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고전 읽기] 마르틴 루터의 <교회의 바벨론 포로>
교회의 바벨론 포로
De Captivate Babylonica Ecclesiae
마르틴 루터
1. 들어가면서
루터의 3대 대표 논문의 두 번째는 가톨릭교회의 성례를 비판하고 교회의 권위는 성경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 <교회의 바벨론 포로>입니다. 이 논문도 앞선 <독일 크리스천 귀족에게 보내는 글>처럼 1520년에 발표했습니다. 8월에 <독일 크리스천 귀족에게 보내는 글>을 발표하고, 두 달 뒤인 10월에 <교회의 바벨론 포로>를 발표합니다. 다음에 살펴볼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한 달 후엔 11월에 발표합니다. 비록 루터가 파문을 당하기는 했지만 아직 종교개혁이 일어나지 않은 시기입니다. 그러나 루터의 글을 통해 중세 가톨릭과 루터는 더 이상 화해의 손을 잡을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지고 있습니다. 루터의 3대 논문으로 불리는 세 논문이 종교개혁이 공식적으로 일어나기 전인 1520년에 동시다발적으로 발표 되었다는 것은 상당히 기이한 일입니다. 마치 종교개혁이 일어나 한 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 발표되었다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 파격적인 내용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이것은 그만큼 중세 교회가 타락했다는 것이며,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반증해 줍니다. 이 논문은 루터가 중세 가톨릭교회가 성례로 여겼던 7성령에 대한 성경에 근거한 비판입니다. 루터는 오직 성찬과 세례만을 인정하고 나머지 다섯 가지 가톨릭 성경은 부정합니다. 물론 그것들이 악하다거나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가톨릭교회가 성경을 잘못 해석했고, 오해함으로 잘못 사용하고 있으며, 그로인해 교회가 타락했다고 말합니다. 루터는 오직 성찬과 세례만을 교회의 본래 성례로 인정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비록 교황에게 파문당하기는 했지만 아직 가톨릭 사제로 남아있던 시기였습니다. 즉 우리는 루터를 종교개혁자의 혁명적 전사로 거듭나기 전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본 논문을 읽는다면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황을 과감하게 비판하며, 오직 성경에 근거하여 모든 것은 판별하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여전히 루터는 미완의 개혁자라는 것이 분명해 집니다. 가장 선두에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새롭고, 진보하지 못한 탓입니다. 특히 성찬에 대한 그의 이해는 가톨릭을 떠나려고 몸부림을 치지만 가톨릭의 화체설에서 진일보한 공재설에 머물고 있습니다. 엄밀하게 공재설은 화체설과 거의 다르지 않습니다. 후에 츠빙글리와 협의에서 모든 것에서 공유를 했지만 오직 성만찬에서는 등을 돌리고 말았습니다. 루터는 츠빙글리에게 큰 소리로 ‘우리는 영이 다르다’라고 말하며 결별을 선언합니다. 루터에게 있어 공재설은 도무지 건너뛸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루터는 그렇게 싫어하고 부정했던 아리스토텔레스 주의자였던 토마스 아퀴나스의 지배아래 있었던 것입니다. 논문을 간략하게 요약한 다음 마무리 짓도록 하겠습니다.
2. 간략한 요약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수도사 마르틴 루터가 그의 친구 헤르만 툴리히에게 문안 한다.
나에게 많은 질문을 하기에 나는 학식이 많아질 수 밖에 없다. 면죄부에 대해서 2년 전에 글을 썼으나 지금은 후회한다 당시만 해도 난 여전히 로마 미신에 얽매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면죄부가 사람들로부터 돈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앗아가려고 하는 로마의 위선자들의 협작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교황권은 바벨론 왕국와 힘센 사냥꾼인 니므롯의 체제로 이해야한다. 에크와 엠저 그리고 라이프치히의 성경 강의자는 성찬과 중요한 주제들에대해 나를 가르치려 한다. 그들은 모든 것을 교회의 판단에 일임해야하고 교회의 말에 복종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성찬을 적용함에 있어서 ‘나는 떡이다’라는 것만을 적용하고 ‘내 피는 음료다’라는 말은 제외시킨다. 그리하여 오직 떡만을 평신도들에게 주고 있다. 성경을 보라.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들은 이렇게 자신의 허튼 소리를 성경 구절들을 풍부하게 인용함으로써 그 가치를 높이고 있다. 이처럼 그들은 주님께서 허락하신 성찬을 평신도들에게서 빼앗아갔다.
1) 성찬
주님은 우리에게 영적 식사를 허락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하셨다. 우리는 영적 식사에 참여함으로 살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은 성례에 참여하지 못한 어린이도 교회의 신앙을 통해 교통한다고 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편지하면서 그리스도가 ‘떡과 즙’을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것을 다 먹으라’라고 말했다. 즉 떡 뿐 아니라 잔도 포함한다. 주님은 떡과 잔을 통해 기념하라 하셨다. 만약 이중 하나를 평신도들에게 주지 않는다면 그리스도를 거스르는 것이다. ‘이것을 마시라’를 오직 사제들에게만 해당된다고 억지로 주장하는 근거는 성경에 없다 이처럼 교회가 평신도들에게 잔을 빼앗을 수 있다면 떡 또한 빼앗을 수 있다. 나는 교회가 그런 권세를 갖고 있다는 것을 부정한다. 로마(중세 가톨릭 교회를 말한다. 교황청이 로마에 있기 때문에 루터는 종종 로마라는 지명으로 중세교회를 대신한다.)는 교회가 이렇게 정했다는 말로 변명한다. 이것은 성찬을 정하신 하나님의 명을 어기고 진정한 교회의 동의 없이 교회 위에 군림하는 것이다. 당신이 세례 지망자에게 세례에 대한 신앙을 받으면서 그 신앙의 표징을 물을 거부한다면 얼마나 왜곡된 것인가? 성경의 토대와 동떨어져 긁어 모은 이들의 주장은 설 땅이 없다. 만약 어떤 사람들이 이단이며 종파주의자로 분려야 한다면 보헤미아 사람들이나(후스 파를 말한다) 헬라인들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복음에 뿌리 내리고 있다. 너희 로마야말로 이단자이고 불경건한 종파주의자다. 왜냐하면 너희는 하나님의 성경에 나오는 명료한 구절들에 반하여 너희의 허구만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로마교도들을 논박하기 위해서는 키프리아누스 혼자만으로 충분하다. 그는 자신의 저작인 <타락한 자들에 관하여> 제5권에서 이 문제를 논했다. 그는 평신도들의 다수와 어린아이들에게까지도 떡과 잔을 베풀었다고 증언한다. 그러므로 평신도들에게 두 요소를 거부하는 것은 불경건한 압제이며, 어떤 천사도 권한이 없다. 로마는 횡포를 부리고 있다. 강제적으로라도 빼앗아야 한다. 성경은 명백하게 문자적으로 해석되어져야 한다. 예수님은 ‘내가 떡 가운데 있다’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이것은 내 몸이다’라고 하셨다. 이것은 ‘이 떡이 곧 내 몸이다’라는 뜻이다. [루터는 성찬론은 확실히 가톨릭 쪽에 가깝습니다. 루터의 이러한 이해는 아직 츠빙글리나 칼뱅의 이론을 접하지 않은 탓도 있으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세 철학의 영향으로 인해 개체가 곧 보편이라는 철학적 사유방식을 탈피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전통 개혁주의는 츠빙글리의 상징설을 보완한 칼뱅의 영적 임재설을 지지합니다.]
로마교도들을 성찬에 더러운 것들을 첨가시켰다. 그들은 미사가 선행이고 희생제라라고 말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수입을 위해 그렇게 한다. 첨가물들은 인간들이 헌신으로 만들어진 것들이다. 예복, 장식품, 찬송가, 기도, 오르간, 촛불, 그리고 가식적인 겉치레 들이다. 그리스도는 성례를 제정하고 말씀을 주셨다. 나머지는 아무 상관없다. 미사는 약속에 의한 것이다. 이곳에 더할 것은 없다. 약속은 우리의 신앙을 필요로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선하고, 그 다음은 신앙이 따르며, 그 다음은 사랑을 낳게 된다. 필요한 것은 오직 신앙이다. 우리는 미사를 기념하고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고 생각하고 자라가야 한다.
우리가 교회의 바벨론 포로에 있어서 통탄스러워 하는 것은 오늘날 사제들이 평신도들은 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지 못하도록 몹시 경계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그 말씀들은 너무 성스러워서 일반 사람들에게 말해져서는 안 될 것처럼 행동한다. 사단은 이렇게 교회로부터 참된 미사에 대한 모든 흔적을 지웠다. 또한 세상의 구석구석 거짓된 미사들,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오용들과 희화들로 가득 채워 놓았다. 그리하여 세상으로 하여금 가장 중한 죄인 신성모독의 짐을 점점 더 지게 하여 그 죄를 더하게 하고 있다. 미사에 필요한 것은 참된 예배와 말씀이다. 약속의 말씀이 전해지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미사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말씀은 언약이며 떡과 포도주는 성례인 것이다.
미사는 하나님의 언약을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이 필요할 뿐이다. 그런데 사제들은 마치 우리가 받아야할 것은 드려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기도를 선행이라 여겨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기도는 선행이다. 그러나 기도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지 선행이 아니다. 사제들은 자기들이 그리스도 자신을 하나님 아버지께 완전한 희생제물로 드리며 자기들이 돕고자 하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선행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식으로 오류는 점점 커져서 마침내 그들은 기도에 속하는 것을 성례에 돌리고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야 할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어처구닌 없는 신성모독죄를 짓고 있다. 사제들은 미사를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제사라 생각한다. 마치 아벨이 드린 제물과 예수님을 비교한다. 이것은 우리가 단호하게 버려야할 것들이다.
2) 세례의 성례
세례를 보존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라. 세례는 그들에게 아직도 유익이 된다. 그러나 아쉽게 세례를 영광스럽게 생각하지 못한다. 죄를 사함받고 하늘에 들어가는 많은 길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서약, 수도회, 행위, 보속, 순례, 면죄부 등의 무수한 부과물들이 생겨났다. 이러한 것들은 전혀 성경에 의한 것이 아니다. 먼저 세례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주님은 믿고 세례를 받으면 구원을 얻을 것이라 했다.(막 16:16) 우리는 구원에 대한 약속을 믿어야 한다. 우리가 약속을 붙들어야 한다. 세례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베푼다. 세례자의 권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대신하는 것이다. 둘째, 세례는 표징이자 성례이다. 세례는 죽음과 부활, 의인의 성취와 완결이다. 물속에 잠길 때 죽음을 상징하며, 물 밖으로 나올 때 생명을 상징한다. 신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산다.
3) 고해성사
고해성사와 연관된 첫째가는 최고의 악은 이 성례 자체가 흔적조차 없이 완전히 공허하게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마치 사제가 용서하면 그들의 죄가 용서된다고 주장한다. 근거로 마태복음 16:19과 18:18을 인용한다. 땅에서 매면, 풀면,,, 하늘에서 매고 풀린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집례자의 권세가 아니다. 믿는 자들의 신앙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은밀한 죄들을 다른 형제게 고백할 때 용서를 빌 때 용서를 받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믿는 자들에게 죄사함을 선포할 수 있는 권세를 주셨다는 것은 확실하다.
4) 견신례
견신례는 성례로서 받을 수 없다. 성경에 근거하지 않기 때문이다.
5) 혼례성사
결혼을 성례로 볼 수 있는 그 어떤 성경적 근거도 없다. 우리는 성경 어느 곳에서 결혼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는 말이 없다.
6) 서품 성사
초대교회 안에 성례로 알려지지 않은 것이다. 교황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또한 서품 성사가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으로 말하는 곳은 단 한 곳도 없다. 로마교도들은 ‘나를 기념하라’에서 서품 성사를 찾는다. 그러나 그것은 사제들이 행해야할 마땅한 의무로 주어진 것이다. 목회자는 그들의 책무가 양떼를 위해 초장을 찾거나 가르치는 것이다. 오직 성무일과를 봉독하고 미사만 거행한다면 교황의 제사장일 수 있지만 기독교적 제사장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말씀도 전하지 않고 설교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여로보암이 만든 레위인이 아닌 저급한 쓰레기 같은 사람들로 세워진 벧아웬의 제사장들이다. 성경은 중혼을 금한다. 그러나 교황은 오히려 결혼을 못하게 하고 거세한다. 오히려 뇌물을 받쳐 교황이 허락한 사람은 스 물, 백 명의 아내도 허용한다. 오, 이 존경할만한 서품의 성례에 합당한 교황청이여! 오, 보편교회가 아니라 사단과 흑암의 세력의 회당들의 군주여! 자기가 그리스도인임을 아는 모든 사람은 우리고 모두가 똑같이 제사장들이며 우리 모두는 말씀과 성례와 관련하여 동일한 권세를 갖고 있음을 온전히 확신하여야 한다. 제사장직은 단지 말씀을 사역하는 직분이다.
7) 종부성사
질병이 있는 자들에게 기름을 붓는 것에 두 가지 의미를 더했다. 그들은 성례라 부르고, 그것이 마지막이라 부른다. 그들은 야고보서 5:14에 근거하여 장로들을 청하여 기름을 부으면 나음을 얻는다고 한다. 자세히 보라. 기름을 붓는 것은 마지막이기 때문이 아니라 회복시키기 이해서다. 오직 죽어가는 이들에게 기름을 부어 영생을 약속하는 것이 아니다.
3. 나가면서
루터는 부족하긴 하지만 확실히 천재입니다. 비록 에라스뮈스와 존 위클리프, 후스의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그들을 뛰어넘었습니다. 그리고 필요에 의한 것이기도 하지만 자신이 알고 이해했던 성경과 신학적 핵심들을 간략하게 정리하고 이용할 줄 알았습니다. 루터가 말하는 교회의 바벨론 포로는 성경이 말하는 원리에서 떠나 이방의 헛된 속임수와 우상들에게 교회가 지배 당하고 있다는 취지에서 사용한 것이다. 진정한 개혁은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 것은 버리고, 오직 성경이 말하고 주장하고 설파하는 것들만을 가치 있게 여길 때 시작된다고 보았습니다. 루터의 파격성은 이곳에서도 여전히 드러납니다. 특히 <만인 제사장설>은 모든 신자가 사제(제사장)이기 때문에 서로 죄를 용서하며, 성례를 집행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사실 이러한 주장은 종교개혁 500년이 지난 지금도 쉽지 않은 주장입니다. 그러나 루터는 모든 판단의 근거를 ‘오직 성경’에 두고 있습니다.
'Book > 국민일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독교 고전 읽기] 루터의 <세속권세> (0) | 2020.04.19 |
---|---|
[기독교 고전읽기] 루터의 노예의지론 (De servo arbitrio) (0) | 2019.12.30 |
[기독교 고전 읽기] 독일 크리스찬 귀족에게 보내는 글 / 마르틴 루터 (0) | 2019.08.26 |
[기독교 고전읽기] 루터의 십자가 신학 (1) | 2019.06.30 |
[기독교 고전읽기] 마르틴 루터의 생애(Ⅲ) (0) | 2019.06.3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