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배된 교회 리 비치 / 김광남 옮김 / 새물결플러스
유배된 교회
리 비치 / 김광남 옮김 / 새물결플러스
일단 제목부터 강하게 끌린다. 2001년에 마이클 호톤의 <세상에 포로 된 교회>(부흥과개혁사)와 비슷한 느낌을 준다. 기회가 된다면 호튼의 책과 비치의 책을 비교하며 읽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가나안교회 시대에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라는 표지 문구가 ‘유배된 교회’만큼이나 강열하게 다가온다. 이 책은 전반적으로 낯설다. 먼저 저자인 리 비치(Lee Beach)도 낯설고, ‘유배된 교회’라는 의미도 아직 낯설다. 서평을 위해 먼저 저자를 찾아 보았다. 한글로된 자료가 거의 없기 때문에 영문으로 검색했다. 책의 원제는 <The Church in Exile: Living in Hope After Christendom>이다. 한글 제목 ‘유배된 교회’는 영문 원제를 그대로 번역한 것이다. 저자에 대한 소개가 너무나 약소하여 당황스럽기 까지 하다. 소개는 단 한 문장이다. “캐나다 온타리오 소재 맥마스터 신학교에서 목회학을 가르친다. 캐나다의 CMA 교단(Christian and Missionary Alliance)에 서 20년 넘게 사역하고 있다.”
저자 소개가 너무나 약소하여 맥마스터 신학교에 들어가 저자 소개 글을 살펴보았다. 두 가지 저자의 특징이 보인다. 하나는 20년이 넘는 목회사역이고, 다른 하나는 교수로서 포스트모더니즘 속에서의 교회의 역할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서구적 관점과 보수적 관점을 견지하면서도 상당히 개혁적인 측면을 함께 고민한다.
책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우리는 ‘크리스텐둠(Christendom)’이란 단어를 염두에 두고 여행을 시작해야 한다. 이 단어는 한 마디로 기독교국가란 좁은 의미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좀 더 포괄적으로 이해한다면 ‘기독교 문화와 정치의 영향 아래 있는 기독교’ 쯤으로 받아도 될 것 같다. 이 책은 현대 교회가 유배된 상태 있다고 전제하며 시작한다. 1부에서 ‘유배 신학’이란 제목으로 현대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유배된 상태가 무엇인지 성경 속에서 찾아낸다. 2부는 ‘유배지에서의 실천’이란 제목으로 ‘그럼 우리는 여기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살펴본다. 우리는 1부를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필자는 1부에서 저자가 주장하는 유배의 의미들을 주의 깊게 따라갈 것이다.
1장에서 저자는 의미심장한 단서들을 제공한다. 현대 사회는 더 이상 미국이나 캐나다를 기독교 국가로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이전의 기독교인은 교회 나가는 것을 그만두었다. 주류였던 기독교는 이제 다양한 사회적 환경 속에서 비주류화 되어 가고 있으며 이미 상당히 진전된 상태다. ‘개신교가 소수파로 전락하는 경계’(48쪽)로 밀려 나는 동안 강력한 신흥 종교가 탄생하는데 그 종교의 이름은 ‘소속 없음(unaffiliated)’이다. 저자는 이러한 이유를 ‘증대되는 풍요’(51쪽)와 ‘세속화’(53쪽), 밀려오는 이민자들로 인한 ‘변화하는 사회적 상황’(62쪽) 등으로 돌리고 있다.
저자는 2장부터 7장까지 성경 속에서 유배의 의미를 찾는다. 최초의 유배이자 앞으로 일어날 유배의 원형은 ‘에덴동산에서 최초의 부부와 더불어 시작’(71쪽) 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유배는 722년의 북이스라엘의 멸망과 587년 바벨론에 의한 남유다의 멸망으로 인해 일어난 유배다. 거의 모든 구약에는 유배 신학이 스며있다. 심지어 어떤 학자는 시편 23편에서도 다윗의 피난을 통해 유비된 이스라엘이 유배적 상황을 짚어 낸다. 서두에서 부르그만이 언급했던 2장에서 바벨론 유배를 ‘디아스포라’(92쪽)로 확장 시킨다. 이것은 곧 신약 교회로의 비약적 연결이다. 유배 또는 디아스포라적 상황은 ‘하나님의 명백한 부재’(93쪽)를 인식시켰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수많은 질문을 낳는다. 하나님은 패배했는가?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하나님은 아직도 우리를 사랑하는가? 등이다. 여기에 ‘유배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덧붙인다.
저자는 3장에서 에스더에서 유배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역사하시는가를 묻는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셨다. 그러나 버리지는 않았다. 다만 잠깐 유배의 상황으로 몰아가신다. 에스더서는 ‘이방 땅에 숨은 상태로 임재하시는 하나님’(99쪽)으로 설정한다. 숨어 계시에 볼 수 없다. 다만 느낄 뿐이다. 삶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없다면 하나님은 감지되지 않는다. 그래서 종종 ‘유배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임재를 의심하게 만든다.’(105쪽) 다니엘서의 하나님은 ‘기꺼이 그리고 정기적으로 인간의 일에 개입하신다.’(121쪽) 바벨론은 지혜의 나라이다. 그러나 다니엘은 바벨론의 ‘모든 지혜자들을 주관’(126쪽)한다. 메시지는 분명하지만 저작 시기와 그로인한 신학적 의미가 달라지는 요나서에서 하나님은 모든 열방의 운명까지 주관하신다. 요나서의 목적은 ‘그들이 증오하는 적들까지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147쪽)을 보여주신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역할이자 유배된 교회의 사명이다. 저자는 구약에서 끌고 온 유배의 목적이 교회가 특권적 지위를 내려놓고 ‘선교적 본질에 충실할 것을 ’(152쪽) 촉구한다.
6장에서 제2성전기 이후 유대인들은 고토(故土)에 돌아왔으나 여전히 유배 상태에 남겨진다. 저자는 이 문제를 곧장 7장으로 끌고가 베드로 전서와 연결시킨다. 베드로 전서의 핵심 메시지는 고난 속에서도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는 ‘제국의 길을 거부하고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182쪽)이다. 저자는 베드로 전서 속에서 ‘거룩’을 독특하게 서술한다. 먼저 세상에 ‘참여’함으로 거룩해야 한다. 거룩은 분리가 아니다. 거룩은 참여하여 이루어내는 총체적 명령이다. 즉 ‘거룩함이 이 세상의 현실에서 실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189쪽) 더 나아가, 선교적으로, 관계적으로 거룩해야 한다. 거룩은 형이상학적 개념이 아닌 매우 적극적이며 실제적인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충실하게 따르는 행위’(190쪽)로 구체화된다.
2부에서는 유배된 상황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설명한다. 현대는 이교의 문화에 둘러싸인 에스더와 다니엘의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다. 타락한 시대 속에서 교회가 거룩하기 위해서는 타협이 아닌 적응이다. 저자는 보다 강력하게 ‘타협 없는 적응’(229쪽)이라고 말한다. 교회가 처한 문화에 적절하게 대응하는 법을 찾도록 돕는 대응신학(a responsive theology)을 적극적으로 계발해야 한다. 대응신학은 ‘교회가 자신의 핵심적인 신학적 정체성을 타협하지 않으면서 유배적 상황에 적응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상황화하도록 이끌어 줄 것’(233쪽)이다. 대응신학은 개인적 경건이 아닌 모든 피조세계에 역사하시는 우주적 하나님 신학에서 찾아야 한다. 이것은 세속 문화에 대해 금욕적이고 부정적으로 평가한 터툴리안식이 아니라 긍적으로 바라본 어거스틴의 관점이다.
“하나님이 문화 안에서 그리고 문화를 통해서 역사하신다는 견해의 핵심 관점은 인간의 문화가 하나님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다. 문화는 그 뿌리를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문화 안에, 그리고 초월적인 하나님과 일시적인 인간 사이의 지속적인 변증법 안에 두고 있다. 하나님은 문화의 궁극적인 창조자이며 인간들이 피조세계를 섬길 때 그들과 창조적인 파트너십을 맺으신다는 점에서 인간의 모든 문화를 주관하는 분이시다.”(244-5쪽)
저자가 주장하는 대응신학의 핵심은 하나님의 임재로서의 세상 참여이다. 즉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으로 세상에 참여한다. 이것은 정확하게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의 삶을 요구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일치한다. 이제 세상은 이미 포스트크리스텐덤(post-Christendom) 시대가 되었다. 교회는 더 이상 밀라노 칙령 직후의 초대교회처럼 주도적 권리를 가지지 못한다. 마치 바벨론 유수의 이스라엘처럼 세상에 참여하되 순응되지 말아야 한다.
거룩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이다. 그런데 유배된 유대인들에게 거룩이 가능할까? 포로들에게 안식일은 없다. 우상에게 드려지지 않는 음식을 먹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럼 그들에게 거룩은 무엇일까? 저자는 에스더서에서 거룩을 탐색하며 에스더가 페르시아 문화에 ‘어쩌면 과도하게 휩쓸린 사람의 한 예’(106쪽) 아닐까 추측한다. 그러나 이것은 ‘이방인들의 지배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삶에 정착하는 식으로 유배 생활의 연장에 대비하라는 예레미야의 권고’(107쪽)와 잇닿아 있다. 유배된 상태에서의 거룩은 유배 이전과는 다르게 해석되어야 한다. 에스더의 거룩은 ‘그녀와 그녀의 공동체와의 관계 안에, 그리고 그녀가 그 공동체를 위해 취한 행동 안에’(110쪽) 있는 것이다. 이것은 현대의 교회가 가져야할 거룩이 ‘관계적 거룩’(257쪽)으로 해석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관계적 거룩은 ‘사랑과 순종의 관계를 발전시키는 실천’(258쪽)이다.
저자는 관계적 거룩을 넘어 ‘이야기적 거룩함(narrative holiness)’으로 나아가야 할 것을 종용한다. 이야기적 거룩함은 우리의 삶을 통해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야기를 살아내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거룩은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사랑과 섬김’의 방식으로 실현된다.
“참됨 거룩함은 이런 두 가지 개념들, 즉 세상과 분리되어 사는 것과 세상에 온전히 개입하며 사는 것 사이의 긴장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통해 발견된다.”(264쪽)
저자는 거룩의 의미를 좀 더 혁신적으로 제시한다. 그것은 교회를 ‘대안적인 존재’(265쪽)로 상정(想定)한다. 교회는 세상에 완전히 달라야 한다. 그 기준은 마태복음 5-7장에 기록된 산상수훈이다. 이것을 위해 교회는 기도해야 한다. 기도함으로 순종할 능력을 성령께 수여 받을 뿐 아니라, ‘희망의 자리를 하나님께 내어드리는 것’(267쪽)이 된다. 적응하지만 순응하지 않는 교회는 필연적으로 핍박을 대가로 치러야 한다. 타락한 세상 속에서 거룩한 공동체로 살아가는 것은 세상과 ‘갈등’(274쪽)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는 끊임없이 산상수훈의 명령처럼 원수를 사랑해야하고, 그들은 용서해야 한다.
유배된 상태는 돌아가야 할 집이 있음을 전제한다. 이것은 유배된 곳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살아가야 한다. 교회가 불가피하게 ‘종말론적인 백성’(316쪽)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세상에 섞이지 않음으로 배타적 공동체로 인식될 것이고, 이로 인해 세상은 교회를 낯설고 위험한 어떤 곳으로 인식하여 핍박하게 된다. 교회는 세상을 회복하고 치유해야할 사명과 다가올 심판과 종말을 잊지 않으며 살아가야할 이중적 정체성을 가진다. 저자의 이러한 통찰은 현대교회가 자신의 자리를 재인식하고 종말론적 공동체로서 성실하게 살아가야 할 것을 권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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