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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12. 3:9-11 나는 날마다 죽노라

샤마임 2018. 1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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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12. 3:9-11 나는 날마다 죽노라

 

1. 말씀읽기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2. 묵상

 

바울은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자신의 가진 모든 것을 해로 여길 뿐 아니라 버렸습니다. 엄밀하게 그리스도와 맞바꾸었습니다. 오늘은 앞선 묵상에 포함된 9절을 포함하여 11절까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1) 그리스도를 믿는 다는 것

 

딕 루카스는 9절을 주해하면서 그가 포기한 의와 그가 바라는 의로 명징하게 구분했습니다. 그가 버린 의는 율법의 의입니다. 율법은 육신에 속한 것이며, 거룩하고 의롭지만 결코 하나님을 만족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좀 더 확장해 본다면, 육체에 속한 모든 것을 말합니다. 율법은 궁극적으로 육체의 힘으로 무엇인가를 이루려는 노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존 칼빈은 육체에 속한 것을 가톨릭의 공로와 비교했던 것입니다. 그럼 그가 바라는 의는 무엇일까요? 루카스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고 정확하게 지적합니다. 그것은 육체 속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는 유일한 의,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안에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이제 믿음의 문제로 넘어가야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것을 신자의 것으로 만드는 수단입니다. 바울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다. 그럼 어디서 났는가?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말이 무엇일까요? 이 표현은 깊이 사색하지 않아도 충분히 인지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받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것이 어려운 이유는 나를 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는 것과 그리스도가 하는 것을 동시에 받을 수 없습니다. 바울이 불가피하게 빅딜을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을 버리지 않고는 그리스도를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의 고민은 자신을 버리지 않으면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으려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는다는 것을 무엇을 말합니까?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영혼의 변화, 세계관의 변혁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내 안의 우상인 나를 버리고 그리스도가 주인이 되어 모든 것을 그리스도 중심, 그리스도로 인해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전인격적 변화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저는 제랄드 호돈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러므로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 믿음은 그리스도에 관한 일련의 명제에 대한 지적인 동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신뢰하고 그에게 복종하는 행동이다. 그것은 사람의 영혼이 신뢰심을 가지고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라는 사실에 대해 전인격적으로 라고 긍정하는 것이다.

 

전인격적으로 예라고 긍정하는 것, 이것이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받는 것입니다.

 

2)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믿음으로 받는 것이 전인격적으로 긍정하는 것이라면, 이제 행위로 드러나야 할 것입니다. 전인격적이라함은 지적인 동의를 너머 삶의 변혁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존 칼빈은 이 본문에 대해 경건한 자의 실 생활에 대해 말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지적 동의, 의지의 변화는 다시 삶이라는 열매로 드러나야 합니다. 그리하여 마지막 종착역인 부활에 이르는 것’(11)입니다. 그러나 그 전에, 먼저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맞습니다. 먼저 죽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바울의 고백을 통해 바울의 믿음이 체계적이며 반복적인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육체에 속한 것을 버리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죽어야 다시 살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고난 없이 부활의 영광을 바라는 것은 악한 것입니다. 존 칼빈의 탁월한 주해를 들어 보십시오.

 

하나는 내적인 것으로써 성경이 보통 육신을 죽이는 것, 또는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이 문제를 취급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외적인 것인데 겉사람을 죽이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십자가를 참고 견디는 것인데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취급하고 있는 애가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이 귀절에서도 취급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이 우리 앞에 놓여 있을지라도 우리가 재난과 어려움을 무릅쓰고 주를 따르게 되는 것은 그의 부활의 능력을 깨달은 이후에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서는 자세히 설명하기를 우리가 살려고 하기 전에 먼저 죽어져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신자들은 이 땅에 머무르는 동안에는 이와 같은 묵상을 계속해야 한다.

 

우리가 주목할 단어는 계속입니다. 살아있는 동안 계속 죽음을 묵상해야 합니다. 죽음을 묵상하는 삶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끊임없이 자기를 부정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토마스 아 켐피스는 이렇게 조언합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않을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이고, 우리가 참된 빛을 받아서, 마음의 온갖 눈먼 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면, 그리스도의 삶과 성품을 본받을 것을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장 힘써야 할 것은 예수님의 삶을 깊이 묵상하는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묵상은 곧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며, 자기를 부정하는 것은 다시 그리스도를 본받음이 확실합니다. 우리는 자기를 부정함으로 그리스도를 본받아야하고, 그리스도를 본받음으로 자기를 부정하게 됩니다.

 

3) 어떻게 해서든지

 

바울은 결연한 고백을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επως καταντήσω)’를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얻기 위하여가 됩니다. ‘카탄테소(καταντήσω)’라는 단어는 약간의 의심과 걱정이 스며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 사용된 구절을 살펴보면 이 단어는 경외감과 경이감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음 세 구절을 살펴보십시오.

 

27:12 그 항구가 겨울을 지내기에 불편하므로 거기서 떠나 아무쪼록(καταντήσω) 뵈닉스에 가서 겨울을 지내자 하는 자가 더 많으니 뵈닉스는 그레데 항구라 한쪽은 서남을, 한쪽은 서북을 향하였더라

 

1:10 어떻게 하든지(καταντήσω)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11:14 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καταντήσω)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이곳에 나타난 단어들은 한결같이 갈망이나 염원, 그리고 소망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원한다는 말이 됩니다. 바울은 부활을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불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다만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긴다는 뜻을 가집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기쁘신 뜻과 섭리에 대한 경외인 것입니다.

 

제랄드 호돈 적절하게 이 단어를 해석하면서 구원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은사라는 것과, 또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비를 함부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겸손 때문인 듯하다고 말합니다.

 

나가면서

 

부활로 가는 길은 험난합니다. 자기를 부정해야하고, 고난과 수모를 겪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수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전인격적 삶의 고백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누구입니까? 중심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아니 그리스도가 살아서 그의 삶을 주관하는 자들이 아닙니까? 내적인 가치관의 변화, 외적인 삶의 변화까지 일어날 때 진정한 그리스도인다운 삶이라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갑시다. 바울의 고백처럼 말입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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