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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고전 읽기] 14. 어거스틴 <그리스도교 교양>

샤마임 2017. 10.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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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고전 읽기] 

14. 어거스틴 <그리스도교 교양>

아우구스티누스 / 성염 역주

*이 글은 마이트웰브에 기고한 글입니다.


1. 시대적 배경과 저작 동기

어거스틴, 우리는 그 이름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위대한지를 압니다. 우리는 종종 그의 <고백록>만을 그의 전부로 생각하지만, 어거스틴은 방대한 지식과 사상을 가진 다작가였습니다. 초대교회의 모든 사상을 모았던 기독교 사상의 저수지와 같았고, 그 후의 기독교는 어거스틴에게서 흘러나온 수많은 사상의 생수를 마시고 응용했다고 할 만큼 탁월한 학자였습니다. 시대적 한계로 인해 몇 가지의 오해나 오류가 있었지만 그는 여전히 철학과 기독교 사상의 원류와 같습니다. 어떤 학자는 기독교 사상은 어거스틴에게서 시작하고, 어거스틴을 통해 시작하여, 어거스틴에게로 돌아간다는 말까지 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알아본 어거스틴의 저작들은 결코 가벼운 책들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아직 어거스틴을 다 보여주기에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고백록> 외에도 <자유의지론><하나님의 도성>은 반드시 읽어야 할 대작입니다. 오늘 함께 읽을 <그리스도교 교양> 역시 어거스틴의 천재성을 보여주는 책이며, 후대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책 중의 하나입니다.

어거스틴이 살았던 4.5세기의 로마는 그야말로 요동치는 시대였습니다. 영원한 도성처럼 보이던 로마가 순식간에 멸망해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로마가 기독교화되어 망한다는 억설을 내놓자 <하나님의 도성>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나라가 어떤 것인지 철학적으로 증명해 보였습니다. 교회 내외부에서 어지럽히던 악의 기원에 대해 <자유의지론>을 통해 탐욕에 굴복한 인간의 의지에서 악이 시작되었다고 선언합니다. 이러한 어거스틴의 주장들은 어거스틴이 걸어왔던 삶의 굴곡과 아픈 경험이 만들어낸 것들입니다. 어쩌면 그의 천재성이라는 것은 자신이 아닌 교회를 보존하고 세우기 위한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요.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이 책 <그리스도교 교양>은 우리가 알고 있는 교양이 아니라 성경을 어떻게 주해하고 해석할 것인가를 다루는 책입니다.

어거스틴 당시 성경은 신약이 이미 완성되었고,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은 문자 하나 더하거나 뺄 수 없는 거룩한 것이기에 문자적으로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성경 엄숙주의가 팽배해있었습니다. 이러한 성경 엄숙주의는 말시온과 같은 이단에 대한 반작용이기도 하며, 분파주의로 인해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들이 일어나자 교회는 성경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자신들도 모르게 그러한 엄숙주의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성경 엄숙주의는 성경은 단편적으로 보게 만들었고, 성경 속 모순들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를 전혀 고민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병폐가 되고 말았습니다. 한쪽에서는 과도한 성경 해석을, 다른 한쪽에서는 해석이 불가능한 엄숙주의를 표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것이 바른 성경 해석이고,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기 위해 글을 적기 시작했습니다.

2. 어거스틴의 성경 해석학

초대교회 가운데 행해졌던 성경 해석학은 두 가지의 큰 흐름을 갖고 있습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로 불리는 클레멘트와 오리겐 등은 풍유적 해석(allegory)를 따랐고, 이들에 반대하여 일어나 안디옥 학파는 모형론(typology)을 주장합니다. 두 관점이 연대적으로 발생했다기보다는 초기의 해석은 풍유적 해석이 주도했고, 4세기 이후에는 모형론이 대세를 이루었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풍유적 해석은 전체적인 줄거리나 흐름보다는 문자에 숨겨진 이중적 의미를 찾는 해석법입니다. 예를 들어 새를 악마나, 천사, 또는 거짓 선지자 등으로 해석하는 경우입니디. 이러한 해석법은 아직도 이단에서 성행하는 해석법으로 ㅅㅊㅈ라는 이단에서 주로 이용하는 해석입니다. 뭔가 신비로운 뜻이 있다고 믿고, 그러한 의미를 파악하고 이해하는 사람들을 영적인 사람으로 몰아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에 비해 안디옥 학파가 주장한 모형론은 역문화와 문법, 역사적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을 말합니다. 3세기 이전의 교부들의 성경 해석이 풍유적이었다면 4세기 이후와 종교개혁자들의 성경 해석은 모형론에 가까운 성경 해석법을 사용했습니다. 그럼 어거스틴은 어떤 성경 해석법을 사용했을까요? 어거스틴의 생각한 성경론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기록된 책이다.

영감론에 대한 적지 않은 논쟁이 있지만 교부들에게 영감은 거의 신적에 가까운 것이었고, 문자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다 보니 초기의 교부들은 성경의 문자를 비평하지 못하고 문자 이면의 또 다른 뜻을 찾으려했던 풍유적 해석법을 추구했습니다. 어거스틴의 성경 해석에도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풍유적 해석이 들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신앙의 규범과 생활의 규칙이 들어가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을 창조한 원리이며, 지혜이자 규칙입니다. 또한 생명이기 때문에 말씀의 원리를 따라 살고, 명백히 드러난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 맞다고 보았습니다.

*성경은 신약과 구약이 분리될 수 없다.

어거스틴의 유명한 명제, ‘신약은 구약 속에 감추어져 있고, 구약은 신약 속에서 드러난다(Novum Testamentum in Vetere latet, Vetus in Novo patet)’는 신약과 구약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 같은 책이며, 하나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만약 구약을 모두 문자적으로 받아야 한다면 구약 속의 법칙들, 예를 들어 돼지고기 금지나 성전 제사 등은 어떻게 풀어야 하느냐가 발생합니다. 바로 여기서 어거스틴의 통찰이 드러납니다.

*성경은 성경이 해석해야 한다.

즉 구약은 신약이 해석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히브리서나 갈라디아서는 구약의 제사법이 무엇인지를 명백하게 드러내 줍니다. 그렇다면 성경에 의해 성경이 해석되므로 성경이 해석하는 원리를 따라야 한다는 큰 원칙을 세우게 됩니다. 이러한 해석법은 종교개혁자들의 성경 해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고, 성경의 통일성에 기여를 하게 됩니다. 즉 성경을 해석할 때, 모호한 해석은 분명히 드러난 구절로 해석해야 하고, 일부의 난제들은 성경의 전체가 갖는 의미와 관점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어거스틴은 이러한 해석법을 당시 논쟁의 대상이었던 도나투스파 신학자인 티코니우스의 일곱 가지 성경 해석 규칙을 빌려와 설명합니다.

어거스틴의 이러한 성경해석은 풍유적 해석에 치중되었던 성경 해석을 바로잡고, 안디옥 학파의 역사적이고 모형론적인 성경 해석에 힘을 실어 주면서도 풍유적 해석을 버리지 않게 했습니다. 동방교회 교부인 오리겐(Origen)이 문자적(literal), 도덕적(moral), 그리고 우의적(allegorical)이라는 3중적인 성경 해석법을 수정 보완하였습니다. 어거스틴은 역사적(historical) 혹은 문자적(literal), 우의적(allegorical), 도덕적(tropological), 그리고 영적(anagogical) 의미로 정리하여 4중적인 성경 해석법을 내어 놓습니다. 어거스틴의 4가지 관점의 성경 해석은 중세 성서 해석학의 대원리가 되고, 종교개혁자들이 성경을 해석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게 됩니다. 루터나 어거스틴이 초대교회라는 언급이 일차적으로 어거스틴이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의 권위는 충분히 증명된 셈입니다. 이제 책의 줄거리를 개략적으로 요약하며 어거스틴의 성경 해석학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3. 책의 구조와 내용

이 책은 서론과 4권으로 이루어진 적지 않은 책입니다. 서문에서는 이 책을 쓰게 된 동기와 이 책을 비방하는 사람들에 대한 답변으로 채워집니다. 1권에서는 신론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성경 해석이라기보다는 하나님과 교회, 피조물의 속성들을 이야기하며, 어떻게 성경을 해석할 것인가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합니다. 2권부터 4권까지는 성경 해석의 실용적 방법들을 다룹니다. <고백록>을 쓸 때 이 책을 쓰기 시작했지만 중간 두 번 정도 잊혀집니다. 그러다 다시 일부를 첨가하는 방식으로 써 내려가다 생의 말년이 돼서야 4권을 완성하여 마무리합니다. 그러다 보니 1권과 4권의 차이는 적지 않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재고론에 의하면 1.2.권과 3권의 절반 정도는 초기에 기록된 것이고, 3권의 후반부와 마지막 4권은 생의 말년에 기록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3권의 전반과 후반은 약 15년 정도의 간극이 존재하고, 나머지 4권은 427년에 완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필자는 연대와 주제로 구분하기 보다 매 권에 나타난 주장들을 요약정리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서론

서론은 말 그대로 이 책의 서론에 해당되며, 성경을 이해하도록 돕는 책이 필요한가를 묻습니다. 세 부류의 사람들을 예로 들며 이 책의 부당함을 반박합니다. 두 부류는 이 책은 어려워 알아듣기 힘들고 굳이 필요하지 않다는 주장입니다. 이에 대해 어거스틴은 자신의 책을 초승달을 가리키는 자신의 손이라고 소개합니다.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면서 초승달을 가리키고 있는 자신을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합니다. 세 번째 부류는 성경의 숨은 진리는 신적인 선물’(61)로 만 알 수 있으니 이 책은 필요 없다고 말합니다. 어거스틴 교만한 그들을 향하여 사람에게서 배워야 할 것은 오만을 부리지 말고 배우’(65)라고 충고합니다. 왜냐하면 삼층천을 다녀오고 다메섹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 바울도 사람에게 보냄을 받아 성사들을 받고 교회에 입교하게 되었음을 상기 시켜줍니다. 사람에게 배우는 것은 나쁜 것도 아니고 어리석은 것은 더더욱 아니라고 말합니다.

1

본론으로 들어가는 1권을 시작하며 두 가지 방법을 언급합니다. 하나는 깨달은 바를 파악하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깨달은 바를 전달하는 방법입니다. 이 두 가지는 앞으로 전개될 책의 전체 흐름입니다. 1.2.3권에서는 첫 번째 방법인 깨달은 바를 파악하는 방법이고, 마지막 4권은 깨달은 바를 전달하는 방법에 해당됩니다. 아마도 파악하는데 중점을 두고 전달하는 방법에서 한 권으로 마무리 짓는 것은 어거스틴의 노년에 책을 세밀하게 완성하기에 힘이 부쳤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1권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향유사랑입니다. 1권 마지막에서 어거스틴은 인간이 진정으로 향유(享有)할 대상은 하나님 한 분뿐이라고 말하고, 사랑이야말로 성경의 완성이며, 성경 해석의 기준이라고 말합니다. 즉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먼저 사물을 향유하기 위한 것과 사용하기 위한 것, 그리고 향유하고 사용하기 위한 것’(77)으로 구분합니다. ‘향유(frui)' 하기 위한 것은 우리를 행복하게하지만, ‘사용하기 위한 것은 행복을 추구하게 만들기 위해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용하기 위한 것을 향유할 때 우리 갈 길이 막히고 때로는 비뚤어진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향유해야 할 것(res)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그리고 동일한 삼위일체’(81)이십니다. 향유될 수 없는 하나님은 성육신 사건을 통해 항유될 수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말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시는 길 말고 달리 오실 수 있겠는가?”(91)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시며, 교회를 세웠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며, ‘배필’(95)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계명의 목표는 사랑’(111)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향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향유하지 않고 사용합니다. 인간이 하나님 안에서 인간을 사랑할 때(이웃 사랑) ‘인간보다는 하나님을 향유하는 것’(125)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인간을 바르게 사용(res)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른 사용과 바른 향유, 바른 사랑에 근거한다면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성경 해석을 하게 될 것입니다.

2-3

1권이 성경 해석학의 전제에 해당된다면 2.3권은 실제에 해당됩니다. 1권에서 사물에 대한 바르지 못한 사용으로 우상 숭배에 빠지는 것을 경고한 것을 2권에서는 사물이 무엇을 의미하며,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지를 다룹니다. 3권에서는 2권의 연장으로서 사물을 해석하는 언어 속에 담긴 함의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를 다룹니다. 3권에서 특이한 점은 자신의 논적 도나투스파의 학자였던 티코니우스의 <규칙석(Liber regularum)>을 거의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옮겨와 소개합니다. 현대의 해석학 관점에서는 황당스러운 규칙들이 당시에는 상당히 유효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한 이것은 문자주의에 집착했던 도나투스파와 어거스틴의 성향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만합니다.

사물은 표지입니다. 그것은 실체가 아닌 흔적입니다. 마치 동물이 지나간 발자국’(141)과 같은 것입니다. 표지는 먼저 자연적 표지약정적 표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자연적 표지는 연기가 불의 의미하는 것과 같고, 약정적 표지는 동물들이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드러내기 위해 서로 주고받는 것을 말합니다.(143) 표지 중에서 으뜸은 언어입니다. 문자는 언어를 기록한 것입니다. 성경 해석학은 성경의 언어를 해석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마음을 기록한 것이 성경이며, 이것을 해석하는 것이 학자의 일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성경을 쓴 사람들의 생각과 뜻을 발견하기 바라며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자’(147)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이 가장 큰 선물입니다.

표지는 다시 고유한 표지전의적 표지’(163)로 나뉩니다. ‘라는 단어는 사물의 를 나타내는 데 이것이 고유한 표지이고, ‘고유한 단어로 우리가 지칭하는 사물이 그것과 다른 것을 표시하는 데 사용되면 전의적 표지’(163)라고 합니다. 고유한 표지를 알려면 단어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아야 하고, 전의적 표지는 단어의 숨겨진 의미와 함축적인 뜻을 알 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즉 뱀처럼 지혜로워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등의 뜻은 단어와 문장이 의미하는 바를 정확히 알 때 바르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바로 이 부분에서 성경의 단어의 숨겨진 뜻과 숫자 등을 중요하게 다루며 나아갑니다. 결국 이것은 후대에 어거스틴의 해석학을 부정적으로 만든 것 중의 하나입니다.

3권에서는 좀 더 실용적 실례를 듭니다. 낱말을 끊어 읽기, 발음에서 모호함, 문맥으로 해석할 때 분명해집니다. 등의 방법들을 열거합니다. 또한 마리아의 향유 옥합을 깨뜨린 사건을 예로 들며 그 장소와 때와 인물에게 무엇이 적합한지 면밀하게 살펴’(287)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곳에서 중요한 성경의 해석 원리인 더 분명하게 쓰인 곳이 있을 때는, 모호한 문장에서 쓰인 경우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 배워야 한다’(313)고 조언합니다.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하는 방법입니다. 후반부는 도나투스파의 티코니우스의 7가지 성경 주해 방법을 소개하는 것으로 마무리합니다. 티코니우스의 해석학은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리 추천할 바가 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4

4권은 서두에서 밝힌 대로 실천 편입니다. 1-3권이 성경을 파악하는 방법을 논했다면 4권에서는 성경을 전달하는 방법을 논합니다. 어거스틴의 설교학교본으로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입니다. 더욱이 4권은 <재고론>이 완성되던 생의 말년에 기록된 것이기에 주교로서 오랜 경험의 결과라 할 만합니다. 그럼 어거스틴이 말하는 설교 잘하는 법은 무엇일까요?

먼저 설교자는 교사 이어야 합니다. 교사는 선한 것을 가르쳐야 함은 물론 악한 것도 깨우쳐 주어야 할 것’(365)입니다. 또한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해시키고 태만한 사람들을 분발시키고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과 (장차) 무엇에 기대를 가져야 하는지를 알려 주어야 합니다. 설교자는 또한 성경을 읽으나 존중하지 않는 사람이 되거나, 읽고 암기하나 이해하는 데는 등한히 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369)

둘째, 설교자는 성경의 모호함을 따라서는 안 됩니다. 전의적 표지를 주장하는 어거스틴에게 모호하고 난해한 구절들은 신중하게 해석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설교자가 자신도 모르면서 마치 자신의 해설이 ‘(성경의 저자들의 것과) 흡사한 권위가 있는 것처럼 내세우지 말아야 한다.’(397)고 말합니다. 어설프고 교만한 설교자들이 종종 아무도 모르는 무엇을 자신만 해석했다고 하는 실수를 저지르는데 이것은 설교자가 피해야 할 것 중의 하나입니다.

셋째, 설교자는 명료하게 가르쳐야 합니다. 자신만이 아는 방법으로 가르치거나 발언이 시원치 않아 청중이 못 알아듣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설교자는 잘 가르치는 것이 목적이지 자신의 실력이나 언변 능력을 뽐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설교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면 말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401)

넷째, 설교의 목적은 삶으로 실천되어야 합니다. ‘믿고 아는 것으로 그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먼저는 논리적으로 설득해야 하겠지만, 설득은 삶을 통해 증명되어야 합니다. 어거스틴의 말을 빌리면 실행에 옮겨야 할 바를 설득할 때는 감화를 주어 가르치고 관심을 끌어 상대를 매료시키는 것만으로 안되고, ‘설득하여 정복해야만합니다.(411)

다섯째, 설교자는 설교전에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와 우리의 하는 말이 다 그분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417) 겸손한 설교자는 기도합니다. 사람은 달변으로 감동받을 수 있으나 성령만이 영혼을 각성시키고 변화시킬 수 있음을 압니다.

여섯째, 마지막으로 설교자는 삶이 따라야 합니다. 설교자는 삶에서 설교가 시작되고 마무리됩니다. 어거스틴은 누군가를 설득할 때 어조의 장중함보다는 말하는 사람의 삶이 훨씬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말합니다.(477)

4 나가면서

어거스틴의 성경 해석학과 설교론은 현대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당시만 해도 참고할 책도 드물었고, 지금처럼 단권으로 된 성경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어거스틴은 그동안 불필요하게 부풀려졌던 풍유적 해석을 수정하였고, 역사적이고 모형론적인 안디옥 학파의 설교론을 자신의 것으로 첨가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어거스틴의 위대함은 설교자가 설교자로 서기 전, 하나님을 향유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을 권고합니다. 그가 인용했던 티코니우스처럼 전달에게 함몰되지 않고, 전달자인 설교자의 삶과 경건, 기도와 언변의 훈련 등을 충분히 고려해야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설교 카피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힘으로 노력하지 않고 남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을 넘어 설교자를 세우신 하나님을 모욕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은 다른 교회가 아니라 그 교회와 그 성도들에게설교자를 보냈습니다. 진리가 보편적이기는 하지만 일상과 상황이라는 삶의 맥락을 고려하여 선포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을 통해 설교자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는 악한 설교자입니다. 설교의 방식에만 몰두하는 이 시대에 설교자 자신이 먼저 경건에 힘쓰고, 성경을 해석하는데 최선을 다하라는 어거스틴의 충고는 2천 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현대의 설교자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설교자뿐 아니라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실천하는데 헌신해야 합니다. 귀로 듣는 설교보다 삶으로 듣는 설교가 더욱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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