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처형 / 마르틴 헹엘 / 이영욱 옮김 / 감은사
십자가 처형
마르틴 헹엘 / 이영욱 옮김 / 감은사
이 책은 오래 전(1982년 11월) 대한기독교서회에서 현대신서 122번으로 출간된 바 있다. 헹엘은 국내에서 결코 저명한? 학자로서 충분히 대우 받지 못하고 있다. 헹엘의 이름으로 출판된 책들의 대부분이 재판은커녕 초판본도 다 팔리지 않은 것이 많다. 아마도 중간기 문헌과 신약 배경사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한국교회의 상황 때문이 아닌가 싶다. 어쨌든 헹엘의 책이 감은사의 손을 거쳐 다시 멋진 모습으로 만날 수 있어서 기쁘다. 최근 감은사를 통해서 출간되는 대부분의 책들이 작지만 단단하다. 이 책 역시 작고 적다. 심지어 각주가 한 페이지에 3/4 이상을 차지하는 곳도 많다. 학문적인 책이라는 뜻이다. 최근에 출판되는 신학서적들이 각주를 미주로 처리하는 못된 편집 때문에 애를 먹고 있어서 그런지 미려(美麗)하게 펼쳐진 각주를 보고 나도 모르게 감탄했다. 서론과 요약, 결론까지 추가해도 모두 13장 밖에 되지 않으며 200쪽도 되지 않는다. 성경 외 문헌들과 신화에 나타난 다양한 십자가와 그와 비슷한 죽음들을 추적하고 탐색한다. 결론은 흔한 시대였든 흔하지 않는 시대였던 십자가 처형은 가장 극악(極惡)하고 수치스러운 형벌이었다는 점이다.
헹엘은 책을 마치면서 십자가 처형에 대해 열 가지로 정리한다. 몇 가지만 언급해 보자. 고대에서 십자가 처형은 널리 시행되었다는 것과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형벌이었다는 점은 간과해서는 안 된다. 십자가형은 범죄 억제책의 효과를 극대화시키기 위한 공개적이고 모욕적인 처벌 방식이었다. 성경 밖의 문헌들에서는 십자가 처형을 ‘철학적으로 사유하려는 시도는 상대적으로 거의 없었다’(176쪽)는 점은 놀랍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 처형을 ‘형언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하시고 죽음에 이르게 된 자들의 고통을 하나님의 사랑과 결속’(177쪽)시켰다.
십자가 처형을 새롭게 해석했던 이들을 바라본 헬라인들과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미쳤다고 확신했다. 확실히 십자가 처형은 다른 종교와 기독교를 확실하게 ‘구분 짓는 것’(13쪽)이었다. 정치적이었기에 더욱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헬라 철학의 관점뿐 아니라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이란 표현은 그 자체로 모순이자불편하고 어리석은 주장’(29쪽)이었다.
초대교회 은밀하게 뿌리를 내리다 2세가 중반이 되자 숨은 발톱을 드러낸 영지주의자들이 십자가 처형을 가현설로 대체하려 했다. 너무나 짧은 탓인지 후일을 기약하려 한 탓인지 이 부분은 호기심만 불러일으키고 더 깊이 나아기지 않는다. 그러나 초대교회 전도자들에게 십자가 처형은 ‘부담’(45쪽)스러운 것이었으며, 유대인들에게는 ‘걸림돌이 되는 것’(46쪽)이었다. 그럼에도 바울은 십자가 처형에 대한 불편함을 감추지 않았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배 가운데 기꺼이 그 불편하고 거리끼는 십자가 처형을 고백했다.
“이와는 달리, 예배는 십자가 처형의 거리끼는 모순을 공적으로 고백하기 위한 적절한 공간으로 남아있었다.”(50쪽)
[영화 스파르타쿠스의 한 장면]
헹엘의 논지는 십자가 처형이 비인격적이며 극도의 비천함과 모독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의 고난을 십자가와 분리 시켜 생각하지 않고, 그리스도인들이 따라야할 모범을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의 낮아지심으로 삼았다.(빌 2:5-11) 그러므로 모든 것을 내려놓으신 그분께 당연히 찬양 드려야 함은 마땅하다.
과도한 십자가 ‘신학’에 함몰된 필자에게 십자가 처형이 주는 사회적, 정치적, 생물학적 의미를 되돌아보게 해주었다. 그렇다! 십자가는 아픈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십자가의 길을 걷는 이들에게 ‘흔적(스티그마)’를 요구한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롬 8:32)라는 바울의 선언 속에는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아들을 내던진 성부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자비와 긍휼이 담겨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예수와 함께 모욕을 당하지 않고, 아픔을 감내하지 않으며,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십자가 처형을 당하려 하지 않는가. 고린도교회 성도들처럼 우린 이미 배부르고 이미 지혜로워서 그런 것은 아닌지. 사순절 기간이다. 주님의 십자가를 묵상하자. 아니 그 아픔을 느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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