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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의 기도

샤마임 2011. 6.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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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의 기도



언더우드 선교사님이 1885년 4월 5일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하여 조선에 첫발을 내 디딘 날은 부활절 아침이었다. 부활의 아침에 인천 제물포항에 내리면서 자신의 마음을 하나의 기도문으로 적었다. 읽을 때마다 감동이되고 캄캄해서 도무지 볼 수 없는 조선의 미래를 믿음의 눈으로 기대하며 바라보았던 선교사님의 마음이 와 닿는 것 같아 설렌다.


오 주여,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여!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을 옮겨 와 심으셨습니다.
그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주께서 붙잡아 뚝 떨어뜨려 놓으신 듯한
이곳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한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 사람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 있는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 줄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주겠다고 하면
의심하고 화부터 냅니다.

조선 남자들의 속셈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나라 조정의 내심도 보이지 않습니다.
가마를 타고 다니는 여자들을 영영 볼 기회가 없으면 어쩌나 합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해야 할 일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이
볼수 있는 날이 있을 줄 믿나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조선의 믿음의 앞날을 볼수 있게 될 것을 믿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황무지 위에 맨손으로 서 있는 것 같사오나
지금은 우리가 서양 귀신 양귀자라고 손가락질 받고 있사오나
저희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지금은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의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H.G언더우드


아래는 인천내리교회에서 발행은 잡지의 일부분이다.
“우리는 부활절에 여기 왔습니다. 그 날 죽음의 창살들을 꺾으신 주께서 이 백성을 얽어맨 결박들을 끊으시고,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릴 빛과 자유 속으로 인도해 주소서”
“We came here on Easter, May He who on that day burst asunder the bars of death. break the bands that bind this people and bring them to the light and liberty of God’s children.”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 땅을 찾았던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 러가 1885년 4월 5일 제물포에 처음 도착하면서 하나님께 드린 기도문이다. 제물포(현재 인천광역시 중구)는 우리 민족사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두 가지 커다란 사건의 진원지이다. 선교사들이 첫발 을 내 디딤으로서 민족 복음화의 초석이 된 영적 축복의 관문 이자, 6.25당시 대한민국의 존망이 위태로울 때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일거에 공산군을 물리치고 오늘 날 세계속의 대한민국으로 우뚝서게 된 초석이 된 곳이기도 하다.

124년 전 부슬비 내리던 부활주일 오후 3시, 미국인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1858-1902) 부부와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가 제물포에 도착했다. 오랜 기간 흑암에 덮여 있던 조선 땅에 비로소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의 빛이 비취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이보다 1년 전, 일본에 파송된 미국인 선교사 매클레이는 개화파 김옥균을 통해 고종황제에게 조선에서의 개신교의 선교 가능성을 타진한다. 
그러나 고종황제는 교육과 의료에 대해서만 윤허(允許)하고 선교활동은 허락하지 않았다. 소식을 듣게 된 미국 감리교 선교부는 조선에서의 외국인 활동이 가능하다는 판단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정한다. 1884년 10월, 의사이며 목사인 윌리엄 스크랜턴(William B. cranton, 1856-1922)과 아펜젤러 부부, 여성 교육과 선교를 위해 스크랜턴의 어머니 메어리 스크랜턴(Mary F. Scranton, 1832-1909)을 감리교 선교사로 파송했다.

1885년 2월 3일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우편선 아라빅 호를 타고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한 이들은 2월 27일 일본 요코하마 항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조선 선교 책임자인 매클레이와 함께 선교전략을 논의한 결과 여러 명의 선교사들을 동시에 조선에 보낼 경우 의혹을 받을 수 있다는 판단으로 우선 아펜젤러 부부를 보내기로 한다. 3월 23일 요코하마 항에서 나고야 마루 아펜젤러 선교사 60 지구촌비전를 타고 출발한 아펜젤러 부부는 며칠 후 고베에서 승선한 장로교 선교사인 언더우드를 만난다. 그 외에도 이배에는 조선의 선교 가능성을 알아보려는 일본 주재 장로교 선교사 스쿠더(Scudder)와 테일러(Taylor)도 동승했다. 나가사키에서 배를 바꿔 탄 일행은 1885년 4월 1일 밤 부산항에 하룻밤을 머물다가 서해안을 따라 4월 5일 제물포에 도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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