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고전읽기] 안셀무스의 생애와 사상
[기독교 고전읽기]
안셀무스의 생애와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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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면서
안셀무스는 영어식으로 안셀름으로 기독교인들에게는 익숙한 이름입니다. 이곳에서는 라틴식 이름인 안셀무스로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지난 세 차례에 걸쳐 중세의 가장 핵심적인 인물인 토마스 아퀴나스의 생애와 철학, 신학에 관련된 글을 살폈습니다. 쉽고 간략하지만 아퀴나스의 신앙을 살펴볼 수 있는 <사도신경 강해>를 먼저 읽었습니다. 그다음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 사상을 엿볼 수 있는 <자연의 원리들>을 살폈습니다. 마지막으로 <신앙의 근거들>에서는 철학과 신학이 어우러진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시대는 중세 중의 중세라 할 만한 13세기 인물이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앙서들은 개신교의 기독교인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연옥설과 성인 숭배 사상은 그 시대 가톨릭의 정서를 그대로 반영하는 교리입니다. 현대의 눈으로 볼 때 아퀴나스의 주장들은 얼토당토않았지만, 그러한 주장은 초대교회로부터 자연스럽게 발전해온 것들입니다. 아퀴나스 직전에 다루었던 그레고리 1세는 중세를 여는 최초의 교황이었습니다. 그가 쓴 <베네딕도 전기>를 통해 신화적 요소들이 다분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후 500년 후의 사람인 토마스 아퀴나스에 이르서는 완연한 중세적 신학을 발견합니다. 신학자가 탁월하다 해도 홀로 모든 것을 이루지는 못합니다. 전 세대의 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토대 위에 서서 조금씩 증보하고 개정하며, 반론하고 체계화 시켜 만들어 갑니다. 후에 살펴볼 종교개혁자들의 신학도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타락한 중세 신학을 개혁하려고 했던 신학자들의 토대 위에 쌓여진 결과물입니다.
오늘은 토마스 아퀴나스보다 200년 앞선 인물인 안셀무스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신존재 증명으로 알려진 안셀무스의 주 저서인 <프로슬로기온(Proslogion)>을 보려고 했지만 먼저 그의 생애와 사상을 간략하게 살펴 보겠습니다. 다음에 <모놀로기온(Monologion)>를 살피고 그 다음에 <프로슬로기온(Proslogion)>을 살펴볼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인간이 되신 하나님>을 살펴 본다면 안셀무스의 신학의 특징들을 엿볼 수 있을 것입니다.
2. 안셀무스의 간략한 생애
안셀무스는 1033(4)에 태어나 1109년 4월 21일 숨을 거둡니다. 안셀무스가 살았던 시대는 중세가 무르익어 있던 시대였고, 교회가 극도로 타락했던 시기입니다. 신학자이면서 철학자였던 그는 이성을 통해 하나님을 증명하려 했던 스콜라 철학을 탄생시킨 인물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와 비교할 때 안셀무스가 좀 더 신학적이라면 토마스 아퀴나스는 좀 더 철학적입니다.
안셀무스는 1033년 아오스타에서 지방에서 아버지 곤돌포(Gondulfo)와 어머니 에르멘베르가(Ermenberga) 태어납니다. 에르멘베르가의 귀족 가문이었지만 다른 가문에 비해 그리 부유한 집은 아니었습니다. 가문 대대로 선행을 베풀고 자선에 힘을 쏟았다고 합니다. 세속적 성향을 가진 아버지에 비해 안셀무스는 경건한 어미니의 영향을 받아 어린 시절부터 경건한 삶을 유지했고,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가졌다고 전해집니다. 불행하게 어머니는 안셀무스가 청년이 되기 전에 죽습니다. 그 후 아버지와 불화하면서 23살이 되던 해 고향인 아오스타를 떠나게 됩니다.
1059년 고향을 떠난 뒤 3년의 유랑을 마치고 1059년 노르망디에 위치한 베네딕트파 수도원인 베크에 입문합니다. 당시 그곳에는 랑프랑이란 유명한 수도원장이 있었습니다. 당시 랑프랑은 성서와 교부들의 가르침에서 영적인 통찰을 얻었고, 문법과 변증을 신학에 접목하려 했던 탁월한 학자였습니다. 랑프랑의 영향을 받은 안셀무스는 이성을 통해 교리를 증명하려는 스콜라 철학을 그의 신학은 언제나 ‘나는 믿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이해한다’(Credo ut intelligam)는 토대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믿을 수 있다.(intellego ut credam)’고 말함으로 ‘나는 이해하기 위해 믿는다’(crede, ut intelligas)고 말한 어거스틴과는 시작이 다릅니다.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믿음과 이성’의 관계라면 안셀무스는 ‘이성과 믿음’의 관계로 순서를 바꾸어 놓은 것이다. 안셀무스와 그로 인해 시작되는 스콜라 신학이 가진 특징들을 통해 중세의 신학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사망하는 안셀무스는 백작의 지위를 물려받게 됩니다. 그러나 백작의 지위 대신 베크 수도원의 수도승의 길을 선택합니다.(1060년) 3년 후인 1063년 수도원장이던 랑프랑이 까앵의 대 수도원장으로 자리를 비우자 베크 수도원의 창설자인 헤르루이누스가 원장이 되고 안셀무스는 부원장으로 섬기게 됩니다. 1079년에는 수도원장이 되어 수도 학교를 운영합니다. 수도원장으로 있던 마지막 삼 년 동안 그의 가장 유명한 책인 <모놀로기온>과 <프로슬로기온>이 탄생합니다. 그 외에도 다양한 저술활동을 통해 논문을 남기게 됩니다. 요한복음 14:6을 중심으로 저술한 <진리에 관하여> <자유의지에 관하여> <악의 원인에 대하여> 등이 있습니다. 수도원장이 되던 1079년 영국을 여행하면서 1070년 캔터베리 대주교로 있던 랑프랑을 만납니다. 1092년 두 번째 방문하며 친목을 다집니다. 수도원을 설립하기 위해 영국에 머물던 때에 중병에 걸린 윌리엄 Ⅱ가 안셀무스를 캔터베리 대 주교로 지명합니다. 그러나 윌리엄 Ⅱ는 안셀무스를 대주교로 승인하는 과정 속에서 안셀무스와 대립하게 됩니다. 교회 개혁의 문제로 다시 왕과 대립하면서 로마로 여행하게 됩니다. 1098년 4월 로마에 도착하여 교황의 융숭한 대접을 받습니다. 그곳에서 수도원장이며 친구인 요한네스의 수도원 농장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그의 위대한 작품 가운데 하나인 <왜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는가?>(Cur Deus homo)를 매듭짓게 됩니다.
인간이 되신 하나님
1094년 안셀무스는 교화 우르바누스 Ⅱ에게 ‘육신이 되신 하나님이 말씀에 관한 서한’을 보냅니다. 이 서한을 통해 안셀무스는 유명론자였던 로스켈리누스(1050-1125)와 논쟁을 시작합니다. 유명론은 중세의 유명한 철학 사상의 중의 하나이자 종교개혁을 일으키는 철학적 기반을 만듭니다. 중세 철학을 이해하려면 관념론(idealism), 실재론(Realism), 유명론(nomialism)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관념론은 플라톤 철학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관념 즉 이데아를 실체로 보고 실재를 이데아의 반영 또는 열등한 것으로 봅니다. 반대로 유명론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기반으로 하며 실재하는 것만이 참으로 인정합니다. 극단적으로 풀어내면 관념론은 생각과 영의 세계가 참이며 실재의 세계를 열등한 것으로 정의합니다. 반대로 유명론은 관념과 영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고 실제로 존재하는 물질(개체)만이 참으로 인정합니다. 실재론은 유명론에 가깝지만 생각과 영의 세계(보편)가 존재하며 물질(개체)도 존재한다는 중립적 태도를 갖습니다.
안셀무스는 유명론에 가깝지만 실재론자였고, 로스켈리누스는 유명론자였습니다. 안셀무스와 로스켈리누스의 논쟁은 중세에 줄곧 있었던 ‘중세 스콜라 철학의 보편 논쟁’의 시작을 알리는 포문이었습니다. 때로는 황당하기까지 한 스콜라 학자들의 논쟁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깊은 고민을 던져주었고, 종교개혁으로 나아가는 길을 닦아 놓는 셈이 되었습니다. 극단적 유명론은 영의 세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비성경적인 관점입니다. 유명론자였던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러한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인간의 이성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온전히 파악할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탁월한 철학자요 신학자였던 안셀무스는 결국 ‘만족설’을 주장함으로 하나님과 사단과의 거래라는 오해를 낳게 됩니다. 그렇지만 치명적인 오류에도 불구하고 안셀무스의 신학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많은 부분에서 배울 점이 많습니다. 우리는 안셀무스의 글들을 살펴보면서 알게 될 것입니다.
그 외의 신학 논쟁들
1098년 10월 안셀무스는 바리(Bari) 공의회에 참석합니다. 이곳에서 아버지에게서만 성령이 발현된다는 동방교회에 반대하여 아버지와 아들에게서도 동일하게 성령이 발현된다고 주장합니다. 필리오케(filioque) 논쟁은 초대교회 안에서도 심각한 문제였고 동서양의 중요한 논쟁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안셀무스는 자신의 주장은 ‘성령의 발현에 관하여(De Processione Spiritus Sancti)’(1102년)라는 논문에 담아 발전시킵니다. 1099년 4월에는 평신도 서임권을 반대하는 로마 공의회에도 참석합니다. 당시 영국에서는 주교를 왕의 권한으로 지목하여 세우려는 정치적 영향력이 강하게 일어났습니다. 봉신 서약처럼 대주교가 되면 왕에 충성을 맹세해야 합니다. 그러나 안셀무스는 이것을 거절했고, 반대의 의견을 분명히 표명했습니다.
교황 우르바누스 Ⅱ와 영국 왕 윌리엄 Ⅱ는 조금도 화해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1099년 7월 29일 교황이 갑자가 사망하고, 일 년 후인 1100년 8월 2일에 윌리엄 Ⅱ도 사냥 도중 화살에 맞아 사망하게 됩니다. 왕위를 이어받은 헨리 Ⅰ세(1100-1135)는 교회의 안정이 곧 영국의 안정임을 알고 안셀무스에게 귀한 요청을 합니다.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 사역에 복귀하지만 충성 맹세를 거절한 것은 다시 그로 하여금 두 번째 망명길에 오르게 합니다.
1107년 8월 1일 다시 영국에 돌아가 교황과 합의한 사항은 선언합니다. 결국 이러한 영국의 상황은 후에 영국의 종교개혁이 교회가 아닌 영국 왕에 의해 시작되는 토대를 낳게 됩니다. 그러나 당시의 안셀무스로서는 더 이상 뭔가를 할 수 없었습니다. 교회 편에 서서 교회를 지키려고 했지만 영국 왕과의 관계도 놓지 않으려 했습니다. 이것은 안셀무스의 운명적 삶이었고, 스스로 말했던 ‘순종’의 삶이었습니다. 교회의 평화와 안정을 위하지만 세속 정치로부터 교회를 지켜야 하는 이중적 고충을 떠안았던 것입니다. 결국 1109년 4월 21일, 캔터베리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며 이 땅에서의 삶을 마감하게 됩니다.
3. 나가면서
교회사는 논쟁의 시대입니다. 교리의 발전은 수많은 교리의 논쟁을 통해 체계화 시킨 결과였습니다. 초대교회의 논쟁이 대부분 순전한 교리 논쟁이었다면, 중세의 논쟁은 정치적인 문제가 개입돼서 세속적인 성향을 지니게 됩니다. 이것은 로마의 몰락과 함께 교회 세속적인 일에 관여하면서 불가피하게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나 영국처럼 교회와 왕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일이 발생하면서 논쟁은 불이 붙게 됩니다. 안셀무스는 교회와 세속 정치와의 대립을 몸으로 살아낸 사람입니다. 또한 스콜라 철학의 보편논쟁이 일어나면서 신학은 현실과 점점 멀어지게 되지만 새로운 개혁과 변화의 토대를 만들기도 합니다.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은 어거스틴의 영향 아래 있지만 이성과 신앙의 관계는 뒤바뀌게 됩니다. 200년이 지난 토마스 아퀴나스의 시대가 되면 안셀무스가 상상하지도 못할 교리적 오류와 철학적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안셀무스가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안셀무스의 철학적 사유 방식은 철학을 신학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이것은 긍정적인 측면에서 보면 획일적인 보편 교회가 아닌 개체로서의 가능성을 열어 둠으로 가톨릭교회를 벗어나 새로운 교회가 출혈할 수 있는 철학적 전제를 만들어 놓습니다. 종교개혁이 윌리엄 오캄 등의 유명론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가 죽기 전 마지막을 남긴 글입니다.
“내가 거저 얻은 바를, 그것을 바라는 이들에게 기꺼이 주고 싶다.”
(…quod gratis accepi, gratis volui petentibus impendere, De concord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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