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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여행] 영암여행 서호사

샤마임 2020. 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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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여행] 영암여행 서호사 

과연 우연이란 게 존재할까? 한다면 바로 어제와 같은 날일 것이다. 아내와 함께 영암을 찾다 길을 잘못 들어 결국 집으로 향했다. 아내가 잠깐 차 세워요. 그냥 지나쳤다. 너무 갑작스러운 요구나.

"차 세울까?"

"그래요"

도로 한 쪽에 차를 세우고 마을로 들어가 보자 한다. 별달라 보이지 않지만 왠지 뭔가 있을 것 같은 느낌.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찾아 나선 곳이 영암 서호사이다.

처음부터 서호사를 만난 것은 아니다. 유난히 잘 단장한 골목은 시골같지 않은 낯섦과 평온함이 함께 스며있었다. 일반 아스파틀가 아닌 황토빛 가득 담은 인조 골목이긴 했지만 편리함과 전통을 함께 담어낸 흔적이 역력했다. 

"이런 시골을 누가 이렇게 단장했을까?"

혼자 중얼거리며 몇 컷을 담았다. 사람 키보다 조금 낮은 담장은 요즘 시대에 흔치 않는 전통 시골의 담장 높이다. 내가 어릴 적만 해도 시골 담장은 사람키보다 낮아 길을 가다 누구나 그 집 사람들에게 인사하고 안부를 물었다. 담장을 사이에 두고 한 참을 이야기하도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담장은 사람 키만큼 높아지고, 얼마 후 더 높이며 소통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곳은 아직도 목까지만 올라와 있어 담장 너머 마당도 보이고, 마당 한켠에 자리한 장독대도 보인다.

얼마 전부터 카메라에 재미를 붙인 아내는 이곳저곳 연신 찍어댄다. 이것도 찍고, 저것도 찍는다. 눈으로 보는 세상과 DSLR로 보는 세상은 달라서겠지.

조금 더 들어가니 범상치 않는 한옥이 보인다. 천석꾼과 만석꾼의 절반쯤이나 될까? 한옥의 용어에 서툰 내가 봐도 너무 큰 집이었다. 본 건물도 컸지만 주변 건물도 많았다. ‘대동이란 단어. 책에서만 봤던 그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 여기가 어디지?”

좀 더 들어가니 다리가 있고, 오른쪽으로 서호사가 자리했다. 모든 것이 범상치 않았다. 아무런 준비 없이 맞닥뜨린 유구한 역사적 대상은 더 이상의 정보를 제공하지 않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와 인터넷을 검색했고, 놀라운 정보를 들을 취합해 나갔다. 호기심은 놀라움으로 발전했고, 놀라움은 감동으로 번져 갔다.

구림 대동계-서호사

구림 대동계-서호사

구림 대동계-서호사

구림 대동계-서호사

신라 보국대장군이자 제26대 진평왕의 사위였던 조계룡(曺繼龍)은 창성부원군으로서 경남 창녕을 본관으로 한 창녕 조씨의 시조가 된다. 그러고 보니 어머니는 창년 조씨다. 전라도에 창녕 조씨라. 뭐 온 나라의 이씨가 대부분 전주 이가니 창년 조가라고 이상할 건 없다. 화왕산 용담에서 한림학사 이광옥의 딸 예향이 용의 정기로 잉태해 겨드랑이에 조자를 새긴 채 태어났다고 한다. 조계룡의 탄생설화는 삼국유사만큼 신화적이다. 아마도 왕족임을 드러내려는 것인지 용신의 혈통임을 자랑하려 한 것인지 모르겠다. 창년 조씨 득성 설화지에 기록된 탄생설화다.

예향은 창녕현 고암촌(鼓岩村) 태생으로 그녀가 자라서 혼기에 이르렀을 때 우연히 복중에 병이 생겨 화왕산 용지에 가서 목욕재계하고 기도를 올리니 신기하게 병이 완쾌되었고 몸에는 태기가 있었다. 어느날 밤 꿈에 한 남자가 나타나 이 아이의 아버지는 동해신룡(東海神龍)의 아들 옥결(玉訣)이다. 잘 기르면 자라서 경상이 될 것이며 자손만대 번영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사라졌다. 그 후 달이 차서 626(진평왕 48)에 아들이 태어나니 용모가 준수하고 겨드랑이 밑에 조()자가 붉게 씌여져 있었다. 왕이 이 소문을 듣고 직접 불러 확인해 보니 조()자가 선명하므로 성을 조()라 하고 이름을 계룡(繼龍)이라 하도록 하니 창녕 조씨의 시조이다[출처위키백과 <창녕 조씨 득성 설화지>]

구림 대동계-서호사서호사 안채

창년조씨는 5세 조겸이 중시조이다조겸의 손자 조연우로 시작해 15세 조자기까지 8대에 걸쳐 문하시중평장사를 역임한 고려 명문세족으로 있었다고려말 홍건적을 물리친 조민수가 공신이 되어 창성부원군으로 문화시중에 오른다조선 전기에도 조위조식 등이 유명한 학자로 명성을 날렸다.

창년 조씨가 영암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조선전기 부제학인 조상치의 7세손 조기서(1556-1591)가 영암군 서호면 일대의 유력 가문인 선산임씨 임혼의 사위가 되면서부터이다조기서는 기축옥사 당시 호남 유생들의 억울함을 상소하다 간신들의 모함으로 어려움을 격는다그후 의금부도사의 벼슬을 버리고 영암 서호에 내려와 임환 등과 친분을 맺는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기서의 둘째 아들인 조행림이 어머니 임씨 등 가족들과 함께 외가인 구림촌에 피난해 정착하면서 태호공파 태호종가를 연다.

조행립은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웠으며 사헌부 감찰태인 현감익산 군수온양 군수군기시첨정 등의 관직을 거친 후 낙향했다영암 구림으로 돌아와 구림 대동계를 재조직해 왜란과 호란 등 연이은 전쟁으로 사나워진 향촌사회의 풍속과 고난을 상부상조로 이겨내고 미풍양속을 회복하는데 힘썼다.

구림대동계는 1565년 조행립을 비롯해 현건박성오임호박규정 등이 창설한 대표적인 동계로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600여년이 지속되고 있다동헌의 규약을 정하고 양반과 평민 모두 참여하는 촌락공동체다호남에 전승되는 대표적인 향약으로 평가되는 영암구림 대동계 문서가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98호로 지정됐다영암 구림 대동계 문서는 총 3종 81책으로 구성돼 동계 창건 과정 1609~1743년까지의 동헌 규약이 잘 보존되어 있다.[출처 <영암 창녕조씨(昌寧曺氏태호공파 태호종가 /서호사>]

구림 대동계-서호사

구림 대동계-서호사서호사 정문


서호사 다리 건너에는 회사정이 자리한다. 회사정은 향사, 회의, 징계가 이루어진 곳으로 일종의 회관과 같은 역할을 햇다. 회사정 주변으론 수령이 400년 된 소나무들이 작은 숲을 이루고 있다. 

구림 대동계-회사정회사정

[자료출처]

남도일보(2020,07,31)

영암 창녕조씨(昌寧曺氏) 태호공파 태호종가 /서호사

위키백과 <창녕조씨>

위키백과 <창녕조씨 득성설화지>

영암군청 <구림전통마을>

https://www.yeongam.go.kr/home/dogi/sightseeing/yeongam.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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