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별설교] 에베소서 4장 부르심에 합당한 삶
[장별설교] 에베소서 4장 부르심에 합당한 삶
에베소서 4장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야 하는 이유와 하나님을 본 받는 삶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Ⅰ. 교회를 세우시는 주님(1-16절)
1. 부르심에 합당한 생활
바울은 먼저 부르심에 합당한 생활을 하라고 조언합니다.(1절) 먼저 ‘부르심’이 뭔가 생각해 봅시다. 부르심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목적이라고 말하면 가장 쉬울 것 같습니다. 클린턴 E. 아놀드라는 학자는 부르심을 이렇게 말합니다.
“이 부르심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라는 하나님의 초청 혹은 소환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이 되도록 부르신 것과 마찬가지로 계속해서 사람들이 그분과 가까이 관계를 맺도록 부르신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창세기 1장의 창조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말씀을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창조의 목적대로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들도 하나님께서 부르심으로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도록 목적하십니다.
그렇다면 부르심에 합당한 생활이 뭘까요? 2-3절에서 그것을 이야기 합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 오래 참음과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르심은 하나님을 향한 부르심이기 보다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설명합니다. 겸손과 온유는 내 자신과 상대방을 향한 거룩한 성품입니다. 오래 참음과 사랑 역시 공동체 안에서 가져야할 삶의 성품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에 대해 정의하면서 가장 먼저 ‘오래 참음’을 이야기 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부르심은 성도 간의 관계 속으로 부름이라할 수 있습니다.
2. 부르심의 소망(목적)
그런데 4절에서 갑자기 교회론으로 나아갑니다.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우리의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불렀다’고 말합니다. 그 소망이 무엇일까요? 12절에서 다양한 은사를 이야기한 다음
4:12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결국 성도를 부르신 이유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함입니다. 그리하여 온 성도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온전한 사람의 모범은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예수님을 닮고 또 닮아 가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의 부르심의 소망입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자 보십시오. 성도는 그리스도처럼 되는 것이 목적입니다.
3. 성도를 세우시는 과정
5-12절까지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도대체 이 말은 무슨 말일까요? 읽어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본문입니다. 그런데 이곳은 교회의 직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먼저 11절에 나타난 교회의 직분을 봅시다. 먼저는 사도입니다. 두 번째는 선지자입니다. 세 번째는 복음 전하는 자로, 그 다음은 목사와 교사입니다. 헬라어 원문은 ‘포이메나스 카이 디다칼로우스(ποιμένας καὶ διδασκάλους)’로 우리나라 성경은 목사로 번역했지만 목자가 더 좋은 번역입니다. 디다칼로우스는 말 그대로 교사입니다. 그런데 정관사 없기 때문에 두 직분은 두 개가 아니라 하나입니다. 즉 목사와 교사를 한 직분을 말합니다. 자 좋습니다. 어쨌든 이러한 직분은 성도를 진리의 말씀으로 가르침의 세상의 풍조에 이끌리지 않고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기 위함입니다.
먼저 8절 말씀을 봅시다. 이곳의 말씀은 시편 68:18을 인용한 것입니다.
[시]68:18 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 사로잡은 자들을 취하시고 선물들을 사람들에게서 받으시며 반역자들로부터도 받으시니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이로다
그런데 이 본문은 하나님께서 적군들을 쳐 부수고 그들의 탈취물들은 백성들에게 나누어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이야기가 오늘 본문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다시 9절로 가보겠습니다.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래 낮은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바울의 논리는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적들을 쳐부신 것은 이 땅에 내려오셨기에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하늘로 올라가셔서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신다는 것입니다. 올라가시면서 적들에게 빼앗을 탈취물을 백성들에게 풍성하게 나누어 주신 것이죠. 그로 인해 주의 백성들이 풍성하게 소유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사건을 곧바로 신약의 교회로 대입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탈취물로 나누어주신 선물을 11절에서 교회의 직분으로 연결시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하나님의 낮아짐은 예수님의 성육신을 말하는 것이고, 높아지심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사건, 즉 승귀하신 것을 말합니다. 주님은 하늘에 오르시면서 교회에 즉 새 언약 안에 있는 백성들에게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 주신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어떻게 교회를 통치하시는가? 바로 예수님의 말씀을 전할 직분자들을 세웠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을 세웠고, 현대교회는 목사와 교사를 통해 말씀을 가르치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교회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있는 말입니다.
Ⅱ. 그리스도를 본 받는 삶
두 번째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이야기 합니다.
1. 새 사람을 입으라
첫 번째 권면은 새 사람을 입으라(24절)는 것입니다. 새 사람을 입기 위해서는 먼저 옛 사람을 벗어야 합니다.(22절) 옛 사람은 육체의 욕심과 욕망을 따라 행하는 삶을 말합니다. 바울은 이것을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른다’라고 말합니다.(22절 상) 17-19절에서 이러한 삶을 이야기 합니다. 허망한 것으로 행하고(17절), 무지함과 마음의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는 것(18절)이며, 결국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는 것(19절)을 말합니다.
그럼 우리가 입어야할 새 사람은 무엇입니까? 먼저 심령이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욕심을 따라 행하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는 것입니다. 의와 진리, 그리고 거룩함은 그리스도인이 살아야 삶의 방식, 즉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그리스도인에게 합당한 삶을 말합니다. 의는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의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즉 복음 안에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진리의 거룩함은 진리를 따라 삶을 통해 욕심이 아닌 사랑과 헌신을 통해 희생을 말합니다. 성경에서 ‘의와 거룩’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사는 삶을 말하며, 하나님의 백성이 가져야할 덕목입니다.
[눅]1:75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2. 삶으로 열매를 드러내라.
25절은 ‘그런즉’으로 시작합니다. 앞에 소개된 새 사람을 입은 자의 구체적인 삶을 말합니다. 거짓을 버리고, 참된 것을 말하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26절에서는 분을 낼 수 있다. 그러나 죄는 짓지 말라합니다. 죄를 짓는 것은 어떤 이유든 합리화 될 수 없습니다. 27절에서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 안에서 마귀가 유혹하여 죄를 짓도록 우리 자신을 방임시키지 말라는 뜻입니다. 규모있는 절제하는 삶을 살라는 말입니다. 도둑질 하지 말고, 더러운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29절의 ‘더러운 말’에서 ‘더럽다’라는 단언 ‘σαπρός’로 ‘썩어 악취가 난다’는 뜻입니다. 마태복음 7:1-18에 의하면 나쁜 열매를 뜻합니다. 마태복음 13:48에서는 천국의 비유 중에서 버려야할 물고기에 사용되었습니다.
[마]13:48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 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버리느니라
욕심과 욕망, 방탕과 방임으로 인해 일어나는 세상의 헛된 것들과 죄악들을 말합니다. 성도는 이러한 모든 것들을 마땅히 다 버려야 합니다. 대신 덕을 세우는 말을 해야 합니다.
3.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성령을 근심하게 한다는 말은 성령을 비인격적으로 대한다는 뜻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며, 예수의 영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심을 통해 우리는 성전이 됩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일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죄의 오래 된 습관을 말합니다. 죄를 계속 짓게 되면 성도는 성령을 거의 소멸하게 됩니다. 물론 한 번 내주하신 성령은 떠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근심하심으로 성령에 의해 주도되는 삶,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삶을 살 수 없게 됩니다. 교회의 사역도 똑 같습니다. 어떤 교회는 성령이 주도하는 삶을 살지만, 어떤 교회는 철저히 육적인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영이 눌리고 또 눌리면 결국 성령은 거의 없는 것처럼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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