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8. 2:19-24 예수의 일을 구하는 사람
[빌립보서] 8. 2:19-24 예수의 일을 구하는 사람
1. 말씀 읽기
19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의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20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21 그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22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23 그러므로 내가 내 일이 어떻게 될지를 보아서 곧 이 사람을 보내기를 바라고 24 나도 속히 가게 될 것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2. 묵상
문제가 발생할 때 신뢰할만한 누군가 있다는 것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배신이나 속임이 존재하지 않고 순구하고 결백하며, 충성스럽고 성실하게 자신의 일을 대신해줄 사람을 곁에 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할까요? 바울의 주변에는 여러 사람들이 있었지만 디모데처럼 각별한 사이는 없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교회의 문제를 해겨하기 위해 디모데를 보내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디모데라면 충분히 교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 보았던 것입니다. 오늘은 바울과 디모데의 관계를 살펴 보도록 합시다.
1) 뜻을 같이함
바울은 디모데를 소개하면서 디모데가 적합한 이유를 설명합니다. 첫 번째 주목할 주제는 ‘뜻을 같이’(ἰσόψυχος)하는 것입니다. 뜻을 같이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영혼의 동등함(equal-soul)을 말합니다. 생각의 가치나, 방향, 방법, 그리고 목적이나 이유가 하나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의 의도를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으며, 자신 역시 그와 동일하게 한 마음으로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뜻입니다. 디모데는 바울 자신과 같습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20절)라고 소개합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생각하는 것처럼, 디모데 또한 바울과 동일하게 빌립보교회를 걱정하고 염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일이 그렇지만, 특히 복음 사역은 뜻을 같이해야 합니다. 마음이 맞지 않으면 도무지 주의 일을 같이할 수 없습니다. ‘마음을 같이 한다’는 뜻에는 몇 가지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먼저는 같은 이유와 목적을 같는다는 뜻입니다. 모든 사람이 주의 일을 하지만 동일한 목적을 갖지는 않습니다. 누군가는 자신의 성공과 명예를 위해서합니다. 어떤 이들은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합니다. 어떤 이들은 취미삼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모든 것을 복음 사역에 투자했고, 그것을 자신의 최우선으로 삼았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의 이러한 마음을 십분 알았을 뿐 아니라 자신도 동일하게 생각했습니다. 존재 목적과 이유가 복음 사역인 것을 마음으로 깊이 알았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안위’를 받을 수 있습니다. 마음이 통하는 사람이 곁에 있으면 평안합니다. 현대인들이 앓는 ‘고독’은 몸은 같이 있으나 마음이 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홀로 존재하도록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아담을 보시며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함께 할 때 평안과 기쁨을 얻습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빌립보교회에 보내 사정을 알게 됨으로 ‘안위’를 받게 될 것을 기대합니다. 같이 걱정하고, 같이 고민할 때 위로가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세 번째 이유는 한 마음으로 뜻을 전해준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에서 언급한 ‘안위’ 즉 평안은 디모데가 빌립보교회의 소식을 전해준다는 확신에서 오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사정을 안다’는 것은 지식의 전달이 아니라 바울의 의향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동일한 사건이라도 해석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습니다. 동일한 소식을 전하지만 어떤 이는 불쾌한 감정으로 전하기도하고, 어떤 이는 듣는 이들에게 기쁨을 줍니다. 디모데는 바울에게 안위를 주고, 기쁨이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2)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뜻을 같이함’이 디모데의 행위에 관련된 것이라면,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22절)에는 마음의 자세가 더 강합니다. 물론 ‘위안’을 주는 존재로서 디모데의 모든 행위는 마음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럼에도 두 번째 다루는 ‘아버지에게 함같이’에는 또 다른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그것은 ‘존중’입니다. 존중은 순종이 따르고, 순종은 존중을 전제합니다. 디모데가 귀감이 되는 이유는 그러한 순종이 흔치 않기 때문이다. 이마 오백년이 넘어버린 종교 개혁자 장 칼뱅도 이렇게 한탄합니다.
“오늘날 어디에서 젊은이들이 사소한 일에 이르기까지 자기의 윗사람에게 순종하는 것을 찾아 볼 수가 있는가? 오히려 이 시대의 젊은이들은 오만과 포악으로 가득 차 있지가 않은가?”
디모데의 순종은 ‘그들이 다(all)’ 자기의 일을 구한다는 표현 속에서 두드러집니다.(21절)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 살았습니다. 하지만 디모데는 바울과 한 마음으로 복음을 위하여 살았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을 아버지처럼 여기며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아들’로 부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고전 4:17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으니 그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딤전 1:2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딤전 1:18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교훈으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딤후 1:2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딕 루카스는 본문을 주해하면서 디모데가 바울의 자리를 ‘절대 찬탈하지 않았다’고 옳게 주장합니다. 사소해 보이는 이 사실은 그리스도인을 따르는 주의 종들이 새겨들어야 합니다. 처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순종에 순종을 이어갑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새 자신도 모르는 교만과 명예를 탐하려는 욕망이 일어납니다. 첫 사랑과 첫모습을 상실한 사람들은 추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디모데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결코 자신이 바울보다 더 위대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고, 바울의 선을 넘지 않았습니다.
자식은 아버지보다 자신이 월등히 탁월해도 아버지를 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아버지의 아들인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자식이 자신보다 우월한 것을 숨기지 않으며, 비교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기뻐하고 함께 즐거워합니다. 왜일까요?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디모데는 자신이 바울의 영적인 아들인 것을 알기 때문에 어느 순간, 어떤 상황에서도 바울 아래 자신을 낮추었고, 감추었습니다. 이보다 더 귀한 섬김과 겸손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바울은 디모데를 세워줍니다.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해 수고’했다고 자랑스러워합니다.(22절) 겸손한 사람은 자신이 이른 성취나 업적을 자신의 것으로만 돌리지 않습니다. 그동안 자신을 위해 기도하고 후원하고 도왔던 사람들에게 돌립니다.
바울의 이러한 표현은 디모데가 빌립보교회를 찾을 때 빌립보교회가 디모데를 얕잡아 보지 못하도록 배려이기도 합니다. 우리 주변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만을 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없이 ‘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밥 한 그릇 먹는 것도 농부의 수고와 유통 업자들의 애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단지 자신들의 수익을 위해 그렇게 했다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게 받으며, 작은 것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직접 모를 심고, 김매기를 하고, 추수해 직접 방아를 찧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몇 천원에 밥 한 그릇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곧 우리의 수고가 덧대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3) 나도 속히 가게 될 것을
이제 마지막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속히 빌립보교회에 가고 싶다고 말합니다. 아니,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라고 고백합니다. 칼뱅은 이 문장에 ‘주님이 기쁘게 여기신다면’을 붙여 조건적 표현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항상 조건적으로 말한다. ‘만약 주께서 기쁘게 여기신다면’ 바울이 비록 주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석방되기를 바라기는 했으나 이 기대는 확실성이 없는 것이므로 자기가 빌립보 교인들에게 가는 것을 약속하지는 않고 하나님의 은밀한 목적에 맡기고 있다.
‘은밀한 목적’은 기이한 표현입니다. 칼뱅은 바울이 비록 하나님의 확정적인 뜻을 알 수 없지만, 빌립보교회를 향한 자신의 마음이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면 가고 싶은 마음을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확신(πείθω)’이란 단어는 ‘믿음’이란 ‘피스토스(πίστις)’에서 왔습니다. 우리는 어떤 것을 확신할 때, ‘확정적’이란 의미로 받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은 ‘주 안에서(ἐν κυρίῳ) 확신’한다고 말합니다. ‘주 안에서(ἐν κυρίῳ)’가 왜 중요할까요? 주님이 허락하시면 가는 것이고, 허락하지 않으면 가지 않을 것라는 순종의 고백입니다. 이것은 비겁함이나 억지가 아니라 상황을 통해 이루어 가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고백인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마음 없는 순종을 ‘상황적’이란 말로 고집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진심으로 빌립보교회에 가고 싶지만, ‘만약 주님이 허락하지 않는다면 가지 않겠다’라는 순종의 다짐도 내포(內包)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가라하시면 가고, 멈추라 하시면 멈추는 것이 진정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갈 때가고, 설 때 그곳에 성막을 쳤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이 순종의 사람들입니다.
나가면서
디모데, 그는 이름만으로 고귀한 존재입니다. 바울을 영적 아버지로 모시며,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절대 바울을 저버리거나 떠나지 않았습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언제나 바울의 조력자요 섬기는 자로 살아갔습니다. 그는 바울의 마음과 합하여 조금도 다른 마음을 품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디모데를 보며 기꺼이 모든 것을 맡겼고, 추천했습니다.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영혼의 동반자처럼 한 마음과 한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인간은 본시 타락한 심성으로 인해 자신의 욕망과 쾌락을 쫓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디모데는 철저히 자신을 내려놓고 바울의 복음 사역에 동참했습니다. 그것은 순종이자 성실이며, 헌신이자 자신의 신앙 고백이었습니다.
우리도 디모데처럼 신신할 그리스도인, 친구, 성도로 살아갈 수 있다면 최고의 복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삶이 그렇게 되시기를 원하십니다.
'구약역사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빌립보서] 10. 3:1-3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는 법 (0) | 2018.11.04 |
---|---|
[빌립보서] 9. 2:25-30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하고 (0) | 2018.10.28 |
[빌립보서] 7. 2:12-18 너희의 구원을 이루라 (0) | 2018.10.14 |
[빌립보서] 6. 2:5-11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 (1) | 2018.10.08 |
[빌립보서] 5. 2:1-4 하나 되어 사랑하라 (0) | 2018.09.3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