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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의 저주, 호랑이 물어갈 놈

샤마임 2014. 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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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의 저주, 호랑이 물어갈 놈

 

고대의 저주는 현재의 상황에서 이해가 쉽지 않다. 이스라엘 군대와 블레셋 군대가 엘라 골짜기에 항오를 벌이고 기() 싸움을 하고 있었다. 골리앗의 기에 눌린 이스라엘은 누구도 앞으로 나오지 못하고 두려움에 떨었다. 그 때 어린 십대의 다윗이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전장(戰場)에 나왔다. 골리앗의 저주를 듣고 분개한다. 사울에게 청하여 자신이 골리앗을 상대하기로 한다. 사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물매돌과 지팡이만을 의지해 나간다. 이때 골리앗이 어처구니가 없는지 자신을 개 취급한다고 생각하고 저주를 쏟아 붓는다. 골리앗과 다윗이 서로를 향해 저주를 하는데 내용이 다르지 않다. ‘공중의 새와 들짐승에게 준다고 한다.

 

43 블레셋 사람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아왔느냐 하고 그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하고 44 또 이르되 내게로 오라 내가 네 고기를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들에게 주리라 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46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47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삼상 17:343-47)

 

이러한 저주는 고대의 일반적인 저주의 방법이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첫 문장을 인용해 보자.

 

분노를 노래하라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그 무서운 노여움이야말로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아카이아 사람들에게 주고 또 많은 용사들의 씩씩한 영혼을 황천으로 보내며 그 시체를 개와 독수리의 밥이 되게 하였으나 그 동안에도 제우스의 뜻을 이루어져갔다. 무사들의 군주 아가멤논과 용감한 아킬레우스가 처음 다투기 시작하면서부터 오늘에 이루기까지.”

 

호랑이 물어갈 놈

 

어감은 좋지 않으나 그게 무슨 욕이 될까 싶다. 그러나 현대와 고대의 상황은 많이 달랐다. 불과 30년 전만해도 어른 입에서는 호랑이 물어갈 놈이라는 악담을 자주했다. 동물원에서 우리에 갇힌 애완견 같은 호랑이만을 본 요즘 아이들에게 호랑이 물어갈 놈은 농담처럼 들린다. 그러나 개화되기 이전 우리나라는 호랑이나 그와 비슷한 늑대 등이 상당히 많았다고 한다. 시골에서는 호랑이가 내려와 어린 아이들을 물고 가는 일이 종종 일어났다. 사람들은 호랑이가 결코 만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무섭고 공포스러운 존재요 행복과 기쁨을 앗아가 버린 지옥의 사자였다.

 

성경에도 들짐승의 위험을 경고한 곳이 종종 등장한다. 사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이 천천히 정복될 것임을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신명기 7:2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민족들을 네 앞에서 조금씩 쫓아내시리니 너는 그들을 급히 멸하지 말라 들짐승이 번성하여 너를 해할까 하노라

       신명기 32:10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욥기 5:22 너는 멸망과 기근을 비웃으며 들짐승을 두려워하지 말라

       이사야 18:6 산의 독수리들과 땅의 들짐승들에게 던져 주리니 산의 독수리들이 그것으로 여름을 지내며 땅의 들짐승들이 다 그것으로 겨울을 지내리라 하셨음이라

 

호랑이 물어갈 놈은 남 이야기가 아니었다. 평안과 기쁨을 앗아갈 뿐 아니라 생명까지 위협하는 통제 불능의 대상이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고통이고, 조종이 불가능한 공포의 대상이었다. 예상치 못한 시간에 행복과 희망을 일시에 꺾어 버리는 두려움 자체였다. 또한 죽어 시체가 땅에 묻히지 못하고 들짐승에게 먹히는 것만큼 수치스러운 것도 없다. 인간으로서 존귀함이 멸절되는 순간이다.

 

불순종의 상징인 아합과 아내 이세벨을 향한 저주 역시 묻히지 못하고 짐승들에게 먹히는 것이다.

 

       열왕기상 21:23-24

        이세벨에게 대하여도 여호와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개들이 이스르엘 성읍 곁에서 이세벨을 먹을지라 24 아합에게 속한 자로서 성읍에서 죽은 자는 개들이 먹고 들에서 죽은 자는 공중의 새가 먹으리라고 하셨느니라 하니

 

짐승에게 먹히는 저주는 하나님의 언약을 깨뜨린 불순종의 결과다. 하나님의 보호를 얻지 못하고 그들이 먹이가 돼 버린 인간의 말로다. 이러한 저주는 시작은 아담과 하와의 타락이후에 시작된다. 범죄 이전 그들은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줄 만큼 통제 가능한 존재였다. 그러나 불순종은 하나님께로 받은 권위를 상실하고 오히려 위협의 대상이 된다.

 

종말에 화해한다.

 

종말의 때에 사람과 들짐승은 화목하고 적이 아닌 친구로 회복된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 날에 사자들이 어린양과 뛰놀고, 뱀의 구멍에 아이들이 손을 넣어도 물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일은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이 있을 때 일어났다. 노아의 홍수 때에 방주 안에서 동물들은 사람들의 위협이 되지 않았고, 다니엘이 사자 굴에 던져졌을 때 천사가 사자들의 입을 막았다. 기적이라 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보편적 사건은 절대 아니다.

 

스스로 사자의 밥이 되다.

 

초대교회 수많은 사람들이 사자의 먹이가 되었고, 히브리서 11장에 등장하는 믿음의 사람들은 스스로 사자의 먹이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천국의 기대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리스도인은 저주를 자진하여 짊어지는 이들이다 제자도는 주님을 닮음이여 따름이다. 주님은 인류의 저주를 지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가인이 버린 유리하는 저주는 떠안고 이 땅에서 유리하는 자들이 되었듯, 그리스도인은 예수께서 세상의 저주를 안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듯 세상을 저주를 떠안고 산다.

 

저주는 특권이다.

 

갈보리 십자가는 저주이며 축복이듯 그리스도인의 삶도 저주이자 축복이다. 탁월한 유대랍비인 아브라함 헤셀은 고난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이스라엘의 야훼의 고난 받는 종이이었다. 이스라엘의 고뇌 속에서는 모든 민족들이 포함되어있다. 이스라엘의 고통은 형벌이 아니라 특전(特典)이요 희생이다. 고난 받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전례(典禮), 그 의미는 이스라엘이 구원받는 날에 모든 사람에게 드러날 터이다.”(예언자들 중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저주는 복이 되고, 고난은 영광이 된다. 그리스도 바꾸었다. 호랑이 물어갈 놈은 더 이상 욕이 안 된다. 특권이요 자랑이다. 근데 이 말이 내 입에서 떠나지 않는 이유는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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