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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고전읽기] 어거스틴 <행복론 De Beata Vita>

샤마임 2017. 1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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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고전 읽기]

<행복론 De Beata Vita>

어거스틴 / 성염 역주 / 분도출판사

*이 글은 마이트웰브에 기고한 글입니다.



1. 집필 시기와 배경


어거스틴의 생애 중 가장 평안했던 시기는 회심 직후였습니다. 386년 즈음에 로마의 수도였던 밀라노의 카시키아쿰이란 작은 시골에서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과 철학하는 것에 대해 토론하며 시간을 보냅니다. 이 시기는 어거스틴이 신앙을 가지고 있지만 기독교에 대한 바르고 깊은 지식을 소유하지 못한 때입니다. 하지만 어머니 모니카의 영향으로 기독교에 대해 완전히 무지하지는 않았습니다. 또한 회심 전 몇 년동안 마니교 등에 빠져 지내면서 유사 기독교 영향을 받았습니다. 또한 이단들과 기독교를 비교하며 공부하는 과정 속에서 기독교 사상을 가지게 됩니다. 이러한 어거스틴의 여정은 앞으로 주교가 되어 탁월한 논문과 신앙적 사색을 담어낸 책들을 펴내는 학문적인 자양분이 되어 줍니다. 본서는 회심 이후 문화생들과 나눈 대화을 책으로 엮은 것입니다. 첫 번째 대화집은 <아카데미학파 반박>이고, <행복한 삶>은 두 번째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책은 <행복한 삶>의 후속집인 <질서론>이 있습니다.

 

<고백록>을 비롯해, <신국론>의 기저에는 행복에 대한 깊은 갈망이 담겨 있습니다. 특히 <자유 의지론> 속에도 인간은 행복하기를 원한다는 전제를 담았습니다. <행복론>은 이러한 행복에 대한 어거스틴의 집요한 열정이라고 해야 옳을 것 같습니다. 이 책은 행복을 갈망하는 인간의 보편적 성향에서 출발하여 행복은 지혜를 얻음으로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신플라톤주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은 어거스틴에게 철학은 진리는 아니나 진리에 준하는 것으로 여깁니다. ‘이해하기 위해서 믿는다는 어거스틴의 명제는 신앙과 이성(철학)이 뗄 수 없는 관계임을 말합니다. 어거스틴은 <재론고>에서 세 책의 저작 시기를 이렇게 말합니다.

 

행복한 삶에 관한 서책을 집필한 것은 아카데미아학파 반박에 관한 서책 집필 다음이 아니라 그 책과 교차적으로 집필하였다.”

 

이 책은 제자들과 나눈 이야기지만, 책은 가족들과 친구들을 등장시켜 나눈 이야기로 다시 풀어냅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중요한 인물들은 어머니 모니카, 아우 나비기우스, 제자 트리케티우스, 제자 리켄티우스, 사촌 라르티디아누스와 루스티스, 그리고 아들 아데오다투스입니다. 실제로 아들과 다눈 대화는 <교사론 De Magistro>으로 정리하여 출간됩니다.

 

2. 구조와 내용

 

먼저 이 책은 만리우스 테오도루스에게 헌정된 책입니다. 글을 시작하면 어거스틴은 테오두스에게 삶을 이끄는 것은 운인지 신의 섭리인지 이야기합니다. 어거스틴은 인생을 바다로 비유하고, 행운은 역풍의 모습이나 순풍이고, 욕망은 파도와 같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순풍을 원합니다. 그러나 순풍은 인간을 절대 행복의 포구로 이끌지 못합니다. 역풍이나 폭풍은 억지로라도 우리를 휘어잡고서 어딘지도 모른 채 떠도는 우리를, 우리 의사와는 정반대 방향으로 끌어당겨서’(41) 행복한 곳으로 끌고 갑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폭풍을 역풍(불행)으로 보는 오류를 범합니다. 그러나 자신들을 불행이 도사린 큰 바다로 데려가는데 정작 본인들은 그것을 순풍’(41)으로 여깁니다.

 

사람들은 행복을 찾아 갑니다. 그런데 그 항구 앞에 거대한 산’(45)이 있습니다. 그 산은 사람들을 유혹하여 삼키고 맙니다. 사람은 행복을 찾지만 찾지 못하고 유랑하게 됩니다. 113일은 어거스틴의 생일입니다. 그는 몇몇 사람들과 가족들을 초대합니다. 그리고 뒷부분은 서로의 생각을 풀어놓는 향연이 시작됩니다. ‘우리는 육체와 영혼으로 합성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육신은 음식을 먹지 않으면 영양 결핍 상태에 이르고 죽습니다. 그렇다면 영혼은 어떨까? ‘영혼의 먹이가 지식’(61)은 아닐까? 정신의 양식도 좋은 음식이 있고, 해로운 음식이 있습니다. 영혼이 병들면 음식마저 마다하고 거부하는 법’(65)입니다. 결국 사람이 행복해 지려면 좋은 것을 먹어야합니다. 행복은 갈망하는 것이며, 충만해지기를 갈망하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만족행복이라는 것에 도달합니다.

 

어거스틴은 여기서 하나님을 찾는 자는 행복하다는 명제를 끌어냅니다. 하나님을 찾는 자는 하나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찾는 모든 자가 행복하지는 않습니다. 다시 그 원인을 파헤치기 위해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 자가 왜 모두 행복하지 않는가로 넘어갑니다. 어거스틴은 여기에 너그러운을 첨가하여 너그러우신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95)으로 규정합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사람의 힘으로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 중에도 악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은 누구입니까? 만약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면 그는 부정한 영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찾는다고 하지만 하나님을 모시지 못한 사람’(93)이 있다.

 

인간이 행복이 충만에 있으며, 무엇인가를 갈망한다는 것은 결핍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결핍을 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육체가 아닌 정신의 결핍을 해결해야 합니다. ‘행복한 삶은 그 정신에 자리 잡고 있’(105)기 때문입니다. 정신이 빈궁한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고, 불행한 사람은 정신이 빈궁한 사람입니다. 그 빈궁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합니다.

 

정신의 빈궁, 그것은 어리석음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그것은 지혜의 상반되고, 죽음이 생명에 상반되고, 행복한 삶이 불행에 상반되듯이 중간의 무엇이 없다.”(115)

 

정신의 빈궁은 결국 어리석음이며, 지혜가 없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며, 불행한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빈궁의 반대는 충만이며, 충만은 곧 지혜의 충만’(125)입니다. 그럼 지혜란 무엇인가? 우리는 다시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거스틴은 최고선까지 이끌고 갑니다.

 

지혜를 말하자면 하나님의 지혜가 아니고 무엇을 얘기하겠는가?”(129)

 

하나님의 지혜는 곧 믿음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들을 받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며, 그가 곧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진리다.’(131)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모시는 것은 하나님을 향유하는 것’(131)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충만을 줄 수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마지막에 하나님께 감사하면 대화를 마칩니다. 결국 진정한 행복이란 하나님을 찾아 가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찾는다는 말은 하나님을 모시고 있다는 말이며, 자신 안에 의로움이 있다는 말입니다.

 

나가면서

 

이 책의 목적은 행복을 찾는 것이지만, 그 행복은 마음과 영혼의 충만을 주시는 유일한 분,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영혼의 굶주림을 해결하시고, 마음의 빈궁함을 채우시는 분입니다. 행복한 사람은 그러한 하나님을 맛보고 쉬지 않고 하나님을 갈구하게’(133) 됩니다. 예수님은 의에 목마른 사람들이 배부를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의는 곧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외부적 의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향유하며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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