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이스라엘의 멸망 이유, 당시 국제적 정세를 바탕으로
열왕기하 17장 당시의 국제정세와 북이스라엘의 상황
열왕기하 17장은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다루고 있으며, 그 배경에는 당시 고대근동의 복잡한 국제 정세와 정치적 상황이 깊이 얽혀 있습니다. 호세아 왕이 애굽에 도움을 요청하고 앗수르와 갈등을 빚게 된 사건은 단순한 정치적 실수가 아니라, 당대 강대국들 간의 힘의 균형과 북이스라엘 내부의 분열된 정치 세력 간의 갈등에 의해 결정되었습니다. 이 부분에서는 당시 고대근동의 주요 강대국들, 북이스라엘의 정치적 상황, 그리고 호세아가 취한 외교적 선택의 결과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1. 고대근동의 국제 정세: 앗수르와 애굽의 패권 경쟁
기원전 8세기 후반은 앗수르 제국이 중동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으로 부상하던 시기였습니다. 디글랏빌레셀 3세(Tiglath-Pileser III, 재위 기원전 745-727년)의 군사적 개혁과 정복 전쟁으로 앗수르는 주변 국가들을 속국으로 만들고 조공을 통해 지배력을 확대했습니다. 특히 팔레스타인 지역과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은 앗수르에게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으며, 이 지역을 장악함으로써 앗수르는 애굽과의 무역로와 군사적 요충지를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 애굽은 한때 중동 지역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나, 기원전 8세기에는 앗수르에 비해 국력이 쇠퇴한 상태였습니다. 당시 애굽은 리비아 출신 왕조인 제22왕조와 제23왕조로 나뉘어 있었고, 내부 분열로 인해 정치적 혼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굽은 여전히 팔레스타인 지역의 국가들에게 하나의 대안적 세력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북이스라엘과 시리아 등 일부 국가들은 앗수르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굽과 동맹을 맺으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2. 북이스라엘의 정치적 상황: 친앗수르파와 친애굽파의 갈등
북이스라엘은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이전 왕들인 예후와 여로보암 2세 시기에 잠시 번영을 누리기도 했으나, 그 이후 왕권이 약화되고 연이은 왕위 찬탈과 반란으로 인해 혼란이 지속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북이스라엘 내부에는 두 가지 주요 정치 세력이 형성되었습니다.
- 친앗수르파:
이들은 앗수르의 군사적 우위를 인정하고 조공을 바치며 평화를 유지하자는 입장을 취했습니다. 이들은 앗수르와의 전쟁이 국가에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을 우려하며, 외교적으로 앗수르에 굴복하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친앗수르파는 정치적 안정을 통해 국내의 경제와 군사력을 보존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 친애굽파:
이들은 앗수르의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굽과의 동맹을 추진했습니다. 이들은 애굽이 여전히 강대국으로서 앗수르에 대항할 능력이 있다고 믿었으며, 애굽과 협력하여 앗수르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애굽은 당시 내부적으로 분열된 상황이었고, 북이스라엘에 실질적인 군사 지원을 제공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호세아는 이러한 갈등 속에서 초기에는 친앗수르파의 입장을 따랐으나, 점차 친애굽파의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앗수르에 조공을 끊고 애굽 왕 소(So)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외교적 결정을 내렸습니다(열왕기하 17:4). 그러나 애굽은 실질적인 군사적 개입을 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북이스라엘은 고립된 상태에서 앗수르의 침략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3. 앗수르의 대응과 사마리아 포위전
앗수르는 호세아의 반란을 중대한 도전으로 간주하고 즉각적으로 대응했습니다. 앗수르 왕 살만에셀 5세는 군대를 동원하여 사마리아를 포위했습니다. 이 포위전은 약 3년 동안 지속되었으며, 앗수르는 철저한 봉쇄 전략을 통해 사마리아의 외부 지원을 차단하고 내부를 고갈시켰습니다. 사마리아 주민들은 기근과 내부 혼란에 시달리며 점차 저항력을 잃어갔습니다.
사마리아가 함락된 후,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앗수르로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앗수르는 점령지의 민족들을 분산시키는 정책을 통해 반란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이스라엘 지역에 여러 이방 민족들을 이주시켰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민족적, 종교적 정체성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4. 애굽의 소극적 대응
애굽은 호세아가 도움을 요청했을 때 군사적 개입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당시 애굽이 앗수르와의 전면전을 회피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애굽은 팔레스타인 지역의 국가들에게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으나, 앗수르와의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며 자신들의 국익을 우선시했습니다. 이로 인해 호세아의 기대는 무너졌고, 이스라엘은 외교적 고립 상태에서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5. 북이스라엘의 멸망 이유와 이후의 상황
열왕기 기자는 북이스라엘의 멸망 원인을 단순한 외교적 실패나 군사적 패배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명확하게 이스라엘의 멸망을 그들의 죄악과 하나님의 언약 파기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설명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율법을 무시하고, 주변 이방 민족들의 우상 숭배 문화를 받아들였습니다(열왕기하 17:7-12). 그들은 바알과 같은 이방 신들을 섬기고, 산당과 목상을 세우며 끊임없이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선지자들을 보내어 경고하셨으나, 이스라엘 백성은 선지자들의 음성을 무시하며 회개하지 않았습니다(17:13-14).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그들의 죄악으로부터 돌이키기 위해 심판을 내리셨고, 결국 앗수르에 의해 멸망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열왕기 기자는 이를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함을 드러내는 사건으로 기록하며, 이스라엘이 언약에 대한 불순종으로 인해 멸망하게 되었음을 강조합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한 후, 앗수르는 정복된 지역을 재편성하기 위해 이방 민족들을 사마리아로 이주시켰습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 땅에는 혼합된 민족과 종교가 형성되었고, 이는 나중에 사마리아인과 유대인 사이의 갈등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또한, 북이스라엘의 멸망은 남유다에게도 큰 경고가 되었습니다. 남유다는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의 결과를 목격하였으나, 이후에도 우상 숭배와 불순종의 길을 계속 걷게 됩니다.
결론
열왕기하 17장에 나타난 북이스라엘의 멸망은 단순히 한 국가의 멸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경고와 심판이 이루어진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고대근동의 국제정세 속에서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와 애굽 사이에서 전략적 결정을 내렸으나, 인간적인 방법에 의존한 선택은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과 신뢰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경고를 주시고 회개의 기회를 제공하시지만, 끝내 그분의 뜻을 무시하는 자들에게는 심판이 임하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며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결단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열왕기하의 각 장별 요약 및 강해목록입니다. 열왕기하의 각 장을 요약하고 구조를 나누어 강해하는 형식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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