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코로나19의 교회,코로나 이후의 교회
포스트 코로나19의 교회
코로나가 창궐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 잠잠해 지겠지만 언제든지 다시 지금과 같은 상황이 일어날 것이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올 겨울에 다시 코로나가 일어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중세의 흑사병과 비교해도 감히 비교되지 않을 만큼 엄청난 전파력과 치사율을 자랑하는 코로나는 위협이 아닐 수 없다. 문제는 코로나가 이전의 전염병과 다르게 너무나 쉽게 전파된다는 것이고, 공기를 통해 전파되기 때문에 문제가 심각하다는 점이다. 이런 특성은 사람들이 모이거나 대화를 할 때 장애가 될 수 있다. 코로나 이후 사회는 지각변동이 올 것이며, 그로 인해 다양한 형태로 사회가 변화할 것이다. 교회 또한 변화될 것이며, 이에 준비하지 못하면 완전히 무너질 수도 있다. 어쩌면 한국교회는 코로나는 어떻게 바라보고 대처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염려 속에서 한국교회가 어떻게 코로나 이후, 즉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준비할 것인가에 대해 간략하게 정리하고자 한다.
자연을 지배할 수 있는가?
이 문제부터 시작할 필요가 있다. 그동안 많이 달라지기는 했지만 교회는 18세기의 문화정복 또는 자연 정복에 대한 신학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자연을 정복하고 계발하는 것이 인간이 창조된 목적이라는 그릇된 신학은 결국 세상을 오염시키고, 병들게 했다. 생태신학이 옳다라고 말할 수는 없으나 하나님은 코로나를 통해 인간을 경고하고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동의할 것이다. 인간은 자연을 정복해야할 대상이 아니라 말씀으로 '통치'해야 한다. 통치는 억압이나 착취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창조의 목적대로 자연이 보존되고 유지될 수 있도록 만드는 일이다. 인간은 생존을 위해서 불가피하게 자연의 일부를 훼손 시킬 수 있으나 최대한 주의해야하며, 공존하는 방식을 모색해야 한다. 이러한 생태신학은 단순히 자연에만 머물러는 안 된다. 교회의 운영과 존재 방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필자가 보기에 코로나19 사태는 하나님의 엄중한 경고다. 탐욕에 물든 인간이 자연을 파괴하고 고통에 빠지게 했다. 코로나로 인해 사람들이 이주금지, 제한 등이 조치가 이루어지자 도심 속에 동물들이 나타났고, 보이지 않았던 하늘이 맑아졌다. 이러한 풍경은 인간이 얼마나 무분별하게 자연을 훼손 시켜 왔는가를 보여주는 극단적인 실례들이다.
이단의 출몰이 주는 경고
참으로 기이한 일들 중의 하나는 한국교회에 이단이 극단적으로 팽창하고 있다는 점이다. 만민교회를 비롯하여, 이단들이 횡횡하고 있다. 특히 코로나로 인해 그동안 교회를 공포에 떨게했던 신천지교회가 들통나 뿌리채 흔들리고 있다. 분명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교회의 입장에서 재고해보자. 과연 신천지는 왜 폭발적 성장이 가능했을까? 신천지에 빠져 있다 나온 사람들의 간증의 일관된 생각은 신천지의 치밀함이다. 물론 그들의 거짓말에 초점을 맞출 수 있겠지만 성찰의 관점에서 본다면 신천지가 전도를 위해 얼마나 치밀하게 준배했는가이다. 신천지의 문제는 바라보면서 필자는 몇 가지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ㄱ. 말씀만으로 성장할 수 없는가?
성장이란 단어에 불쾌감을 갖는다면 슬프지 않을 수 없다. 교회는 성장해야 한다. 성장하지 않는 교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교회는 말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사람이 거의 없는 시골 등에서 도시처럼 성장주의를 추구하라는 말이 아니다. 필자가 말하는 것은 말씀도 없이 전도만 하는 교회를 말하는 것도 아니고, 숫자놀음하는 교회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교회 성장은 선택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한국교회는 성장하지 않았는가? 성장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성장이 과도하게 양에 집중되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이 부분에 대해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일반인들도 대부분 동의하리라 믿는다.
중요한 문제는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즉 한국교회는 성정했지만 그 성장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하는 것이다. 도덕적 기준이 더 높아졌는가? 아니면 인격과 성품이 더 성숙해 졌는가? 믿음과 신앙의 정도가 더 깊어 졌는가? 여기에 답할 수 있다면 바른 성장이라고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한국교회가 성장은 했지만 양적인 성장에 과도하게 지나쳤다는 점이다. 고든 맥도날드(Gordon MacDonald)가 『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에서 말한 것처럼 비만해진 것이지 결코 성장한 것이 아니다. 성장이란 자신을 책임지고 나아가 다른 사람을 돌보는 성숙한 상태로 나아가는 것이다. 성장했으나 사랑은 없어지고, 성장했으나 하나님과의 친밀함은 사라진 교회는 올바른 성장이 아닌 것이다. 90년대 들어서 한국교회는 마이너스 성장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천만이라는 숫자가 과도하게 부풀려진 숫자라는 것도 들통 나고 말았다. 이러한 불필요한 통계는 아직도 관행처럼 일어난다. 500명의 교회라고 자랑하지만 실제로 주일 낮 참석 교인은 300도 안되는 교회가 부지기수다. 자신의 세를 자랑하려는 엉뚱한 발상들이 실제로 이러한 왜곡을 낳은 것이다.
비만해진 한국교회는 결국 신천지와 같은 이단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교회마다 [신천지 OUT]라는 표지판으로 현수막을 내걸고 있지 않는가. 도대체 신천지가 얼마나 무서우면 그런 것일까? 한국교회는 그동안 신천지에게 휘둘려 왔고, 감당할 힘이 없었다. 한국교회가 거짓된 교회라는 말이 아니다. 가장 적절한 예를 든다면 들릴라에 의해 머리가 잘린 삼손과 같다. 소명을 받았고, 진리는 있으나 나실인으로서의 삶을 저버린 삼손는 결국 성욕에 자신의 비밀을 누설했고, 결국 머리가 잘려 힘이 사라진 것이다. 한국교회는 영적인 힘이 거의 제로에 가깝다. 신천지는 섬김과 사랑이란 이름으로 교묘하게 교회에 파고 들었다. 특히 신천지는 1년에 가까운 성경공부를 통해 새신자들을 교묘하게 교화하고 세뇌시킨다.
일반교회는 신천지교리의 부당함을 지적한다. 그러나 그들이 넘어갈 수 밖에 없는 것은 교리때문이 아니라 관계 때문이다. 교회 안에 성경이 가르치는 바른 관계가 있는가 물어야 한다. 또한 성경 공부로 교회가 성장하지 않는다는 잘못된 생각은 많은 프로그램과 행사를 만들었고, 결국 신천지가 엉뚱한 성경공부를 가르침에도 수많은 성도들이 미혹에 빠져들었다. 한국교회 목회자들은 이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해야한다. 현재 한국교회 안에서 성경공부를 하는 교회가 몇 교회나 있을까? 설교와 기도 정도로만 만족하는 교회가 80% 이상 되리라 짐작한다. 우리교회는 아니다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한국교회를 살펴보면 설교 외에 그 어떤 교회도 시키지 않는 교회가 2/3이상이다. 부흥하고 성장하는 교회는 체계적인 성경공부가 있다. 하지만 그것도 프로그램의 일부이진 진지한 삶의 고민이나 나눔은 아닌 곳이 많다.
기이하게 목회자들이 말씀으로 교회가 성장할 수 있는 것을 신뢰하지 못한다. 설교는 짐이고, 성경공부는 고통이다. 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구원 받고, 치유 받으며, 그로인해 교회가 자연스럽게 성장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일까? 적지 않은 목회자들이 성도들의 똑똑함을 걱정하고 두려워한다. 성경을 가르치면 따지고 들고 귀찮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종종 교인들을 가르치지 않고 우매화시켜 두는 것이 은혜로운 교회를 만드는 것이라 생각한다. 필자는 이 부분에 대해 그런 생각에 대해 모두 부정하고 싶지 않다. 성경을 많은 아는 교인치고 바른 신앙을 가진 이들을 잘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과연 그런 생각이 옳은가는 다른 문제이다. 어쩌면 현재 한국교회가 가진 구조상 똑똑한 교인들이 적응할 수 없는 교회 구조일 수도 있다. 이 부분은 좀더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
ㄴ. 바른 성도의 교제란 무엇인가?
신천지가 이전 이단들과는 극명하게 다른 것이 있다면 관계이다. 그들은 치밀하게 준비하여 접근한다. 물론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말이다. 이것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할 부분이 있다. 그것은 그들이 한 사람을 전도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친다는 것이다. 엄청난 희생과 수고, 다양한 방법으로 접근한다. 신천지의 접근 방법은 모략이라는 거짓된 방법을 사용한다. 그들의 교제를 가짜이며, 거짓된 것이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신천지에 넘어간다. 필자가 보기에 그러한 넘어짐은 관계에 목말라하던 사랑 없는 교회에 실망한 이들의 몸부림이다. 사단은 자신은 광명의 천사로 가장(假裝)한다.
바른 교제란 진리 안에서의 교제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고 했다.(고전 13:6) 진리는 곧 하나님의 말씀을 말한다. 아들을 통해 구속을 이루신 한나님은 아들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교제하도록 하셨다. 교회가 회복해야할 것은 바로 진리 안에서의 바른 교제이다. 좀더 솔직해 진다면 교회 안에 사랑 없음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교단이 갈리고, 각 교회마다 무너져도 관심이 없다. 90년대가 들어서면서 한국교회는 대부분의 교회는 사유화 되다시피 했고, 지극히 개교회화 되었다. 목사도 자신의 속한 교회가 아닌 목사는 목사도 아니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이런 이야기를 일반 교인들에게 들었으니... 진리를 위해 희생하고 사랑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의 현주소가 아닐까. 신천지는 기존 교회를 비방하며 바벨론 교회라고 명명한다. 우리는 신천지가 옳고 그르다를 떠나 우리 교회가 진정으로 사랑이 있는가를 되물어야 한다.
코로나 이후의 사회 현상
코로나 이후 ‘비대면’ ‘비접촉’이란 단어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정부는 ‘사회적 거리두기’를 명목으로 사람들이 함께 모이는 것에 대해 주의를 준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밀집과 밀폐된 공간에서 가장 잘 전파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형태의 모임이 바로 교회인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사회적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에 대해 극단적으로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비대면 비접촉의 일상화
원격 조종 또는 AI의 강화
고립과 단절
온라인 또는 사이버 교회와 교제
비대면 비접촉의 일상화
앞으로 비대면 비접촉은 일상화 될 것이다.
원격 조종 또는 AI의 강화
비대면은 원격 조종 또는 AI가 더 필요하게 될 것이다.
고립과 단절
부정적 측면에서 고립되고 단절된 사람들이 더욱 증가할 것이다.
온라인 또는 사이버 사회의 도래
앞으로 온라인과 사이버 형태의 모임과 교제가 더 활성화 될 것이다. 특해 교육이 더욱 온라인을 통해 전개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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