폰투스의 에바그리오스 실천학
에바그리오스. 생소하다. 저자를 알기 위해 책을 조밀하게 읽어 나갔다. 역자인 남성현의 역자서문을 통해 에바그리오스가 누구인지 가늠할 수 있었다. 그는 사막의 성자로 알려진 안토니오스의 사막 영성과 바실리오스의 수도원 영성을 조화시키고 집대성한 인물이다. 그는 삼위일체 교리를 체계화 시킨 갑바도기아 교부들의 제자이자 이집트 사막으로 들어가 안토니오스적 영성을 체험한 사막의 교부이다.(10쪽) 역자의 주장의 의한다면 에바그리오스는 영성신학을 집대성한 인물이 분명하다.
“요컨대 카파도키아 교부들의 삼위일체 부정신학이 뿌리라면, 안토니오스적인 마귀와의 투쟁과 신플라톤주의적이며 스토아적인 체계는 줄기에 해당되며, 에바그리오스의 영성신학은 열매라고 할 수 있다.”(11쪽)
에바그리오스의 행보를 보면 극단에서 치열하게 공방을 벌이던 초대교회 말기의 신학을 집대성한 어거스틴을 닮아 있다. 에바그리오스의 헬라어 원문을 싣고, ‘스위스에서 30여년 이상을 은거한 수도자이자 에바그리오스와 사막영성 연구에 일평생은 헌신한’ 가브리엘 붕게가 주해를 달았다. 부제를 ‘영적인 삶에 대한 백계(白誡)’로 정한 것은 아마도 일백 개의 장(章)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나톨리오스에게 헌정된 이 책은‘수도사들, 그중에서도 특히 사막에 홀로 사는 수덕가들인 은수자들을 위한 책’(32쪽)이다. 중세에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 받아>가 있다면 초대교회에는 에바그리오수의 <실천학>이 있다. 두 책을 비교하며 읽는 재미도 쏠쏠하지 않을까?
Evagrius Ponticus
에바그리오스는 인간의 심연(深淵)에 숨겨진 타락의 근원을 찾아 나선다. 그는 인간의 심연에 에크하르트가 ‘영혼의 불꽃’이라고 불렀던 초인격적인 부분을 에바그리오스는‘지성’(nous)이라고 지칭하며, 지성을 통해 영혼이 움직인다. 에바그리오스가 난해한 것인지 해제가 난해한 것인지 알 길은 없지만, 영혼에 대한 이해는 꼭 필요한 것 같다. 해제에 의하면 에바그리오스는 ‘이성적 영혼’을 삼분(三分)하여 ‘이해력’ ‘화처’ ‘욕처’로 구분한다. 이해력은 이성적인 부분에 속하고 비이성적인 부분은 다시 ‘화처’와 ‘욕처’로 세분화 시킨다. 화처(火處)와 욕처(欲處)로 구분한다. ‘화처는 육체적인 본성에 속하며 욕처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이다.’(36쪽)이라고 말한다. 아마도 갈망 또는 욕망에 해당하는 단어일 것이다.
“화처의 본래적인 기능은 마귀들과 싸우고 영적 기쁨을 얻도록 애쓰는 것이다.천사들은 우리에게 영적 기쁨과 뒤따르는 지복을 보여주면서 우리로 하여금 화처의 방향을 돌려 마귀들을 이끌어 겨냥하도록 이끈다.”(24장 143쪽)
필자가 잘못 이해한 것이 아니라면 ‘화처’는 중립적이며 인간의 본성에 속한 것이다. 붕게는 이 부분을 이렇게 주해한다.
“화처의 고유한 기능은 ‘덕을 위해 싸우는 것’이며, 에바그리오스가 말하듯이‘영적인 기쁨과 뒤따르는 지복을’ 위해 싸우는 것이다.”(144쪽)
화(火)냄이 모두 나쁜 것이 아니다. 바른 화를 낼 필요가 있다. 예수도 화를 냈다. 그러나 화는 본질적으로 파괴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바른 화냄은 악을 향해야 한다. 에바그리오스는 ‘시험을 받을 때에, 그대를 조여 오는 자에게 화를 내’(42장, 193쪽)라고 조언한다. 마귀에게 화를 냄으로 적(마귀)이 ‘심으려고 하는 심상을 교란 시’(193쪽)킬 수 있다. 불은 태우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이롭게 될 수도 있고 해롭게 되기도 한다. 사람들에게 화를 내는 것은 옳은 일일까? 예수는 자신의 길을 막는 베드로를 향하여 ‘사탄아 물러가라’고 화를 내셨다. 죄는 미워하고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했다.
에바그리오스는 인간의 내면에 일어나는 미세한 파동들을 감지하며 관찰한다. 10장에서 슬픔이 욕망이 좌절 된 후 찾아온다고 말하며 ‘앞선 생각을 뒤따라 어떤 생각이 일어나고 ... 영혼이 이런 기억을 물리치지 않고 오히려 따르기 시작하여 내적으로 그것을 기뻐하면, 생각은 영혼을 사로잡아 슬픔 속에 빠뜨린다.’(94쪽)고 알려준다. 마음이 행동을 지배한다. 잠언 기자도 마음을 다스리는 자가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낫다고 하지 않았던가.(잠 16:32) 성도가 마음의 미세한 움직임을 잘 감지하고 파악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마음이 언어가 되고, 언어가 곧 행동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을 지키는 것은 시작이다.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
“실천의 끝은 사랑이다. 앎의 끝은 신학이다. 실천의 시작은 신앙이요 앎의 시작은 본성적인 관상이다.”(84장, 307쪽)
그렇다. 마지막은 사랑이다. 사랑은 시작이고 이유이고 과정이고 결론이다. 이 책은 한 편의 추리소설이다. 에바그리오스라는 낯선 인물을 대면하여 찾아 나가는 여정이 결코 녹록치 않았지만 그를 통해 새로운 영성의 세계를 접할 수 있는 축복을 얻었다. 아쉬운 점은 낯선 단어에 대한 친절한 설명이 부족했고, 문장이 직역을 한 탓인지 모르겠으나 길고 난해하다. 이 부분만 해결이 된다면 깊은 영성신학으로 이끄는 수단이 될 것으로 믿는다.
|
'Book'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급진적 제자도] 존 요더 (2) | 2015.09.20 |
---|---|
페도가프를 검색해 보니 (0) | 2015.09.20 |
십자가와 칼 / 그레고리 에이 보이드(Gregory A. Boyd) (0) | 2015.08.27 |
한눈에 보는 십자가 신학과 영성 (0) | 2015.08.27 |
진리는 여기에 있다 (0) | 2015.08.2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