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별설교] 갈라디아서1장 다른 복음은 없다
[장별설교] 갈라디아서1장 다른 복음은 없다
[갈라디아서 서론]
오늘 저희는 경이로운 문서를 대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갈라디아서는 신약성경에서 최초로 기록된 문서입니다. 대개 신약성경을 읽을 때 네 복음서가 있고, 그 다음 사도행전과 바울서신, 그리고 공동서신들이 있고, 마지막에 요한계시록이 나와 있습니다. 이러한 신약성경의 구조는 자연스러운 연대기적 흐름을 따른 것입니다. 3세기 중반쯤에 정경이 확정되면서 순서가 재배열되어 지금까지 이른 것입니다. 학자들은 데살로니가전후서와 갈라디아서가 신약성경 중에서 가장 먼저 기록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일반성도들이 굳이 알아야할 내용은 아니지만, 복음서보다 20년에서 30년 가까이 빠른 시기에 기록된 문서들이기 때문에 가장 초기의 초대교회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갈라디아서와 데살로니가 전후서는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갈라디아서는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는 핵심적인 이신칭의 교리가 로마서와 더불이 가장 명징하게 드러난 곳이기도 합니다. 바울의 신학의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신칭의는 율법에 의지했던 유대인들의 잘못된 신앙을 배격하고,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성경의 원리로 돌아간 것입니다. 갈라디아서는 오직 믿음으로 의에 이른다는 이신칭의의 교리가 핵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교리를 다룰 때 주의해야할 것은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는 거짓 교사들에게 반론하기 위해 행위가 거의 배제된 듯한 이신칭의를 강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앞서서 살폈던 고린도 전후서의 경우는 그리스도인답지 못한 행위를 가진 이들을 향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에서는 행위와 구원은 전혀 상관없는 것처럼 주장하고 있습니다. 편지 내용만을 본다면 충분히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짧은 새벽시간에 바울신학을 모두 다룰 수는 없지만, 중요한 것은 구원과 행위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 서로 연관되어 있고, 진정한 의가 말씀에 순종하는 삶과 긴밀하게 관련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를 전제(前提)하고 갈라디아서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약에 여러분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길 한 가운에서 자동차에 치일 위기에 놓여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기서 차가 오는데 정작 본인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다른 곳을 보고 있습니다. 소리를 지르면서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가지 않겠습니까? 그 사람을 구해야 하니까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으니까요. 갈라디아서는 바로 그런 장면을 닮아 있습니다. 거짓 교사들에 의해 잘못된 교리를 받게 됨으로 예수를 믿은 믿음에서 떠나 잘못된 행위구원으로 전락하고 있는 갈라디아 성도들을 향해 바울이 달려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그 어떤 서신보다 강열하고 흥분된 바울의 감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1장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1-5절 인사말
2. 6-10절 다른 복음은 없다.
3. 11-24절 복음의 기원
세 번째 부분은 1:11에서 시작하여 2:10절까지 이어집니다. 오늘은 2.3 부분을 중심으로 다른 복음은 없다는 주제로 나누기를 원합니다.
2. 6-10절 다른 복음은 없다.
바울은 인사말이 끝나자마자 격앙된 마음으로 ‘다른 복음은 없다’고 선언합니다. 바울은 ‘다른 복음’과 8절에서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를 비교합니다. 7절에서는 다른 말로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얼마나 화가 났던지 편지를 시작하자마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향하여 ‘저주를 받을지어다’(9절)라고 선포합니다. 10절에 의하면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자들이며, 바울이 전한 복음. 즉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역자의 원리를 도출할 수 있습니다. 거짓 교사들의 목적은 복음을 자신의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교묘하게 복음을 변형시켜 사람들이 자신을 우러러보게 하고, 그들에게서 이익을 취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함으로 구원 얻는 믿음을 갖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다른 복음은 사람들을 기분 좋게 하여 그들의 영혼을 강탈하여 자신의 종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은 인간의 무능을 철저히 드러내고 오직 예수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선언합니다. 이것이 다른 복음과 그리스도의 복음의 결정적 차이입니다. 겉으로 볼 때는 거의 완벽해 보이지만 목적은 너무나 다른 복음입니다. 그래서 복음이지만, 실제로는 복된 소식이 아닌 악한 소식입니다.
*가만히 들어오다의 원 뜻은 '곁에서 들어오다'는 뜻이다. 아마도 그들은 정식적인 통로가 아닌 속이는 방법으로갈라디아교회에 들어왔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3. 11-24절 복음의 기원
바울은 가장 먼저 자신이 전한 복음, 즉 그리스도의 복음이 어디서부터 기인했는지 밝힙니다. 11-12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사람의 뜻’(11절)에 따라 된 것이 아니며, ‘사람에게서 받은 것’(12절)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럼 어디서 그 복음을 받은 것일까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ἀποκάλυψις)로 말미암은 것’(12절 하)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먼저 자신이 전한 복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밝힌 다음, 자신이 어떻게 그 계시를 받게 되었는가 설명합니다. 바울은 길리기아 다소 출신의 디아스포라 유대인입니다. 그러나 젊은 시절에 예루살렘에 유학하여 당대 최고 학교였던 가말리엘 랍비에게 율법을 배우게 됩니다. 철저한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은 유대인의 전통에 따라 율법에 열심을 냈습니다. 14절에 의하며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라고 말합니다. 그는 엄청난 열심으로 유대교를 신봉했습니다.
그런데 14-15절에 의하면 바울은 하나님께서 바울을 ‘은혜로’ 부르셨다고 말합니다. 복음 자체의 핵심이기도 하지만 갈라디아서를 읽을 때는 이 ‘은혜’라는 단어를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부름, 곧 소명을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16절)는 것입니다. 바울이 부활의 주님을 만났던 사도행전 9장으로 돌아가 봅시다. 다메섹에 있던 경건한 아나니아에게 바울에 대해 하신 말씀입니다.
[행]9:15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바울은 이것을 명확히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의 다음 행보는 정말 놀랍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소명을 설득하기 위해 ‘혈육과 의논하지’(16절 하) 않았습니다. 또한 17절에 의하면 먼저 사도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간다는 말은 예루살렘에 있던 베드로와 같은 사도들의 승인을 받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 곧바로 아라비아로 갔고, 다시 다메섹으로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삼 년’(18절)이 지난 후 게바(베드로)를 만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간 십오 일을 머물렀습니다. 하지만 게바는 만나지 못하고 ‘주의 형제 야고보’만을 만났습니다. 21절에 의하면 바울이 그 후에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을 다녔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1차 전도 여행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은 사람에 의해 교육을 받거나 전수 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 계시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무리
바울의 복음이 갖는 특징을 정리 봅시다. 먼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사람에게 전해 받은 것도, 사람의 지혜에서 온 것이 아닙니다. 부활의 주님께서 직접 바울을 만나 전해주신 계시(ἀποκάλυψις)입니다. 주님은 바울을 선택하셔서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습니다. 왜 주님은 바울에게 이방인의 사도의 소명을 주셨을까요? 우리는 사도행전 1:8로 돌아가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방인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고도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고 영생을 얻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는 다시 유대인의 문화과 관습,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됩니다. 오직 예수 그 분 만이 우리의 영원한 생명입니다.
'신약서신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별설교] 갈라디아서 3장 참된 아브라함의 후손 (0) | 2020.01.23 |
---|---|
[장별설교] 갈라디아서2장 바울이 사사로이 제시한 복음 (0) | 2020.01.23 |
[장별설교] 고린도후서 13장 스스로 시험하라 (0) | 2020.01.20 |
[장별설교] 고린도후서 12장 바울의 경험한 환상과 계시 (0) | 2020.01.20 |
[장별설교] 고린도후서 11장 바울의 어리석은 자랑 (0) | 2020.01.1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