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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23편 묵상] 5. 상을 베푸시는 여호와

샤마임 2018. 4.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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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23편 묵상] 5. 상을 베푸시는 여호와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차리시다

상상력을 더하여 읽는다면 5절은 쉽게 읽을 있는 본문이 아닙니다. 그는 지금 원의 목적, 즉 원수의 눈앞에 있습니다. 그 원수가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없습니다. 만약 온전한 상태라면 다윗을 죽이기 위해 달려들 것입니다. 아니면 이미 정복해서 포박 당한 상태인지 모르겠습니다. 전쟁이 끝났으니 하나님께서 포상을 하는 장면일 수도 있습니다. 학자들도 양분되어 서로 논쟁하고 있지만 결론을 내릴 수 없는 내용입니다. 김정우는 정확한 상황은 알 수 없으나 ‘앞에서’를 ‘거슬려’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말합니다. 문장을 분해해 봅시다. 히브리 원문을 따라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차리신다 내게 상을 원수의 목전에서

부으신다 기름으로 내 머리에 내 잔이 넘친다

상과 기름은 앞선 고백인 초장(상-식사)과 기름(물)이라는 은유와 맞아 떨어집니다. 1절에서 양과의 목자의 은유로 고백했다면 5절은 지금의 현실 속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사건으로 묘사합니다. 즉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기 때문에, 목자가 양을 푸른 초장과 물가로 인도하듯 나에게 비록 원수의 목전이라도 상과 기름을 허락하실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만약 이렇게 해석한다면 원수는 지금 건재합니다. 그리고 다윗을 죽이기 위해 틈을 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여유롭게 여호와께서 차려주신 식사를 즐깁니다. 이것이 정말 가능할까요? 일단 광야의 이야기를 서술하는 시편 78편으로 넘어가 봅시다.

“19 그뿐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이 광야에서 식탁을 베푸실 수 있으랴 20 보라 그가 반석을 쳐서 물을 내시니 시내가 넘쳤으나 그가 능히 떡도 주시며 자기 백성을 위하여 고기도 예비하시랴 하였도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하나님은 광야에서 식탁을 베풀 수 없다’고 불평했고, ‘물을 줄 수 없다’고 원망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아니다 할 수 있다’라고 말합니다. 다윗의 고백은 어떠한 환경일지라도 여호와가 함께 하신다면 그대의 삶은 잔치집이 될 것이라고 속삭입니다.

의미를 확장해봅시다. 원수가 누구입니까? 단지 나를 괴롭히는 사람에 불과할까요? 아니죠!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뿐 아니라 고단한 상황과 힘겨운 일들까지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채워주심을 믿는냐? 다윗은 질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이런 상상을 해봄직합니다. 푸른 초원에 양들이 한가히 풀을 뜯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 멀리서 퓨마와 늑대들이 양들을 잡어 먹기 위해 틈을 노리고 있습니다. 늑대를 발견한 양들은 목자에게 가까이 갑니다. 목자에게 가까이 가면 사나운 짐승들이 쉽게 공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시 짐승들을 향해 보란 듯이 풀을 뜯어 먹습니다. 목자의 보호를 믿은 양들의 믿음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공동 번역은 5절을 이렇게 번역합니다.

원수들 보라는 듯 상을 차려주시고, 기름 부어 내 머리에 발라주시니, 내 잔이 넘치옵니다.

‘보라는 듯’은 참 멋진 번역입니다. 이 구절은 여호수아와 그 백성들이 여리고 성 앞에서 ‘보라는 듯’이 할례를 받은 것을 떠오르게 합니다. 아무리 원수들이 강하고, 고난이 휘몰아쳐 와도 여호와께서 함께 하신다면 적진 앞에서 할례를 받을 수 있습니다. 원수 앞에서 식사를 맛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사정을 잘 알고 계십니다. 격한 고난은 하나님을 의심하게 하지만, 고난이 깊을수록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목자에게 가장 가까운 곳이 가장 안전합니다. 세상의 그 어떤 피난처보다 십자가 아래보다 더 좋은 피난처는 없습니다.

강한 용사이신 여호와

5절은 계속하여 묵상하다 보면 상을 차려주시는 여호와의 모습은 온유한 목자가 아닙니다. 강한 용사, 즉 장수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원수가 다가오면 그를 공격할 칼을 가지고 있고, 갑옷을 입고 계십니다. 말씀이 검과 십자가에서 흘린 피는 그 어떤 갑옷보다 강하고 튼튼합니다. 우리의 원수들을 보십시오. 그들의 우리의 죄를 물고 늘어져 하나님께 고자질합니다. 우리의 양심에게 소리를 지릅니다.

“정직하게 너를 봐라. 네가 하나님께 사랑 받을 구석이 어디 있느냐?”

“또 죄를 지었구나. 너 같은 녀석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제발 착각하지 말아라. 너는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사단이 불화살이 끊임없이 우리를 공격하고 의심의 창이 우리를 찌릅니다. 그때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믿음의 방패와 보혈의 피로 만들어진 칭의의 갑옷입니다. 원수의 적의(敵意)가 강열한 곳에서 느긋하게 식사를 할 수 있는 지키시는 여호와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대적과 싸우시는 여호와를 이렇게 고백합니다.

사 42:13 여호와께서 용사 같이 나가시며 전사 같이 분발하여 외쳐 크게 부르시며 그 대적을 크게 치시리로다

그 식탁은 풍성합니다.

케네스 E. 베일리는 람사의 글을 통해 중동의 접대 문화를 소개하면서 식탁이 풍성함과 연관있다고 소개합니다. 람사의 글을 재인용해 봅니다.

[중동 지역에서 한 사람의 명성은 그가 소유한 재산이 아니라, 손님에게 베푸는 식탁과 풍성한 환대에 의해 평가받는다. 객이나 이웃들은 자신이 손님으로부터 방문했던 식탁에 대해 즐겨 논한다. 이야기가 엮어져 소문이 되고 그 소문은 마을과 마을로 전해지며 또 세대를 거쳐 전해지게 된다. 따라서 객과 이웃을 즐겁게 해줄 방법은 의미 있는 이야거리다.]

주인은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기 위해 풍성하게 대접합니다. 이것은 명예와 관련된 것이며,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3절의 말씀과 일치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차려준 상은 단출한 밥상이 아닙니다. 풍성한 잔칫상입니다. 이 상은 우리가 나중에 주님과 함께 누릴 풍성한 영적인 교제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계3:20)

함께 식탁을 나누는 것은 손님과 주인이 동등하다는 의미이며, 존귀함을 드러내는 표식입니다. 오래 전에 태국에 단기선교를 갔을 때의 일입니다. 선교사님은 선교팀을 위해 이동할 짚차 두 대를 대여했습니다. 험한 산악지대를 가야 했기에 일반 버스나 승용차는 불가능했습니다. 분주하게 사역을 하면서 며칠을 지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식사를 하는데 운전기사가 보이지 않아 선교사님께 물었습니다.

“왜 운전기사는 식사에 초대하지 않습니까?”

그랬더니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태국은 고용하는 사람을 주인처럼 여기기 때문에 고양된 기사는 우리와 함께 식사를 할 수 없습니다.”

 

 

 

 

 

왕이 통치하는 태국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라고 합니다. 함께 식사한다는 것은 친구이거나 동료, 아니면 존귀한 손님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대문명 속에서 식사대접은 요즘처럼 식당이나 배달 음식의 차원이 아니라 풍성한 잔칫상이었습니다. 우리는 천사를 환대한 아브람의 이야기 속에서도 풍성한 환대를 접할 수 있습니다.(창 18:1-8) 아브라함이 대접한 상은 요기를 때우는 것이 아니라 연회에 가까웠습니다.

종말론적 교제로서의 식탁

5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체험했던 ‘광야의 식탁’과 유비됩니다. 이미 시편 78편을 소개한 것처럼 광야의 식탁은 하나님의 능력을 전제합니다. 또 다른 의미는 종말론적 환상의 이미지입니다. 먹이시는 하나님의 이미지는 모든 삶을 책임지시며 구원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광야는 생존이 위협 받는 곳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없어 불평하고 원망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하늘을 열고(찢으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습니다. 바위를 깨드려 물을 마시게 하셨습니다. 먹고 마심의 이미지는 치유와 회복의 이미지입니다. 에스겔 47장의 성전 문에서 나오는 물줄기, 계시록 21장에 나타난 생명수의 강, 시편 1편의 시냇가의 이미지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치유와 회복에 대한 이미지들입니다. 완전한 부재 속에서의 완전한 충만을 고백하게 합니다.

케네스 E. 베일리는 5절을 신약의 성만찬으로 끌고 갑니다. 고전 10:21을 끌고와 식탁과 잔의 이미지를 시편 23편 5절 말씀과 비교합니다.

 

“바울은 성찬식에 관해 논하면서, 우상과 관련된 예식과 성찬식의 성례에 동시에 참여할 수 있다는 고린도 교인들의 착각에 대해 지적한다.”(베일리,83쪽)

원수 앞에서 상은 여호와의 능력을 알려주는 동시에 오직 여호와 만이 먹이시는 존재임을 말합니다. 포로기의 이스라엘은 위협과 협박, 조롱 속에서 살아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때가 되자 다시 풍성한 은혜로 채워 나가십니다. 또한 마지막 때에 완전한 회복을 약속하십니다.

기름을 부으시는 여호와

성경에는 기름을 붓거나 바르는 이야기가 종종 나옵니다. 왕, 선지자, 제사장은 기름을 부어 세웠습니다. 또한 외부의 손님이 집에 올 때 주인은 손님의 머리에 기름을 발라 그를 존귀하게 했다고 합니다. 초대교회는 기름을 바름으로 병자를 치유하는 예식도 있었습니다. 기름을 바르는 행위는 존귀하게 하며, 치유의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머리를 기름을 부으셨습니다. 즉 그를 존귀하게 하겠다는 선언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에 다윗은 기쁨으로 반응합니다.

목자였던 필립 켈러는 여름철에 벌레들로 인해 양들에게 기름을 발라야 한다고 알려 줍니다. 여름은 풀이 무성한 때이기도 하지만 ‘파리의 계절’이기도 합니다. 기후가 따뜻해지면 수많은 해로운 곤충과 벌레들이 생겨납니다. 요들파리, 말파리, 뒷발파리, 코파리, 사슴파리, 각다귀, 모기 등 헤아리기도 힘든 많은 해충들이 많습니다. 특히 코파리의 경우, 양들의 코 속에 알을 낳아 유충이 알에서 깨어나면 머릿속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살 속으로 파고 들어가 염증을 일으킵니다. 양들은 고통으로 인해 미친 듯이 나무에 머리를 박거나 심지어 죽기도 합니다. 이때 아마인유와 설파와 타르로 만들어진 혼합유를 양들에게 발라주면 파리들이 접근하지 않습니다. 양들은 불안해하지 않고 차분히 쉬거나 풀을 뜯어 먹게 됩니다.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부어 회복시키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십니다. 그 상이 차려지기 위해서는 목자의 수고와 애씀, 원수를 보호하시는 강한 용사로서의 이미지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수많은 무리들을 위해 친해 오병이어와 칠병이어의 기적을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들을 살게 하는 것은 세상의 떡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온 떡,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입니다. 다윗이 원수의 목전에서 차려진 상을 즐길 수 있는 것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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