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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1:12 - 1:26 강해 설교

샤마임 2025. 5.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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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은 메이지 않습니다

할렐루야 좋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오늘도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평강이 여러분의 가정과 삶의 모든 자리 위에 충만히 임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 시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 빌립보서 1장 12절부터 26절까지의 본문은 단순한 사도 바울의 감옥에서의 경험담이 아닙니다. 그것은 복음의 불가항력적 능력과,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의 고난의 재해석이며, 신자의 삶과 죽음의 본질에 관한 깊은 고백입니다. 바울은 억압의 현실 속에서도 복음의 전진을 목도하고, 생사의 갈림길 앞에서도 오직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을 인생의 전부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 본문을 통해 우리는 믿음의 시선을 현실에서 하나님께로, 상황에서 구속사의 질서로 전환해야 함을 배웁니다.

복음의 진보는 상황에 매이지 않습니다(1:12-14)

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힌 상황에서도 빌립보 성도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1:12). 여기서 '진전'(προκοπή)은 단순한 전개가 아니라, 장애물을 치우고 앞으로 밀고 나아가는 능동적인 전진을 의미합니다. 이는 마치 첩첩산중을 뚫고 전진하는 개척자의 이미지와 같습니다.

그는 자신의 결박이 오히려 로마 시위대(πραιτώριον)와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성도들이 그의 고난을 보며 더욱 담대히 두려움 없이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고 증언합니다(1:13-14). 복음은 억제될 수 없는 능력입니다. 인간이 매여도 말씀은 매이지 않습니다(디모데후서 2:9 참조). 바울의 이 선언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복음의 주체가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심을 재확인시켜 줍니다. 고난의 자리에 있을지라도, 복음은 계속해서 그 길을 열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믿음으로 붙들어야 합니다.

인간의 동기와 하나님의 섭리(1:15-18)

바울은 이어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동기가 모두 순수하지만은 않음을 고백합니다. 어떤 이들은 시기와 다툼으로, 자신을 괴롭게 하려는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전하지만, 또 다른 이들은 진실한 마음과 사랑으로 전합니다(1:15-17). 여기서 주목할 것은 바울의 반응입니다. 그는 자신을 향한 공격이나 의도를 따지기보다는, 복음이 전파되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기뻐합니다.

"그러면 무엇이냐? 외식으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나는 이로써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1:18). 이 말은 복음의 능력이 전하는 자의 동기에 좌우되지 않음을 말해 줍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모든 상황과 동기를 초월하여 복음이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신뢰하였고, 그 믿음이 그의 기쁨이 되었습니다. 이는 복음 사역에서 중심이 되어야 할 것은 나의 명예나 의도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살든지 죽든지, 오직 그리스도만이(1:19-21)

이제 바울은 자신에게 닥친 재판의 결과와 장래에 대한 확신을 나누고 있습니다. 그는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1:19)라고 말하며, 하나님의 주권과 교회의 중보기도, 성령의 도우심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있음을 믿습니다. 여기서 '구원'(σωτηρία)은 단지 천국에 가는 구원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는 포괄적으로 그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이루실 것이라는 섭리적 확신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이어서 그의 삶의 가장 깊은 열망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종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1:20). 여기서 '종귀하게 되다'(μεγαλυνθῇ)는 말은 확대되다, 드러나다, 영화롭게 되다라는 뜻으로, 그의 삶과 죽음의 모든 목적이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1:21)라는 고백에 이릅니다. 이 구절은 사도 바울의 존재론적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 그 자체임을 증언하는 말입니다. 삶이란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고, 죽음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들어가는 것이기에, 바울은 어떤 결과도 유익하다고 말합니다.

복음의 열매와 교회의 유익을 위한 삶(1:22-26)

바울은 자신이 육체 안에 머무를 경우 "수고의 열매"를 더 많이 맺게 될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1:22). 그러나 그는 단지 수고의 결과만을 따지지 않습니다. 그는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을 사모하지만, 교회의 유익을 위해 육신 안에 머무는 것이 더 필요함을 인정합니다.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1:24).

바울은 개인적 유익보다는 공동체의 신앙 성장과 기쁨의 충만을 우선합니다. 그는 "내가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1:25)라며, 자신의 존재 목적이 교회를 세우고 성도들의 믿음을 자라게 하며, 그 기쁨을 더하게 하는 것임을 밝힙니다. 이는 목회자의 태도이자, 모든 성도의 사명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삶이 나의 안위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형제 자매의 신앙을 돕는 통로가 되어야 함을 보여 줍니다.

또한 바울은 자신이 다시 빌립보 성도들과 함께할 수 있다는 소망을 갖고 있습니다. "내가 다시 너희와 함께 있으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1:26). 그는 자신의 존재가 다른 성도들에게 자랑이 되고 격려가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영적 지도자로서의 겸손한 책임감과, 복음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내어준 자의 기쁨이 담겨 있습니다.

결론: 고난 속에서도 복음은 자유롭게 흐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은 단순히 바울의 개인적 신앙 체험을 넘어, 복음의 본질과 하나님의 주권, 그리고 신자의 존재 목적에 대한 깊은 통찰을 줍니다. 감옥은 복음을 막을 수 없습니다. 불순한 동기도 복음의 능력을 제한하지 못합니다. 생사라는 결정 앞에서도 참된 신자는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만을 추구합니다.

바울의 고백은 우리 삶의 거울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살고 있습니까? 나의 성공과 안전을 위하여, 아니면 내 몸을 통해 그리스도가 종귀하게 되기를 소망하며 살고 있습니까? 우리의 삶의 현장은 복음의 전진로입니다. 고난의 골짜기일지라도, 하나님은 그곳을 통로로 사용하십니다. 나의 결박조차 복음을 위한 개척로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 모두가 사도 바울처럼 고백하기를 원합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요,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 고백 속에서 우리는 자유합니다. 어떤 환경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형제 자매의 믿음을 세우는 삶을 살아가며,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구속사에 쓰임받는 복된 인생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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