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고전읽기] 캔터베리 안셀무스의 모놀로기온(Monologion)
모놀로기온(Monologion)
캔터베리 안셀무스
1. 들어가면서
순수한 이성만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을까요? 현대인들은 부정적입니다. 신은 인간의 이성 너머에 존재하기 때문에 초월적이고 이성의 한계를 뛰어 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불과 백 년 전까지만 해도 신격화된 인간의 이성은 하나님을 충분히 증명할 수 있다는 환상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이마누엘 칸트가 1781년에 <순수 이성 비판>을 출간하면서 순수 이성에 대한 환상은 무너졌지만 포기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성에 대한 환상은 언제 시작되었을까요? 어거스틴에게도 스며있지만 명시적(明示的)으로 드러난 것은 안셀무스의 <모놀로기온> 때부터 입니다. 이 책을 살펴보면서 알아보기를 원합니다. 박승찬이 옮긴 아카넷 출판사의 <모놀로기온 & 프로슬로기온>을 참조하여 작성된 것입니다. 원문을 그대로 인용한 부분은 “ ”로 표시했고, 대부분은 원 글을 참조하여 제가 요약한 것임을 밝혀 드립니다.
오늘은 안셀무스의 <모놀로기온>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모놀로기온>의 저작 시기는 지난번에 살펴본 <안셀무스의 생애와 사상>에서 간략하게 살펴본 대로 베크 수도원장으로 제직 중일 때 작성한 것입니다. <모놀로기온>이 갖는 특징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먼저, 안셀무스는 성경의 권위 없이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합니다.
현대인들은 하나님이란 존재도 식상하고 이성만을 사용하여 사유한다는 것은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성경을 인용하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기발하고 위험한 것이었습니다. 자칫하면 무신론자나 범신론자로 오해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이성만으로 하나님을 증명하려 했습니다.
성경의 권위 없이 하나님을 증명하는 것은 이성만을 사용한다는 말입니다. 당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합리적 이유와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 당연히 믿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증명할 필요도 없고, 증명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안셀무스는 당연하다는 것을 당연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고 순수이성만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한 것입니다.
셋째, 이성만으로 하나님을 증명한다면 먼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가정에서 시작합니다.
바로 이점이 안셀무스의 ‘위대함’이자 ‘위험함’입니다. 스콜라 철학의 아버지라는 이름에 걸맞게 안셀무스는 철저히 하나님을 배제한 상태에서 하나님을 증명해 나갑니다. 이것은 이성만을 통해 하나님을 증명하려는 순수한 시도인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앞으로 전개될 스콜라철학의 이분법적 사유 방식의 씨앗을 심은 것입니다. 앞서 살펴보았던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유 방식은 이성과 하나님을 암묵적으로 분리 또는 구분합니다. 200년 후에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스콜라 철학이 꽃을 피울 때 신학은 이미 철학이라는 사생아를 임신하여 배가 부른 상태가 됩니다.
넷째, 거듭난 이성은 하나님을 발견합니다.
바울은 만물을 통해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롬 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그러나 거듭난 이성이 아니라면 볼 수 없습니다. 죄성에 빠진 인간은 어두운 마음을 가진 탓에 결코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안셀무스는 이성으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존재하는 것은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신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2. 요약
존재하는 모든 것은 분명 더 선한 것이 있다. 더 빠르고, 더 강한 것이 있듯 존재하는 것은 더 좋은 것이 존재한다. 더 좋은 것이 존재하는 것은 모든 선함의 근원이 되는 ‘바로 그것’이 ‘커다란 선’이다. 오직 그 자체를 통해 선한 것만이 바로 ‘최고선’이다. 최고의 선이기 때문에 그 이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이 하나’를 통해 존재한다. 다른 존재를 존재하게 하는 것, 자기 자신을 통해 존재하는 것이다. ‘이 하나’는 ‘다른 모든 존재의 근원이 되고, 유일하게 자신을 통해 존재하는 것’이다. 최고의 것이 존재한다는 것은 한 본성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최고 존재는 그것이 무엇이든지 자신을 통해 존재하고 다른 모든 것은 그것(최고 존재)을 통해 존재하게 된다는 사실이 확정되어 있다.”
최고의 존재는 무엇을 통해 존재하지 않고, 무엇을 의지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최고의 존재는 그 자체로 존재한다. ‘빛’ 자체가 ‘비추는 것’이 서로 관계를 맺듯 ‘본질’과 ‘존재’, ‘존재자’는 상호 관계를 갖는다. 따라서 최고 본질과 최고 존재와 최고 존재자는 서로 간 부합한다. 존재하는 것은 무로부터 창조적 본질에 의해 만들어졌다. 창조적 본질, 즉 최고의 본질에 의해 만들어진 것들은 그 본질을 통해 번성한다. 그러므로 최고 본질은 모든 것 안에, 모든 것을 통해 있고, 모든 것은 그것으로부터, 그것을 통해 그것 안에 있다.
최고의 선은 많은 선들이 합쳐진 것이 아니라 유일한 선이다. 유일한 선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그것은 자체로부터 자기를 통해 존재하므로, 결코 그 자체를 통해 자기로부터 존재하는 다른 본질이 아니며, 그것을 통해 그것으로부터 존재하는 다른 본질도 아니다.” 최고 본질은 영원하다. 그러므로 모든 장소와 모든 시간에 존재한다. 시간과 장소의 한계에 종속되지 않는다. 모든 장소에 존재한다는 것은 공간이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 안에 있다’는 말이다.
최고의 얼(spiritus)은 말함을 통해 창조한다. 그렇다면 말함은 창조에 속하지 않는다. 또한 말함(말씀)은 발설자인 최고의 얼과 함께함으로 영원하다. 말함은 하나의 단어로 이루어진다. 창조된 것은 진리의 모방이다. 존재는 말함(말씀) 없이 존재할 수 없다. 말씀을 존재하며, 말씀이 존재하게 한다. 그러므로 말씀은 존재하는 본질을 창조한다.
“최고의 얼이 자기 스스로 말할 때, 또 만들어진 만물에 대해 하나의 동일한 단어(말씀)로 말한다는 사실을 주장함은 불합리할 수 없다.”
말씀은 최고의 존재로부터 창조된 것이 아니라 낳아졌다. 그러므로 낳은 자는 아버지이고, 낳아진 자는 아들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생명과 본질을 그 안에 소유한다. 아들은 아버지와 권능과 지혜가 동일하다. 아버지의 지혜를 깨닫는 것이 지혜다. 지혜는 서로를 아는 기억의 기억이다. 기억은 지혜가 된다. 최고의 얼은 자신을 사랑하고, 사랑은 사물을 기억하고 인식한다. 그러므로 최고의 얼은 모든 것을 사랑한다. 사랑은 아버지와 아들에게 발출된다. 사랑은 창조되지 않고 발출되었으므로 영원하다. 영원하기 때문에 존재하며, 아버지와 아들과 동일한 본질을 소유한다. 발출된 사랑은 곧 ‘영’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동일하게 서로 안에 존재한다. 서로 인식하며, 서로 기억하며, 서로 사랑한다.
사람들은 이성적인 정신을 통해 최고의 본질에 도달한다. 정신은 본질의 모상이고 거울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 사랑하듯, 이성적인 피조물은 ‘그’를 사랑하기 위해 창조되었다. 최고의 생명을 사랑한다면 인간은 영원한 생명을 잃지 않는다. 사랑은 자신을 사랑하는 인간에게 사랑을 준다. 사랑은 창조의 목적에 부합한다. 사랑하지 않는 것은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고 생명을 잃게 된다.
믿지 않는 것을 사랑할 수 없고 희망할 수도 없다. 사랑하기 위해 믿어야 하고, 믿으면 사랑할 수 있다. ‘믿으면서 최고의 본질로 향한다’라고 말하는 대신 ‘최고 본질을 믿는다’라고 말하는 것이 적합하다. 아버지와 아들, 영을 같은 방식으로 믿어야 한다. 믿지 않으면 추구할 수 없고, 추구한다는 것은 믿는다는 말이다. 사랑은 추구하게 한다. 신앙은 사랑을 통해 작용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존재하고, 모든 존재의 근원이다. 피조물은 하나님에 의해 통제되며 하나님은 가장 고귀한 분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오직 그만이 모든 다른 본성들이 자신의 능력을 다해 사랑하며 공경하고 사랑해야 하는 바로 그 존재라는 사실은 너무나 명백하다. ... 따라서 참으로 이 분은 하나님일 뿐 아니라 형언할 수 없는 셋이며, 하나인 유일한 하나님이다.”
3. 나가면서
<모놀로기온>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존재하는 것들은 불완전하다. ‘더 탁월한 존재’가 있다. 그 탁월한 존재는 완전한 존재다. 완전한 존재는 창조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영원하다. 모든 존재는 그 영원한 존재로부터 창조되었고, 영원한 존재의 본성을 가진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존재케 하는 존재를 갈망한다. 그러므로 가장 탁월한 존재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오래 전 함께 살폈던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을 기억해 본다면 안셀무스의 주장과 매우 흡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안셀무스는 어거스틴의 책을 사랑했고, <모놀로기온>도 어거스틴의 논증을 빌려와 기술한 것입니다. 다만 어거스틴이 성경의 권위를 자연스럽게 인정했지만 안셀무스는 성경을 배제하고 인간의 이성만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한 것이 다릅니다.
현재의 관점에서 본다면 충분히 논리적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기독교가 모든 것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시대에 신을 증명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안셀무스의 논리를 무조건 따갈 수는 없지만 몇 가지 점에서 특출합니다. 그는 신을 증명하기 위해 이성만을 사용했다는 것이며, 그로 인해 인간의 내면에 잠재된 본성에 천착합니다. 또한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본성을 가진다는 자연의 속성과 원리를 제공합니다. 플라톤주의를 배격하면서도 전제하고, 방법론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과 논리를 따라갑니다.
우리는 안셀무스의 신존재증명 안에서 앞으로 전개될 스콜라철학의 원리와 신학을 떠나 인간의 독립적 사유를 추구한 르네상스 운동을 어렴풋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또한 신학이 삶의 맥락을 떠나 인간의 이성의 사유물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이성적으로 증명하고 싶었던 안셀무스의 노력은 비록 완전하지 않았지만 몇 가지 점에서 탁월합니다. 믿음과 사랑, 이해와 기억을 본질이란 범주 안에서 다른 것이 아님을 증명해 보였습니다. 또한 야고보서가 말한 대로 앎과 사랑은 절대 분리할 수 없으며, 존재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으로 규정한 부분도 훌륭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에 비해 순수하고 하나님을 더 깊이 사랑했던 안셀무스입니다. 이 부분은 그의 <프로슬로기온>을 살펴볼 때 명백히 드러날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중세의 신학자입니다. 하나님과 이성을 분리하고 하나님보다 이성을 더 높이 숭배했던 계명주의의 시대라는 문의 터를 닦았습니다. 이성은 하나님의 귀한 선물이지만 하나님 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믿음 안에서 이성을 사용해야하고, 이성을 사용하여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는 수고를 마다하지 말아야 합니다. 안세무스의 <모놀로기온>은 이성의 빛과 그림자를 잘 보여주는 중요한 책입니다.
'Book > 국민일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독교 고전읽기] 인간이 되신 하나님(Cur Deus Homo) (0) | 2018.12.03 |
---|---|
[기독교 고전읽기] 캔터베리의 안셀무스의 프로슬로기온(Proslogion) (0) | 2018.11.27 |
[기독교 고전읽기] 안셀무스의 생애와 사상 (0) | 2018.11.13 |
[저자 읽기] 토마스 왓슨 (0) | 2018.11.05 |
[저자읽기] 존 베일리 (0) | 2018.11.0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