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역사서의 의미
구약 역사서에서 우리는 여호와가 “역사의 주인”(The Lord of history)이심을 깨닫게 된다. 현상적으로 보면 고대 이스라엘에서도 현재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때도 많이 있었던 것 같다. 이스라엘 안에 부패와 타락이 난무하고, 악인이 번영하는가 하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스라엘이 세상의 열강들 틈에 끼어 “여백의 공동체”의 모습을 간신히 유지하는 것을 보면서 세상은 제국의 황제들이 이끌고 가는 것이며 하나님은 “부재(不在) 지주”에 불과하다는 느낌도 든다.
그러나 이스라엘 역사 전체를 읽어 보면 온 세상을 다스리는 분은 결국 여호와이심을 알 수 있다. 구속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해내시고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으시고 가나안 땅을 선물로 주신 여호와, 자기 백성이 역사적 소명을 감당하지 못하자 이방 나라들을 들어 징계하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징계에도 불구하고 정신 차리지 못하는 그의 백성을 정화시키기 위해 심지어는 가나안 땅에서 내어쫓기까지 하시는 하나님, 그러나 끝내 그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를 동원하여 고토로 그의 백성을 귀환시키는 여호와의 모습을 천년의 파노라마로 그리면서 구약 역사서는 오직 여호와만이 진정한 역사의 주인이심을 생동감 있게 그리고 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이 여호와 하나님이 바로 그리스도를 보내신 성부이심을 확인하며 오늘도 홀로 이 땅을 통치하심을 깨닫고 그 앞에 순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구약 역사서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성이 무엇이며, 그들의 사명과 운명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다. 하나님의 백성은 도덕적으로 탁월하거나, 세속적으로 뛰어나서 선택된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선택된 자들임을 보여준다. 이스라엘의 선택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은 인류와 만물과의 관계 가운데서 이해되어져야 한다.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네가 소경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처한 자를 간에서 나오게 하리라”(사 42:6-7).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성은 바로 이방의 빛으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선택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기에 때로는 역경과 고난이 있을 수가 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모든 백성에게 알리는 수단으로 선택한 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은 이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이 정체성을 망각하고,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할 때 안식의 땅에 들어왔으면서도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모습을 그리면서 하나님의 백성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드러낸다. 선택과 구원의 교리만을 강조한 채 언약의 사명을 잊어버린 이스라엘이 결국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는 비극의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음을 묘사하면서, 언약을 져버린 하나님의 백성의 운명은 끝내 이방의 포로가 될 수밖에 없음을 강력한 웅변으로 제시한다.
구약 역사서가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하나님의 백성은 누구인가를 보여주는 이야기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왜 굳이 과거 역사 이야기를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는지에 대해 묻지 않을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역사라는 틀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성경의 하나님은 역사를 통해서만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며, 둘째,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성은 과거 역사를 기억함으로써만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역사를 통해서만 알려지심
우선 성경의 하나님은 역사를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성경의 하나님은 그 본질(essential being)로 이해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마치 화학 실험실에서 분석을 거쳐 그 성분을 알 수 있는 그런 대상이 아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신 절대적 인격체이시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과의 역사적 체험 가운데서만 자신을 알리시는 분이다. 그 동안 전통적인 조직신학자들은 하나님을 마치 “객체”(It)인 양 인간의 능동적 인식과 분석의 대상으로 취급하는 오류를 범하였다. 그 동안 모든 과학적 사고에는 주체, 객체의 관계가 전제되어 있었다. 따라서 객체를 이해하려고 할 때 주관인 인간은 능동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인간은 심지어 하나님을 생각할 때도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객체로 생각한 것이다. 따라서 마치 하나님이 우리의 인식의 객체가 되는 양 그의 성품을 분석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인격체”(Thou)를 이해할 때는 이런 식으로 해서는 곤란하다. 인격체인 하나님, 그것도 “절대적 주체”(Absolute Thou)인 하나님을 이해할 때는 이런 방식으로는 알 수가 없다. 예를 들어 인격체인 “당신”(Thou)을 이해하려고 할 때는 “나”는 본질적으로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인격체인 당신으로부터 어떤 행동이 나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항상 보편 법칙의 지배를 받는 존재이기에, 특정 상황에서의 행동 양태를 예측할 수가 있는 “그것”(It)과는 달리 “당신”(Thou)은 독특하다. 결국 “나”는 상대방인 “당신”의 행동을 통해 먼저 첫인상을 갖게 되고, 이를 근거로 능동적으로 평가한다. 결국 “내”가 “당신”에게 갖는 지식이라는 것은 수동적인 인상을 먼저 받고 능동적인 평가를 내리는 일을 반복하면서 획득하기 마련이다.
“당신”은 선례가 없고, 예측이 불가능하며, 비교가 불가능한 한 독특한 개인의 특질이기 때문에, 분석이 불가능하다. “당신”은 상호 관계 속에서 감정적으로 체험이 되는 것뿐이다. 결국 “당신”은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를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당신”은 살아 있는 현존이다. “당신”은 내가 능동적인 연구를 통해서 그 특질과 가능성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자신을 드러낼 때야 비로소 알려지는 것이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절대적 자유자”(Absolute Free)요 “절대적 주체”(Absolute Subject)이신 하나님은 우리의 이성적 분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마치 하나님을 인간과의 관계하에서가 아니라 독자적인 객체처럼 분석하는 것은 문제가 많다. 결국 절대적 주체이신 하나님은 역사적 체험 가운데서만 자신을 알리시는 분이시기에, 인간도 그분과의 역사적 체험을 통하지 않고는 알 수가 없다. 결국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인식모드(prime mode of epistemology for the Bible)는 역사이다. 다른 종교에서는 내적 성찰이나 자연을 통해 신을 파악하려고 하나, 성경에서는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알 수가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역사 안에서 그의 언약 백성을 위해 어떤 구원의 행위, 어떤 심판의 행위를 하셨는지 살펴보아야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이해할 수가 있다. 결국 구약의 목적은 성령의 영감으로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올바로 기술함으로써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게 하는데 목적이 있다. 따라서 역사라는 양식을 사용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역사 기억은 정체성 확립 수단
역사 이야기는 한 공동체의 자기 정체성(self-identity)을 확립하는 유일한 수단이기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이 역사를 통해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도록 의도하셨다. 자신의 과거 역사를 잃어버리는 “기억 상실증”(amnesia) 환자들은 자기 정체성을 상실한다고 한다. 기억 상실증 환자는 “의식”이나 “지능을 상실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memory)을 상실하는 병이다. 의식과 지능이 있음에도 기억을 상실함으로써 자기 정체성을 상실케 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과거 "기억”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절실하게 보여준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할 때 정체성은 상실되기 마련이다.
사실상 한 사람이나 민족의 과거의 이야기는 그 사람과 그 민족의 정체성을 형성한다. 우리 각자에게 있어서 우리만의 독특한 스토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만의 독특한 정체를 의미한다. “나”라는 정체성은 “나의 체험, 다른 이들과의 관계, 나의 선택, 나의 행동, 이런 것들에 대한 나의 반응”을 포함해서 나의 과거의 역사와는 불가분과의 관계에 있다. 이런 과거이 역사에 의해 내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공동체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기억과 정체성의 관계에 의해 조지 스트룹(George Stroup)은 이렇게 말한다. “공동 기억을 통해서 공동체는 형성한다. 공동 기억 속에서 과거에 대한 기억과 해석이 들어 있다.”
각 민족은 이야기들을 통해 과거를 기억하며, 이야기들을 통해 각 민족의 정체성을 표현하며, 그 이야기들을 자녀들이나 다른 이들에게 전함으로써 그들이 그 이야기들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 이야기들에서 자신의 정체성, 혹은 새로운 정체성을 찾도록 한다. 따라서 과거를 역사로 보존하고 기억하려고 애를 쓰는 것이다. 우리는 소련군의 추모제 이야기를 통해서 기억이 정체성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를 알 수가 있다.
“1997년 2월 9일 오후 3시, 러시아 태평양 사령부 소송 1만 1천 5백 60톤급 순양함 바랴그 호(사령관 치로코프 중장)가 인천항에 입항하였다. 해군 장병 5백 10명을 태우고 온 바랴그 호는 인천항 입항에 앞서 부근 팔미도 앞 해상에서 러일 전쟁 당시 침몰한 같은 이름의 러시아 군함에 대한 해상 추모제를 지냈다고 한다.
일본이 선전 포고도 없이 기습으로 러일 전쟁을 유발한 것이 1904년 2월 9일 정오 인천 팔미도 앞바다에서였다고 한다. 일본군의 함포 사역으로 러시아 순양함 바랴그 호는 함상에 있던 41명의 장병들의 목숨과 함께 수장되고 말았다. 4척의 일본 군함이 인천항으로 숨어들던 2월 9일 전야 바랴그 호 선장 루드네프 대령은 참모들과 인천의 일본 요정 일산에서 일본 기생들과 술을 마치고 춤을 추고 있었다고 한다. 일본군 활동을 감시하기 위해 인천에 닻을 내리고 있던 바랴그 호는 이토록 천하태평이었다가 그만 일본군의 함포 사격에 제대로 대항도 못하고 침몰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바랴그 호의 93회 제삿날인 9일날 그 함정 이름을 계승한 손자 순양함 바랴그 호가 팔미도 해상을 찾아와 침몰한 시간에 맞추어 추도제를 올린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배의 이름을 대대로 물릴 뿐 아니라, 치욕의 패배임에도 불구하고 배의 제삿날을 기억하고 찾아온 러시안 군인들의 모습에서 기억이 최대의 교육임을 알 수가 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수많은 민족들로 이루어진 신약 교회 신자들이 이 구약 역사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으로 재형성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구약된 기록된 이야기를 자기의 이야기로 받아들이고, 그 세계 속으로 들어와서 살도록 우리를 초청하고 있다.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신 것과, 우리가 그의 부르심을 받고 이 땅에 거룩한 백성으로 살도록 보냄을 받았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고 살도록 우리에게 구약 역사서를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무오한 계시”로 주신 것이다.
<요단강에서 바벨론 물가까지>(김지찬/생명의 말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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