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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흥의 조건

샤마임 2010. 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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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의 조건

사람은 누구나 칭찬 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어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존재를 어디서 찾는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을 때 삶의 의미를 받아들입니다. 누군가가 자신을 필요로 하고 인정해 줄 때 살아가는 의미를 발견하고 삶을 의미있게 받아 드립니다. 자신이 아무도 필요없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 사람의 삶은 방탕한 삶을 살게 되거나 헛된 곳에 정력을 소비하게 됩니다. 심지어는 자살로까지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삶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한다는 것은 다른 의미로 자신이 누구이며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발견입니다.

노벨 문학상을 수여하고 위대한 소설가로 잘 알려진 헤밍웨이가 있습니다. 그는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라는 소설을 통해 인류는 하나임을 강조하며 사랑해야 될 관계임을 말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소설은 국가의 이익과 이데올로기 속에서 속절없이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여줌으로 인생이란 지극히 의미 없음을 이야기했습니다. 결국 헤밍웨이는 1961년 7월 2일 이 세상에서는 진정한 천국이 없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결국 자신이 애용하던 엽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쏘고 자살 하고 말았다.

사람이란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의미를 찾아 떠나는 여행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룡이 주연한 성룡의 CIA라는 영화-영화제목은 WHO AM I?-에서 충격으로 기억을 잃어버린 주인공이 자신을 찾아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중간 부분에 어느 공동묘지에 도착한 다음 너무 답답히 큰 소리로 ‘WHO AM I?’ ‘WHO AM I?’라고 외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갑니까?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

우리는 서로의 관계 속에서 나를 이해하며, 타인을 인식합니다.

사람은 홀로 존재하도록 지음 받지 않았으며, 서로를 위해서 살아가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을 창조할 때부터 사람은 ‘나’가 아닌 ‘나’를 위해 살아갈 때 진정한 삶의 의미와 기쁨을 발견하게 됩니다. 자신만을 위하여 살아가는 사람은 엄밀한 의미에서 진정한 의미에서 살아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은 창조될 때부터 관계적 존재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관계적 존재는 나라는 존재는 ‘나’ 혼자서 증명이 되는 것 아니고 또 다른 ‘나’를 통해 인식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남이 없는데 ‘나’가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너무나 잘 알려진 본문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오늘 본문 속에서 교회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며 나아가야할 중요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오늘 본문은 기도를 위한 본문으로 자주 사용됩니다. 맞습니다. 오늘 본문은 주님께서 기도하라는 의미 속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본문이 단순한 기도의 내용이 아니라 천국의 중요한 원리를 설명하기 위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마태는 산상수훈을 예수님의 사역의 가장 첫부분에 위치시켜 놓음으로서 예수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삶이 무엇인지를 말해주고 싶은 것입니다. 저는 이 본문으로 한달전 기도의 자세를 설명드린 적이 있습니다. 응답받는 기도란 간구의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먼저 시작되며, 이 땅에서의 이웃들과의 관계속에서 참된 기도의 응답의 비결의 숨겨져 있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이제는 이 본문을 통해 천국을 살아가는 종말론적 존재서로서의 성도는 어떻게 이 땅에서 천국을 실현해야 하는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먼저 본문의 구조를 나누어 봅시다.

7-8 구하는 자는 받을 것이다.

9-11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아버지

12 하나님께 응답받는 비결

본문의 전체적인 내용은 이렇습니다. 구하는 자마다, 찾는 자마다, 두드리는 자마다 응답받게 될 것을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린다는 삼중적 표현은 점진적으로 발전하고 더 강력하고도 구체적인 구도자의 삶을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구함은 마음의 갈망의 상태를 말하고, 찾음은 마음으로 간절히 원하는 것을 행동으로 실행하는 것이며, 두드린다는 것은 찾아서 그 앞에서 마지막으로 문을 두드림으로 마지막 응답의 모습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응답의 주체가 본인 아니라 상대편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기도자가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릴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 문을 열어주는 자는 자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들도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에게 문을 열어준다는 것입니다. 주체는 문을 열어주는 타인에게 있는 것입니다. 구하는 자는 전적으로 수동적으로 반응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다른 사람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해도 그 사람이 빌려주지 않는다면 아무러 유익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통 세상 속에서는 문을 두드리는 자에게 문을 열어주는 것이죠. 이것은 일반상식이요, 사람들과의 일반적인 관계입니다. 

자식이 떡을 달라고 하는데 돌을 주면서 ‘에따 먹어라’하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 말씀을 하신다음 곧바도 ‘하물며’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도 자식들에게 좋은 것을 주는데 ‘하물며’하나님께서 택하신 성도들의 간구를 들어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사람들이 응답한다면 하늘의 하나님은 더욱더 잘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신나고 즐거운 일입니까? 주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고 싶어서 안달한다는 표현이 맞는 것 같습니다. 마치 아빠가 선물을 사놓고 아이가 ‘아빠 선물’이라고 말하기만 하면 주려고 기다리시는 아빠의 모습과도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아버지라 부르는 하나님은 이렇게 좋은 분입니다. 우리는 이것은 깊이, 그리고 주의 깊게 생각하여 마음에 담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도 보면 이렇게 나와있습니다.

11:6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브리서 기자가 강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아버지가 어떤 분인가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신다는 사실과 또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주님은 우리에게 ‘상’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복음서의 달란트 비유를 보십시오. 왜 한달란트 받은 사람이 책망을 받았습니까? 주인을 악한 사람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끔식 하나님을 악한 존재로 생각합니다. 물론 일부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을 나쁜 분으로 묘사합니다. ‘하나님이 왜 나에게 이렇게 하는거야’ ‘왜 내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는거야’ ‘왜 시험에 떨어지게 한거야’라고 하면서 주님께서 나를 부당하게 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그것이 잘못된 생각이라고 일러줍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상’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상이 무엇입니까? 군대에서 간첩을 잡는다든가, 사격을 잘한다던가, 훈련에서 일등을 하면 포상휴가나 상금, 또는 계급특진을 시켜 주듯이 주님께서는 성도들에게 택하신 백성들에게 그런 상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사실을 믿습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이렇게 좋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다음 구절인 12절은 본문의 이야기를 이상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불청객처럼 갑자기 끼어둔 1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이 구절의 중요성은 이러한 법칙이 율법이요, 선지자라는 것입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의 전부라고 해도 될 만큼의 아주 강력한 통치 수단입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다음으로 미루고... 이것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은 알고 지나갑시다.

이 구절의 원리는 이런 것입니다. 네가 남에게 대접을 받고 싶다면 네가 먼저 남을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남에게 칭찬을 듣고 싶다면 네가 먼저 칭찬을 들으라는 것이죠. 우리는 이것을 부메랑효과라고 합니다. 자기가 한 말은 결국 자신에 되돌아온다는 것입니다. 7:1-2을 주의깊게 읽어보십시오. 우리는 이 본문을 남을 절대 비판해서안된다. 아니다. 해도 된다는 식의 비판에 관련된 것으로 보려하지만 그런식으로 본문을 해석해서는 안된다. 이 본문의 해설은 3절입니다. 자신에게는 근복적으로 잘못된 편견을 가지고있으면서 타인을 바로보는 것이야 말로 가장 어리석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눈속에 있는 들보가 뭇엇인가? 주님은 5절에서 분명하게 이야기 합니다. 그것은 ‘외식’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행동만으로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속마음을 더럽고 추하고 악한대도 겉으로 드러난 것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잘못된 것인가를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즉 자신을 똑바로 직시하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가장 솔직하게 바로보는 자야 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참다운 비판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 이 구절을 다시 12절과 비교해 봅시다. 주님은 분명히 남에게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고 했습니다. 이구절을 3절의 말씀으로 해석해 봅시다. 네가 진정으로 남들에게 대접을 받고 싶다면 먼저 너의 속마음을 들여다보라, 그리고 그 마음이 다른 사람에게도 역시 있다는 것을 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란 철저히 이기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누눈가 자신을 알아주지 않음에 대해 서운해하고, 분노하고 화를 냅니다. 그러나 자신이 남을 알아주고 인정해 준적이 있는가 질문한다면 그런적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남말을 잘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남말이라는 것이 칭찬이나 좋은 말이 절대 아닙니다. 뒤담화란 결국 비판하고, 비웃고, 조롱하고, 내리까는 것들입니다. 인간은 원래 그렇습니다.

전도서7:21 또한 사람들이 하는 모든 말에 네 마음을 두지 말라 그리하면 네 종이 너를 저주하는 것을 듣지 아니하리라

누군가가 나에 대해서 칭찬을 해주는 것을 듣고 싶고 좋은 평가를 해주는 것을 듣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러한 일에 흥미를 느끼지 못합니다. 우리는 어쩔수 없는 타락한 아담의 후손임이 이런 곳을 통해 증명됩니다.

왜 이세상이 이렇게 어지럽고 미움과 시기와 전쟁과 경쟁과 원망과 슬픔이 많습니까? 부메랑 때문입니다. 자신이 던진 그 부메랑이 자신에게 돌아와 자신을 치기 때문입니다. 남을 칭찬하기 싫어하고, 남을 비판하고 안좋게 평가하려는 인간들이 쏟아놓은 수만은 부메랑들이 남도 치고 자신도 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하나님을 믿은 우리는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가입니다. 역시 ‘하물며’의 문제입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부탁을 한다면 기꺼이 하나님처럼 들어 주라는 것입니다. 좋은 것을 남들에게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콩심은데 콩나고 팥심은데 팥난다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6 : 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우리는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거울은 절대 먼저 웃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내가 웃어야 거울도 따라서 웃는 법입니다. 우리교회가 좋은 교회가 되고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한다면 먼저 우리가 천국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 첫 번째 일은 남을 비판하지 않는 것입니다. 절대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아무도 모르게 뒷담화를 시도한다해도 주님은 듣고 계십니다. ‘내가 들리는 대로 행하리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민수기 14 : 28]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이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우리가 누군가는 비판하고 욕을 하면 그것은 말한 그 사람에게 되돌려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어느 교회 복도에 [성도의 언어생활 십계명]이라고 적혀진 것중의 하나입니다. 9번째 성도는 저주하지 않습니다.

* 저가 저주하기를 좋아하더니 그것이 자기에게 임하고 축복하기를 기뻐 아니하더니 복이 저를 멀리 떠났으며 또 저주하기를 옷 입듯 하더니 저주가 물같이 그 내부에 들어 가며 기름같이 그 뼈에 들어 갔나이다 (시편 109:17,18)

참으로 합당한 말씀이 아닐수 없습니다. 성도는 남의 허물을 끄집어 내어 그것을 자신의 즐거움이나 쾌락의 도구, 아니면 자신을 변호하는 수단으로 사용해서는 안됩다는 것입니다. 천국에는 저주가 없습니다. 성도에게 비판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성도는 칭찬해야 합니다. 성도는 사랑해야 합니다. 성도는 남의 허물을 끝까지 덮어 주어야 합니다. 성도는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성도는 인내하며 그리스도의 헌신과 섬김의 도를 본받아야 합니다. 성도는 축복해야 합니다.

*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누가복음 6:28)

*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로마서 12:14) 이것이 진정 아름다운 성도의 모습입니다.

옆사람과 인사합니다.

당신을 절대 비판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내가 듣고 싶어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게 간절히 남들을 통해 듣고 싶은 나에 대한 평가가 아닙니까? 교회의 부흥이 뭐 대단한 무엇으로 생각하기 싶지만 사실은 이렇게 가까이에 있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으로 탕자를 불쌍히 여기듯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고 축복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물며’의 의미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누군가를 돕고, 누군가의 허물을 덮어주고, 불쌍히 여긴다면 ‘하물며’ 하나님을 믿은 성도야 말로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천국의 원리는 저주가 아니라 축복입니다. 서로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야 말로 진정한 천국의 원리인 것입니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있다면 먼저 남들에게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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