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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수신자들 : 남갈라디아설과 북갈라디아설

샤마임 2019. 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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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수신자들 : 

남갈라디아설과 북갈라디아설

1. 수신자들

갈라디아서의 수신지는 어디일까? 학자들은 북갈라디아설과 남갈라디아설로 치열하게 공방한다. 그것이 갈라디아서를 해석함에 있어서 크게 지장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독자들에 대한 이해는 갈라디아서를 잘 이해할 수 있다.

북갈라디아설

소아시아 북부의 원래의 갈라디아 지방에 위치할 것으로 본다. 사도행전 16:6, 18:23에 언급된 갈라디아는 북갈라디아라고 본다. 교부 시대와 중세, 그리고 종교개혁가들은 북갈라디아설을 지지한다. 그들은 갈라디아교회가 소아시아 북부에 위치한 고올족 또는 켈트족 혈통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쓰여 졌다고 생각한다. 주후 74년경 베스파시안 황제는 갈라디아로부터 비시디아의 거의 대부분을 분리시켰다. 주후 137년에는 루가오니아 갈라티카가 갈라디아로부터 떼어져서 길리기아와 이소리카에 합쳐져 보다 넓어진 길리기아를 이루게 된다

주후 297년경, 남부갈라디아는 여러 인접 지역과 합쳐저 안디옥을 수도로, 이고니온을 제2의 도시로 하는 새로운 비시디아성을 이루게 된다. 초기의 주석가들은 인종에 따라 분류되어 축소된 갈라디아 성에 근거하여 북부설을 지지한다. 1865년 라이트푸트는 바울 서신과 누가의 사도행전 양자에 나오는 '갈라디아'는 정치적 의미가 아니라 인종적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로마서와 고린도전·후서를 쓰기 전인 주후 57-58년경인 제3차 전도여행 중 마게도냐나 아가야에서 북갈라디아에 위치한 도시들에게 편지를 썼다고 주장한다.(WBC) 제임스 모펫은 북갈라디아설을 주장하지만 저작 시기는 1:6에 근거하여 좀 더 이른 주후 53년으로 본다.

남갈라디아설

안디옥과 이고니온을 주요 도시로 하는 '브루기아 갈라티카'에 위치했다고 본다. 사도행전 13:14-14:23에 갈라디아 교회의 설립이 기록되어 있다. 역시 사도행전 16:618:23에 언급된 갈라디아를 남갈라디아로 본다. 1890년 윌리엄 램지(William Ramesy)는 북갈라디아설을 아래의 근거로 반박한다.

1. 일찍이 주전 2세기에 [소아시아북부] 갈라디아 인구의 절반 이상인 브루기아의 기원은 주변 지역의 일반인들에게 잊혀졌으며, 그 나라 전체가 갈라디아로, 그 백성은 갈라디아인으로 생각되었다.

2. 갈라디어가 넓어지고 주전 25년 성이 되었을 때, 이것은 그 남부 사람들에게도 적용되었다. 왜냐하면 '로마 제국의 모든 비로마인은 성민으로서의 신분이 되었으며, 그는 그 민족이 아니라 성에 따라 로마 제국의 구성원이라 불려졌기 때문이다.

3. 외국인, 적 그리고 노예는 로마의 이론상 서로 연관된 개념들이었기 때문에 정중한 웅변가나 작가 어느 누구도 안디옥인을 브루기아인이라고 또는 루스드라인을 루가오니아인이라 호칭하지 않았을 것이 확실하며-단지 그 경우만은 아니겠지만, 특별히 그들 중에 로마의 시민들이 있을 경우-아마도 그들은 갈라타이 즉 갈라디아 성의 구성원으로서이 로마 제국의 구성원, 또는 훨씬 더 존칭이었을 콜로니, 즉 로마의 콜로니아니의 시민이라 호칭했을 것이다.

요약하면 램세이는 바울이 갈라디아인을 언급할 때는 갈라디아 성의 남부에 위치한 네 교회를 의도하며, 갈라디아 땅을 언급할 때(16:6, 18:23) 누가는 인종상의 갈라디아와 대조되는 성이라는 행정 구역상의 갈라디아를 의도했다고 한다. 램지는 저작 시기를 2차 선교 중의 어느 시기이거나 주후 50년 즈음으로 본다. 후에 행 15장에 나오는 예루살렘 공의회 직전에 수리아 안디옥에서 썼다고 말한다.

지지자 : F.F. Bruce

수신자를 떠나 중요한 관점은 갈라디아서가 쓰여진 시기가 행15장 이전인가 아니면 이후인가이다. 왜냐하면 행 15장에서는 예루살렘 공외회가 이방인들에게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즉 율법을 행하지 않고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고 선언한 혁명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토마스 R. 슈라이더는 모든 것을 고려했을 때 남갈라디아설이 바람직해 보인다고 말한다.(<강해로 푸는 갈라디어서>디모데) 간추려보면 북갈라디아설은 예루살렘 공의회 이후에 쓴 것이 되고, 남갈라디아설은 공의회 직전이 되는 셈이다.

교회 구성원들

갈라디아 교회 구성원들은 누구일까? 물론 대부분의 초기 이방 신약교회는 대부분이 이방인이고 소수의 기독교 유대인들이었다. 100% 순수한 이방인과 유대인들로 구성된 교회는 존재하지 않았다. 대체로 안디옥 수리아 안디옥은 대부분이 유대인들이었고, 일부만이 이방인들이었다. 하지만 나머지 교회는 대부분이 이방인들이었고, 극소수의 유대인들이 섞인 상태로 존재했다. 로마교회의 경우는 확신할 수는 없으나 유대인들이 약 1/3 정도 차지한 것으로 보인다. 고린도교회의 경우는 90%이상이 고린도 사람들로 구성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갈라디아 교회는 어떻게 되었을까? 일반적인 추론에 의하면 80%이상이 이방인들이거나 더 많을 수도 있다. 즉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극히 적었을 것이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회의 경우는 일반 범주에 넣기에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다. 그것은 갈라디아서가 결코 이방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라는 점이다. 로빈슨은 갈라디아서가 아닌 로마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유대교적이며 구약적이며 랍비적인 배경을 전제하며 그 배경을 전혀 몰랐던 자들로서는 어려울 것이다.”

갈라디아서는 로마서보다 더 유대적이며, 구약적이다. E.P. sanders는 갈라디아서를 이방인 청중에게 가장 어려운 서신라고 말한다. 갈라디아서는 이방인들이 읽어내기 힘든 유대적 맥락에서만 이해할 수 있는 사라와 하갈의 은유를 비롯해, 율법에 대한 포괄적 의미를 다양하게 담아내고 있다. 특히 율법의 기능과 한계를 지적하는 부분에서는 유대인조차도 이해하기 쉽지 않는 신학적 해석이 전제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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