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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강해 롬 2:1-11

샤마임 2025. 3.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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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단하는 자여, 네가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롬 2:1-11)

자기 의로는 결코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심판 (2:1-3)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이방인의 죄와 그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밝힌 후, 이제는 유대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향해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2:1). 이 구절의 첫 단어인 '그러므로'(διὸ, 디오)는 앞장의 내용을 받아 그것이 누구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됨을 보여주는 연결어입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이방인의 죄악에 대해 판단하면서 정작 자신도 같은 죄를 짓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판단하다'(κρίνεις, 크리네이스)는 단지 비평하거나 지적하는 정도가 아니라, 상대의 행위를 도덕적 기준에 따라 정죄하는 행위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판단하면서 자신도 동일한 죄를 범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판단이 자신을 향한 정죄가 된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여기서 보편적 위선을 고발합니다. 사람은 자신이 남보다 낫다고 느낄 때 심판자의 자리에 서기 쉽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동일한 죄인입니다.

2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κατὰ ἀλήθειαν, 카타 알레쎄이안) 된다고 선언합니다. 인간의 판단은 감정과 상황에 따라 휘둘리지만, 하나님의 판단은 언제나 그분의 성품과 진리에 기초합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심판이 두렵고도 공의로운 이유입니다. 3절에서 바울은 다시 질문을 던집니다.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이것은 단순한 논리적 반문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을 찌르는 영적 각성을 위한 외침입니다. '피하다'(ἐκφεύξῃ, 에크퓌크세이)는 완전히 도망쳐 나간다는 뜻으로,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인간 스스로에게 존재하지 않음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인도하는 회개의 자리 (2:4-5)

바울은 심판을 말한 직후 하나님의 또 다른 성품, 곧 인자하심을 언급합니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2:4). 여기서 사용된 '인자하심'(χρηστότης, 크레스토테스)은 단지 부드러운 성품이 아니라, 유익을 베풀어 회복시키려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미합니다. '용납하심'(ἀνοχή, 아노케)은 죄를 참아 넘기시는 하나님의 관용을, '길이 참으심'(μακροθυμία, 마크로쥐미아)은 시간을 두고 죄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오래 참음을 뜻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은혜의 성품이 죄인에게는 오히려 '멸시'당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선하심이 회개로 인도하기 위한 것이지 방종의 기회가 아니라고 분명히 밝힙니다. 회개는 헬라어로 '메타노이아(μετάνοια)'이며, 단순히 후회하는 감정이 아니라 마음과 방향을 바꾸는 전인격적인 전환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자는 결국 '진노의 날'을 자초합니다. 5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여기서 '쌓는다'(θησαυρίζεις, 쎄사우리제이스)는 보물을 모으듯 무엇인가를 꾸준히 축적한다는 뜻인데, 죄인이 은혜의 날들 동안 회개하지 않고 계속 죄를 지을 때, 그것이 곧 하나님의 진노의 보관 창고를 채우는 결과가 됨을 의미합니다.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회개로 인도하려는 손짓이지만, 그 손을 뿌리친 자는 결국 무서운 심판을 자초하게 됩니다.

각 사람에게 행한 대로 갚으시는 공의 (2:6-11)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 행위대로 보응하시는 분입니다. 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보응하다'(ἀποδώσει, 아포도세이)는 도로 돌려준다는 뜻으로, 공정한 계산과 처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나 배경, 소속이 아닌 그 사람의 행위를 기준으로 심판하십니다. 이는 인간의 공로 구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믿음은 반드시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다는 복음의 원리를 드러냅니다.

7절과 8절은 심판의 두 방향을 대조적으로 보여줍니다.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들에게는 '영생'(ζωὴν αἰώνιον, 조엔 아이오니온)을,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ὀργὴ καὶ θυμός, 오르게 카이 퓌모스)를 주십니다. 여기서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은 구속받은 성도가 받게 될 종말론적 상급을 묘사하는 표현입니다. 반대로, 불의를 따르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진노와 분노'는 감정의 폭발이 아닌 하나님의 공의의 정당한 응보입니다.

9절과 10절에서는 그 심판이 유대인과 헬라인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말합니다. 먼저는 유대인에게, 그리고 헬라인에게도 임한다고 반복함으로써 하나님 앞에 차별이 없음을 강조합니다. 이는 바울이 유대인들의 선민의식을 무너뜨리고 복음의 보편성과 하나님의 공의를 강조하는 전략적인 흐름입니다. 마지막 11절은 그 결론을 이렇게 선언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 이 표현은 헬라어로 'προσωπολημψία' (프로소폴렘프시아)인데, 사람의 얼굴(외모)을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하나님의 판단은 철저히 내면과 실제에 근거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인간은 스스로를 의롭다 하며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만, 하나님의 공의 앞에서는 모든 핑계가 사라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인자하신 분이시나, 동시에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는 그 인자하심조차 심판의 증거가 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진리로 심판하시며, 믿음에 합당한 행위가 있는 자에게는 영생을,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형벌을 내리십니다.

결론

자기 의에 기대어 다른 이를 판단하는 것은 스스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시며, 모든 사람에게 공의로 심판하십니다. 회개와 믿음의 열매만이 영광의 날에 설 유일한 근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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