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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무 "책벌레만도 못해서야"

샤마임 2012. 5.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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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글은 조선후기의 실학자이자 문인이며, 박학으로 유명했던 탁월한 학자인 이덕무의 글입니다. 한양에서 성장했고, 훙대용, 박지원, 유득공 등과 교유했고, 중국 여행을 통해 그곳의 많은 문인들과 친분을 맺었습니다. 이덕무는 실용적 삶을 추구하는 실학자이면서, 독서에 대한 깊은 애착을 가진 검소한 선비였습니다. 그는 독서를 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선비가 한가로이 지내며 이렇다 할 일도 없을 때 책을 읽지 않는다면 무엇을 하겠는가? 책을 읽지 않는다면, 작게는 정신없이 잠자거나 바둑 혹은 장기를 두게  되고, 크게는 남을 비방하거나 돈벌이와 여색에 힘쓰게 된다. 아아, 그러니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책을 읽을 수밖에."

이덕무는 사람이 책을 읽지 않으면 다른 생각들이 자신을 차지하게 될 것을 염려했고, 책을 통해 자신을 온전히 세우기를 바라기를 소망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책을 읽는 것은 단순한 정보를 수집하는 수준은 넘어 자신을 만들어가는 수양의 방법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아래의 글은 그의 산문집인 [책에 미친 바보]에서 가져온 글로 '책벌레만도 못해서야'라는 제목이 붙은 글의 전문입니다. 책과 함께 살아가는 몇 번의 선비들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책벌레만도 못해서야

 

흰 좀벌레 한 마리가 내[이소경]에서 ‘추국·목란·강리·게거’ 등의 글자를 갉아 먹었다. 처음에는 너무 화가 나서 잡아 죽이려 했는데, 조금 지나자 그 벌레가 향기로운 풀만 갉아먹는 것이 기특하게 여겨졌다. 그래서 특이한 향내가 그 벌레의 머리와 수염에서 넘쳐나는지를 조사하고 싶어졌다.

아이를 사서 반나절 동아 집 안을 대대적으로 수색하게 했다. 갑자기 좀벌레 한 마리가 기어 나오는 것이 보여 손으로 잡으려 했는데, 빠르기가 흐르는 물과 같아 순식간에 달아나 버렸다. 그저 은빛가루만 번쩍이며 종이에 떨어뜨릴 뿐 좀벌레는 끝내 나를 저버렸다.


지영은 [천자문]을 8백 번이나 썼고, 홍경로는 [자치통감]을 세 번이나 직접 베꼈다. 호담암이 양구산을 만났는데, 양구산이 팔뚝을 들어 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이 팔뚝은 책상에서 서른 해 동안 떼지 않았더니 그제야 로에 진전이 있었다네.”

또한 횡포로 귀양 간 장무구는 14년 동안 매일 새벽녘이면 항상 책을 안고 창 아래에 서서 책을 읽었는데, 돌 위에는 두발뒤꿈치 자국이 은은하였다.

우리나라 사람 두곡 고응척은 젊었을 때 직접 사방이 모두 벽이고 단지 구멍만 두 개 뚫린 집을 지었다. 두 구명 가운데 하나는 음식을 넣는 곳이고 다른 하나는 바깥사람과 말을 주고 받는 곳이다. 고응척은 그 안에서 3년 동안 [중용]과 [대학]을 읽고 나서야 집을 나왔다.


중복 조헌은 평생토록 잠이 없어서 밤에는 책을 읽고 낮에는 밭을 갈았다. 밭두둑에 나무를 걸쳐 책을 세우고는 소를 몰고 왔다 갔다 하면서 여러 책을 두루 읽었다. 밤에는 또한 어머니 방에 불을 때면서 땔나무 불빛에 비춰 책을 보았다. 옛 사람이 학문을 닦는 데 이렇게 열심이었으므로 남보다 크게 앞섰던 것이다. 이에 비하면 우리 같은 무리들은 그저 물 마시고 밥 먹고 잠잘 뿐이다.


운장이 말했다.

“보통 책을 가지고 있으면 아무리 아끼는 것이라도 남에게 빌려주지 않으면 안 된다. 예전에 동춘 송준길 선생은 남에게 책을 빌려주고 돌려받을 때, 종이에 보푸라기가 생기지 않았으면 반드시 책을 잃지 않았음을 나무라고 다시 빌려주었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송준길 선생에게 책을 빌려다가 끝내 읽지 않았다. 그는 선생의 꾸지람이 두려워 짓밟고 깔고 눕고 해서 책을 낡고 더럽게 만든 뒤 돌려보냈다. 이렇나 행동은 어른의 두터운 마음을 미처 헤아리지 못한 바보 같은 짓이다.”

[선귤당농소]·[이목구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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