않는다.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살아있는 존재이며, 신자의 삶은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는 것이어야 한다.

 

존재는 행위보다 앞선다. 시간의 우선이 아니라 의미로서의 우선이다. 하나님은 '빛이 있으라' 말씀하셨지, 태양이 있으라고 하지 않으셨다. 빛은 존재함으로 빛을 비추기 때문이다. 그러나 행위는 존재를 앞서지 못하나 존재를 존재에 의미를 부여한다. 빛이 비치지 않으면 더 이상 빛이 아니다. 신자는 삶보다 믿음이 우선하지만 삶이 적출된 신자는 더 이상 신자가 아니다. 그는 버려지고, 밟힐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는 행위로 드러나고, 행위는 존재를 입증한다. 존 스토트는 성경의 목적을 '구원이라는 도덕적 경험에 이르게 하는 데 목적이 있다.'(18) 선언한다. 도덕적 경험은 곧 순종을 통해 삶으로 구원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노튼 스테레트, 리처드 슐처는 <성경 해석학의 원리>의 마지막 부분에 4장에 걸쳐 적용을 다룬다. 그들은 성경을 읽는 이유가 단지 정보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변화시키려는 목적'(223)이 있다고 말한다. 또한 성경적 교리를 익혀야 하는 이유를 교리가 '삶을 위한 진리'(242)라고 옳게 지적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경 읽기라는 '여정'은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께 맞추는 조율이라 정의할 수 있다. 비록 성령의 조명하심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도록 돕겠지만, 육신의 입을 불완전한 존재로서 수정되어야 할 부분은 충분히 많다. 우리는 이것은 성화라고 부른다. 만약 성도의 견인이 완전하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이 진리의 빛을 비추심으로 맑게 하여 자신의 뜻을 보이실 것이다. 거듭난 영혼은 거듭난 본성을 따라 하나님의 계시를 따라갈 것이며, 자신의 그릇됨과 왜곡들을 수정해 나갈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러한 여정 속에 있는 성도를 붙드심으로 영화로 완성시키신다. 성경 읽기는 어둠 속에서 빛을 따라가는 삶이다. 시편 기자의 고백대로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119:105)라는 사실을 확신한다면 기꺼이 감사하며 읽게 될 것이다.

 

K목사님 때문에 마음이 쓰인다. 힘든 개척교회를 하시면서 타인의 아픔을 차마 넘기지 못하시고 먼 길을 오셨다. 성경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삶으로 읽지 못하는 성경은 결국 율법사처럼 읽기에 실패한 것이다. 아가페적 사랑이 전제되지 않는 읽기는 언제나 오독(誤讀)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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