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고양이
전쟁과 고양이
2019년 9월 9일 월
아내와 걸었다. 민간인보다 군인이 더 많은 거리. 아직 동서남북과 큰 거리 외에는 분간하기 힘든 낯선 동네다. 밤에 거리를 걷기는 처음이다. 고등부 학생을 만나고 온 아내는 저녁을 먹고 서점 이야기를 하다 '같이 갈래요?'라며 물었다.
"그럴까?"
우린 그렇게 한 마음이 되어 거리로 나선 것이다.
일주일 내내 전쟁이었다. 갑자기 잡힌 이사 일정은 어느 것 하나 준비하지 못하게 했고, 350km나 되는 머나먼 거리는 간다는 생각 자체만으로 부담이었다. 하지만 '그날'은 왔고, 시간은 흘러 일주일이 지난 것이다. 정확하게는 10일이 지났다. 오늘 아침까지 집은 이삿짐으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얼마 되지 않아 보인 책들이 풀어놓으니 쌓아도 쌓아도 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지마켓에서 사과박스 20개를 주문해, 읽지 않은 책과 당장 필요로 하지 않은 물건들을 넣고야 말았다.
거리는 시골 읍내처럼 한산했다. 하지만 여느 시골같지 않은 생동감도 적지 않았다. 군인마트에 들러 재활용을 버릴 큰 비닐봉지를 샀다. 이곳은 페트병 등은 속이 보이는 큰 비닐에 담아 놓으면 가져간다고 한다. 군인 마트를 나와 빵집으로 향했다. 뚜레쥬르. 아내는 잠깐 있으라 하며 들어가 식빵 하나를 사들고 나왔다.
"천만다행이야"
"뭐가"
"뚜레쥬르가 있어서"
유난히 빵을 좋아하는 빵순이인 아내는 빵맛에 민감하다. 며칠 전에는 마트의 코너에서 판 빵을 몇개 나와서는 맛이 없다고 투덜댔다. 5일 시장 빵맛에 길들여진 나로서는 그 맛이 그 맛이지만 아내는 민감했다. 그리고 발견한 뚜레쥬르. 아내는 약간 흥분된 상태로 이야기했고, '천만다행'이라고 말한 것이다.
다시 걸었다. 이번엔 서점이다.
"서점이 있을까"
대형마트 없는 것은 참아도 서점 없는 것은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일주일 동안 정신없이 보내느라 서점은 생각도 못했다. 그러다 오늘 '서점'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아들이 서점 아저씨 이야기를 하면서 기억난 것이다. 저녁을 먹고 곧바로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섰던 것이다. 몇 가지 살 물건을 핑계 삼아.
서점은 의외로 컸다. 참고서 위주이긴 했지만 군인들이 좋아할만큼 연애소설들이 의외로 많았다. 물론 군인들이 연애소설을 좋아한다는 것은 나의 순전히 개인적인 근거 없는 추측일 뿐이다. 아직 출판사에서 보내온 책들이 몇 권있어 사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런데 한쪽 구석에서 요세푸스의 <유대 전쟁사>를 발견하자 나는 갈등하기 시작했다.
지난 학기 신약신학(Th.M)을 공부하면서 중간기를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중간기를 몇 번 읽기는 했지만 주의하지 않은 탓에 흐릿한 기억 밖에 남지 않았었다. 그러다 제2성전기 문헌과 신약 배경사를 공부하면서 개인적으로 시간을 내 공부했던 것이다. 몇 권의 책을 참고 삼아 중간기를 정리했었다.[제2성전기(신구약중간기) 역사 개요] 외경을 중심으로 공부하고, 제2문헌을 중심으로 읽은 탓에 요세푸스의 원문을 읽어야 한다는 심한 갈증이 일어났다. 그러나 가격이 만만치 않아 몇 번을 미루었다. 이게 웬일인가? 이 시골에 유대 전쟁사 1.2권이 있다니? 믿을 수 없었다. 하고 기이해 '이런 책도 갖다 놓네요. 이건 일반 신학생들도 잘 읽지 않은 전문 서적인데'라며 말을 걸었다. 사장님은 대뜸
"새로 오신 목사님이신가 보네요?"
그랬다. 작은 동네가 새로운 목사가 왔다는 것을 온 동네?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소문은 그렇게 신속하고 넓게 퍼져 있었다. 사장님은 자신의 둘째 아들이 미국에 있으며, 목사라고 두 번이나 강조하셨단. 본인은? 교회는 다니지 않은 듯하다.
아내도 한 권을 책을 골랐다. <개와 고양이에 관한 작은 세계사>(파피에)였다. 오늘도 고양이다. 요세푸스의 <유대 전쟁사>는 1권만 샀는데도 45,000원이라는 무지막지한 가격 때문에 책 값은 6만원을 훌쩍 넘어가 버렸다. 처음 이곳에 도착해 기념으로 산 것이니 거침없이 체크카드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쓰라린 마음을 숨기고 집으로 들어와 책상에 앉았다. 그리고 발견한 고양이 오스카. 2차 대전 중에서 고양이 오스카(Oskar)가 탔던 5척의 배가 침몰해 '오스카의 저주'라는 말이 생길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이 저주인가? 오스카에는 불행이자 행운이 아닌가. 인간의 탐욕과 폭력성으로 인해 서로 죽이며 살상의 현장에서 5번을 죽을 뻔했지 않는가. 그러니 오스카는 저주의 이유가 아니라 엄연히 피해자인 것이다.
오스카는 원래 나치의 군한 비스마르크에서 처음 승선했다. 전쟁도중 비스마르크는 침몰하게 되고 오스카는 판자에 매달려 표류한다. 이것을 영국 구축함인 HMS 코삭에 구조된다. 적선의 함재묘(ship cat)가 미움이 아닌 사랑을 받고 다시 군함에서 생활하게 된다. 영국 군인들은 오스카를 버리고 샘(Sam)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주었다. 그러나 코삭도 어뢰를 맞고 침몰한다. 그런데 오스카는 다시 살아남는다. 영국의 HMS 라이트닝에 구조된다. 다시 HMS 리전으로 옮겨 타고 마침내 하선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오스카가 탔던 배들은 2차 대전이 끝나기 전 모두 격침당한다. 사람들은 수많은 해전 속에서도 결국 살아남은 이 고양이에게 'Unsinkable SAM(침몰하지 않는 샘)'라는 별병을 붙여 준다. 후대의 사람들은 오스카에게 '저주'를 붙였지만, 오스카와 함께 생활했던 이들은 오스카를 통해 위로를 얻었고, 살아갈 이유도 되었다.
프린스 오브 웰일즈(HMS Prince of Wales) 함선의 함재묘였던 오스카, 윈스턴 처칠이 쓰다듬고 있다.
집에 있는 카무와 닮은 것 같은데 그냥 나만의 착각일까?
고양이는 사랑이고 위로이다. 삶의 전쟁터에서 고양이는 희망이다. 아내는 그래서 고양이를 남편보다 더 사랑한다. 결코 아니라고 우기지만.
그런데 고양이도 천국에 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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