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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고전읽기] 루터의 십자가 신학

샤마임 2019. 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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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고전읽기] 루터의 십자가 신학

Crux Sola Est Nostra Theologia

십자가만이 우리의 신학이다.

1. 역사적 배경

 

십자가 신학은 1518년 하이델베르크 논쟁에서 제시한 논제에 담겨 있습니다. 15171031, 루터가 95개조를 발표한 뒤 한 해가 지나 새로운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그 여정을 간략하게 살펴봅시다. 전체적인 흐름은 이전에 소개한 <루터의 생애 >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이곳에서는 신학적인 부분만을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1502년 색소니의 선제후 프리드리히는 라이프치히 대학과 경쟁할 대학을 자신의 영지 안에 세웁니다. 교회를 허락을 받지 않아 교회의 지원을 전혀 받을 수 없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대학들이 교회의 고위직 성직자들을 명예총장(chancellor)로 두며 지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비텐베르크는 하위 성직자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설립한 지 9년이 지난 1511년 여름, 루터가 비텐베르크 대학에 들어오게 됩니다. 다음 해 1512년 루터는 28살의 나이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게 되고, 정식적인 성경 강해자로 교수하게 됩니다. 루터의 신학에 중요한 세 가지 요소는 인문학’ ‘새길(Via Moderna)’ ‘신 어거스틴 학파(Schola Augustiniana Moderna)’입니다. 프리드리히 선제후는 대학을 설립할 때 뮌헨의 어거스틴 수도원장이었던 요한네스 폰 슈타우피츠를 신학부 학장으로 초빙합니다. 비록 그는 다음 해 수도원의 일로 다시 돌아가야 했지만 그로 인해 어거스틴 수도원생들이 백여 명이 넘게 학생으로 들어왔으며, 17명이 대학의 교수로 남게 됩니다. 15075, 인문학자였던 크리스토프 쇼일(Christoph Scheurl)이 비텐베르크 총장으로 선출되면서 대학은 인문주의의 영향을 더욱 강력하게 받게 됩니다. 6개월 후, 쇼일은 다시 요도쿠스 트루트베터에게 총장직을 넘깁니다. 트루트베터는 새길(Via moderna)’ 의 철학을 학교에 도입하게 됩니다.

 

새길옛길(비아 안티쿠아, via antiqua)’로 명명되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주장에 반하는 것으로 중세 말기에 번성했던 윌리엄 오컴이 주도했던 유명론을 말합니다. 비텐베르크 대학은 초기에 옛길을 가르쳤지만 1508년 선제후는 쇼일에게 학칙을 개정하게 했고, 그레고리의 길로 알려진 새길을 본격적으로 도입하기에 이릅니다. 새 길과 옛길은 중세의 보편 논쟁 중의 하나였습니다. 간략하게 이야기하면 옛길은 보편이 실재하며, 보편이 곧 신이라고 말합니다. 안셀무스의 신존재증명의 중요한 원리입니다. 그러나 유명론은 보편은 기호일 뿐이며 실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다만 개체가 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보편이라는 하나의 원리를 통해 모든 것을 설명하고 경험될 수 없는 신을 설명하려 한 것이 옛길의 방식입니다. 그러나 새길은 옛길에 반대하여 보편은 확인할 수 없으며, 지식은 경험으로만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결국 경험될 수 없는 신은 알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극단적인 설명이지만 전반적인 담론의 흐름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쟁과도 흡사합니다. 결국 유명론의 득세는 교회는 하나라는 중세교회의 명제를 거부하고, 다른 교회도 가능하다는 철학적-신학적 추론을 만들게 됩니다. 물론 중세의 철()학자들이 그것을 바라거나 생각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유명론은 보편 교회가 아닌 개체 교회를 우선시함으로 종교개혁으로 인해 교회가 갈라져 나가 는 것을 철학적 이론을 통해 합리화시켜주는 꼴이 되었습니다. 루터가 개혁 초기부터 유명론을 자신의 신학에 적용한 증거는 없지만, 점차 유명론의 영향 아래 교회론을 전개하게 됩니다.

 

인문학을 루터의 종교개혁 사상과 잇대어 설명하면 한 마디로 성경 원어와 교부 문헌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즉 중세가 가르치고 전한 전통이나 해석이 아닌 성경 그 자체와 초대교회 교부들의 사상을 직접 접하는 것입니다. 에라스뮈스가 제롬으로 돌아갔다면, 루터는 어거스틴으로 돌아갔습니다. 루터가 어거스틴에게 주목한 것은 교부들은 타락한 중세교회 이전으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교부들은 초대교회와 가까웠고, 부패하지 않는 교리를 보존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루터의 종교개혁 전제는 성경교부 문헌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루터와 종교개혁이 인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받았음에도 후에 인문학자들과 결별하고 적대적인 된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결별은 기독교가 본질적으로 인간의 타락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며, 자유의지를 부정하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앞으로 펼쳐나갈 루터의 신학적 사상은 다분히 인문학적이면서 반()인문학적인 성향이 함께 존재하는 양가성(ambivalence)을 띠게 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후에 살펴볼 루터의 노예 의지의 경구 인간의 이성적 자율을 부정하기 때문에 인문학을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루터의 이러한 극단적 주장들은 루터보다 친 인문주의자였던 멜랑히톤과 같은 이들에게 당혹감을 안겨주었습니다.

 

15171031, 루터는 당대의 신학에 문제의 제기하는 95개조를 발표합니다. 학자들 간의 논의를 위해 발표한 것이었지만 일반 시민들은 루터의 95개조를 보자 흥분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설명 책자까지 포함된 덕분에 인쇄업자들은 독일어로 번역하여 사람들에게 팔기 시작합니다. 면죄부에 대한 토론뿐 아니라 교화의 권위와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성례에 대한 토론은 당시 독일인들의 가려운 부분을 긁어주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사실, 루터의 95개조 발표는 아무런 소용이 없어 조용히 지나갑니다. 그러나 잠잠했던 루터와 다르게 루터의 글을 읽게 된 수많은 사람들은 요동치기 시작합니다. 15182, 그러니까 95개조를 붙인 뒤 약 3개월 정도가 흐른 뒤 도미니크 수도회의 실베스터 마솔리니는 루터를 반대하는 글을 쓰게 됩니다. 루터는 소식을 듣고 충격에 빠졌고, 자신의 글이 독일 전국에 빠르게 배포되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루터는 자신의 논제가 오해할 소지가 있다고 보고 독일 사람들에게 설명하기 위해 이번에는 라틴어가 아닌 독일어로 면죄부와 은총에 대한 설교라는 소책자를 발간하게 됩니다. 인쇄업자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만큼 인쇄에 배부합니다. 루터는 인쇄업자들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인쇄업자들은 인쇄 부수만큼 자신들에게 수입이 되었기 때문에 급하고 빠르게 인쇄하여 독일 전역에 배부합니다.

 

루터의 작품들이 급속하게 퍼져 나가는 것은 많은 독자를 순식간에 확보했다는 점에서 매우 유리했습니다. 그러나 일반 독일인들만 읽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루터의 적대자들도 읽었고 드디어 심각성을 깨닫게 됩니다. 151823, 교황 레오 10세는 어거스틴 수도원의 추기경에게 루터의 문제를 지혜롭게 해결하도록 촉구합니다. 교황은 이단 재판소를 열어 루터를 로마로 소환했습니다. 그러나 교황에 불만을 품던 선제후는 루터를 보내지 않았고, 독일에서 먼저 재판을 진행하도록 우회시켰습니다. 결국 1518년 가을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내려온 추기경 카예타노와 루터가 토론을 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앞서 15841, 루터는 하이델베르크에 있는 어거스틴 수도원에서 자신의 입장을 변명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루터가 하이델베르크 논제를 통해 십자가의 신학을 개진한 곳입니다. 루터는 40개의 논제를 통해 참된 신학과 하나님에 대한 참된 신학은 십자가에 못 박하신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된다고 주장합니다.

 

2. 십자가 신학

 

먼저 십자가 신학이 가장 명징하게 드러나 하이델베르크 논제를 살펴보겠습니다. 논제는 40개로 이루어져 있으며 1-28은 신학적 논제이고, 29-40은 철학적 논제에 해당합니다. 십자가 신학은 하이델베르크 논쟁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히브리서 강의(1517.4~1518.3)에서 이미 등장하고 있으며, 본격적으로 성경을 연구하고 강했던 1515~1518년까지 형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루터의 십자가 신학은 루터의 신학적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 주고 있으며, 앞으로 저술하게 되는 많은 작품 속에 스며있습니다. 95개조 논제 58’과 하이델베르크 19-24에서 십자가 신학을 집중적으로 다룹니다. 논제는 <기독교총서 15>(두란노)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논제 1-28

 

1. 인생의 가장 완전한 가르침인 하나님의 율법은 인간을 의롭게 할 수 없다. 그때 도움은 참으로 인간을 의롭게 할 수 없다.

2. 자연인의 명령으로 부추기고 매번 다시 인간의 행위들이 행해지지만 인간의 행위는 참으로 인간을 의롭게 할 수 없다.

3. 인간의 행위가 언제나 훌륭하게 보이고 대단히 좋은 모습을 갖고 있지만 그것은 모두 가능성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4. 하나님의 행위는 언제나 악하게 보이고 대단히 나쁜 모습을 갖고 있어도 그것은 실제로 영원한 공로의 행위다.

5. 인간의 행위는 그 행위들이 죄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 아니다.

6. 하나님의 행위는 그 행위가 죄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공로에 속하지 않는다.

7. 만약 그 행위들이 하나님을 공경하는 경외 없이 행해진다면 또 그들의 행위가 죽을 수 밖에 없는 죄들이라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의로운 행위도 죽을 수밖에 없는 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8. 심지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또 단순히 자기의 유익에만 관심을 갖는 정신으로 인간의 행위들이 행해진다면 인간의 행위는 정말로 더 죽을 수밖에 없는 죄다.

9. 그리스도를 제쳐놓은 행위는 즉은 것이지만 죽을 수밖에 없는 죄가 아니라고 말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 아주 위험한 느슨함으로 보인다.

10. 하나의 행위가 어떻게 죽은 행위가 될 수 있고 해롭지 않고 또 죽을 수밖에 없는 죄가 아닌지를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11. 심판과 정죄의 두려움이 모든 선행을 주의하지 않는다면 교만은 면할 수 없고 실제의 희망도 존재할 수 없다.

12. 인간들이 그들의 죄가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것을 두려워할 때에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용서될 수 있다.

13. 타락 후에 자유의지는 이름으로만 존재한다. 그리고 인간이 자기 안에 있는 것을 행하는 동안 그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14. 타락 후에 자유의지는 그 의지가 순종하는 상태에 있을 때에만 선을 행할 능력을 갖고 있지만 실제 사실에서 그 능력은 언제나 악한 동기에 능동적이다.

15. 그리고 죄 없는 순결한 상태에서 인간은 선을 행할 능력이 없고 다만 그를 통해서만 행해질 수 있을 뿐이고, 그는 개선할 능력을 훨씬 덜 가졌었다.

16. 사람이 자기 안에 있는 것을 행하므로 은혜의 상태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단지 하나의 죄를 다른 죄에 쌓고 배나 죄가 많아지게 된다.

17.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은 실망하게 하는 원인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겸손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원하도록 자극하는 원인을 제공하는 것이다.

18. 인간이 전적으로 자신에게서 실망해야 하고 그 결과 인간은 그리스도의 은혜에 적합해질 수 있게 된다는 것은 확실하다.

19. 창조된 만물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것을 해석하려고 추구하는 사람은 신학자라고 부릴 수 없다.

20. 그러나 십자가와 고난을 의미하는 하나님의 배후의 부분들과 보이는 것을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은 신학자라고 불릴 만하다.

21. 영광의 신학자는 악을 선하하다 말하고 선을 악하다고 말한다. 십자가 신학자는 실제로 진리인 것을 말한다.

22. 선행을 하는 것에서부터 알려진 대로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것들을 이해하는 지혜의 종류는 인간을 우쭐하게 만들고 인간을 눈멀게 그리고 강퍅하게 만든다.

23. 율법은 진노를 낳는다. 율법은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은 모든 사람을 죽이고, 저주하고, 죄책을 느끼게 하고, 심판하고, 정죄한다.

24. 그러나 이 지혜가 악하다는 것도 아니고 또 우리가 율법에서 도망쳐야 된다는 것도 아니다. 십자가 신학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가장 훌륭한 것들을 그들의 가장 악한 것들에게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25. 의로운 사람은 선행의 방식으로 아주 많은 것을 행하는 사람이 아니고 어떤 행위를 떠나 대단히 많은 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믿는 사람이다.

26. 율법은 말한다. ‘이것을 행하라.’ 그러나 그것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 은혜는 말한다. ‘그를 믿으라.’ 그러면 모든 것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다.

27. 그리스도의 행위는 그 행위가 선행을 하게 하는 효과가 있고 효력을 미친 우리의 선행으로 옳게 묘사될 수 있다.

28. 하나님의 사랑은 그 사랑의 대상을 찾지 않고 만들어 낸다. 반면에 인간의 사랑은 그 사랑의 대상에 의해 만들어진다.

 

1) 영광의 신학(theology of glory)

 

영광의 신학은 인간의 공로에 의지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될 수 있다는 중세의 신학을 말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로 대변되는 중세의 신학, 또는 스콜라 철학은 인간의 이성을 계시보다 우위에 둡니다. 루터는 중세의 영광 신학이 바울이 말했던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어지게 했다고 확신했습니다. 루터는 95개조 논제 58’에서 이러한 사실을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58. 이 보물 창고는 또 그리스도와 성자들의 공로도 아니다. 왜냐하면 교황 없이도 그리스도의 공로는 속 사람에게는 은혜를, 겉 사람에게는 십자가와 죽음, 그리고 지옥을 주기 때문이다.”

 

영광의 신학을 중세 스콜라 철학과 완전하게 일치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루터는 영광의 신학이 중세의 스콜라 철학에 기반하고 있으며, 인간의 타락을 왜곡시켜 그릇된 하나님의 지식을 심어 주었다고 믿었습니다. 영광의 신학은 하나님의 창조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추론해 갑니다. 온전히 인간의 이성만을 이용하여 논리적 귀결에 의해 하나님을 증명하고, 이해하는 방식을 취합니다. 캔터베리 안셀무스가 취했던 신존재증명이 바로 스콜라적 신학, 즉 영광의 신학입니다. 루터는 논제 19’에서 창조된 만물을 근거하여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것을 해석하는 이들은 신학자라 부를 수 없다고 말합니다.

 

영광의 신학의 모든 것이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근본적 오류는 인간의 지성과 행위에 의해 하나님을 발견하며 의롭게 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영광의 신학 근저(根底)에는 인간을 타락하게 한 교만이 숨겨져 있습니다. 인간이 타락했다고 말하면서도 완전히 타락하지 않은 이성을 통해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다는 중세의 신학은 루터가 보기에 전제 자체가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전제에서 출발한 영광의 신학은 결국 악을 선으로, 선을 악으로말하는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논제 21) 루터는 인간의 이성으로 하나님을 발견하고, 인간의 행위에 의해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영광의 신학을 거부했습니다. 인간은 어떤 수단과 방법을 사용해도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숨어 계시기 때문입니다.

 

2) 숨어 계시는 하나님(Deus absconditus)

 

루터는 히브리서 12:11을 주석하면서 감추어져 있는이란 표현을 네 번이나 사용합니다. 고린도전서 1:18,23을 근거로 십자가의 도가 사람들에 눈에 가려져 있기 때문에 거리끼고 어리석어 보인다고 말합니다. 영광의 신학이 거짓인 이유는 하나님의 숨어 계시며 인간의 이성으로는 절대 발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발견한 하나님은 참이 아니며, 거짓된 실재일 뿐입니다. 인간의 타락 이후 자력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합니다. 타락한 지성과 행위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의롭게 하지도 못합니다.(논제 2) 인간의 지혜가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하나님의 어리석음보다 못합니다.(고전 1:25) 이사야는 교만으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기에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합니다.(45:15) 인간은 하나님을 찾을 수 없고, 발견할 수 없으며,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타락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건널 수 없는 심연을 만들었습니다. 파울 알터하우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성은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반대로 이성은 항상 하나님 개념을 전혀 하나님이 아닌 어떤 것에 적용한다. 그것은 하나님과 술래잡기 놀이를 하고, ‘하나님을 잡으려고 손을 뻗지만 놓치고 말고, 진정한 하나님이 아니라 우상들, 사탄이나 인간의 영혼의 성취를 희망하는 꿈을 붙잡는다. 그러한 꿈 또한 사탄에게서 온 것이지만 말이다. 인간의 이성은 참된 하나님의 누구인지 모른다.”(루터의 신학 중에서)

 

바울은 분명히 계시된 하나님을 타락한 인간은 그것을 우상으로 바꾸어 버린다고 말한다.(1:23) 하나님께서 숨어 계시는 이유는 인간의 죄가 하나님을 볼게 없게 한 것이다.(59:2)

 

3) 계시하시는 하나님

 

그럼 하나님을 알 수 없을까요? 인간의 이성으로 하나님을 인식하지도 발견할 수도 없다면 인간은 하나님을 알 수 없을까요? 루터는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논제 20’에서 루터는 고난과 십지가 안에서하나님을 발견한 사람이 진정한 신학자로 부릅니다.

 

“20. 그러나 십자가와 고난을 의미하는 하나님의 배후의 부분들과 보이는 것을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은 신학자라고 불릴 만하다.”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오직 고난과 십자가 안에서만 그렇게 하십니다. 십자가 밖에서는 하나님을 자신을 계시하지 않기 때문에 십자가를 떠나서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곳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입니다.

 

하나님은 고난과 십자가 안에서 계시된다 그러나 그는 바로 이 참된 계시 안에 숨어 계신다. 인간의 지혜가 신성에 반대되는 것으로 간주하는 바로 그것들-약함, 어리석음 그리고 비하와 같은 것들 안에서 하나님 십자가의 겸손과 수치안에 계시되어 있다.”(알리스터 맥그라스 <루터의 십자가의 신학>)

 

그러므로 십자가의 신학은 인간의 사변과 반대됩니다. 영광의 신학이 타락한 이성의 사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면, 십자가의 신학은 십자가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계시의 신학입니다. 계시는 십자가에서 드러나므로 간접적이며 십자가 안에 숨겨져 있습니다. 계시는 피조 질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 안에서만 인식됩니다. 고난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을 발견한 이사야는 참으로 당신은 숨어계신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합니다. 즉 누구나 쉽게 하나님을 보았고, 발견했다고 말한 모든 것을 거짓이었으며 우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숨어 계십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신학은 낯선 것이며, 인간의 본성과 역행하는 것이며, 꺼리는 것이며,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은 십자가를 수치로 여기지만,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을 발견한 사람은 십자가를 하나님의 영광이요 자비라고 고백합니다. 십자가 신학은 하나님의 낯선 행위(opus alienum Dei)’를 통해 인간이 절망 가운데 있음을 보게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음을 알고, 저주받은 자임을 인정하게 됩니다. 루터는 진정한 신학자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살아 있는 것, 또는 오히려 죽은 것과 저주받은 채로 존재하는 것이 신학자를 만들지, 이해하거나 책을 읽거나 사변하는 것은 신학자를 만들지 못한다.”

 

인간은 하나님께 나아가기 전에 먼저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아무런 소망이 없으며, 전적으로 타락했으며, 어떤 행위도 하나님께 의로움이 되지 못함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 자신에게 철저히 절망해야 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기 위해 절규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어느 것으로도 구원받을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오직 십자가를 통해서만 자신이 구원 얻을 수 있음을 알게 됩니다.(논제 25)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십자가 안에서 죄인들에게 일방적으로 주어짐을 믿음으로 받게 됩니다. 죄인들은 어떤 것을 행함으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그를 믿음으로 의롭게 됩니다.(논제 26)

 

3. 나가면서

 

우리는 루터의 십자가 신학을 통해 그가 왜 종교개혁의 기치를 들어야만 했는가 쉽게 발견하게 됩니다. 루터의 십자가 신학은 인간의 이성을 통해 하나님을 이해하려 했던 중세의 영광의 신학과 공존할 수 없었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무지하며 자신의 어리석음과 악을 알지 못합니다.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에 대해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아직 자신의 힘으로 충분히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영광의 신학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도 않습니다. 중세의 타락은 도덕적 타락 이전에 심각한 교리의 타락이 있었습니다. 루터가 95개조를 발표했던 것은 그릇된 교리를 바로 잡고 싶었지 교회를 공격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중세교회는 루터의 공격을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것으로 알았고, 결국 그를 제거하려 했던 것입니다.

 

십자가 신학의 중심은 기독론이며, 오직 고난 당하시며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한다는 계시의 신학입니다. 인간의 타락한 이성으로 발견될 수 없으나 하나님을 안다고 착각합니다. 그들이 발견한 하나님은 우상에 불과하며, 하나님은 오직 십자가 안에서만 발견됩니다. 십자가 신학은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찾아오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자신의 의지와 행위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은 더 깊은 절망에 빠지게 될 것이며, 저주 아래 있는 자신을 발견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됩니다. 성도는 고난과 배척을 통해 구원하시는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그 길을 따라 걷는 제자의 삶을 살아갑니다. 십자가의 길은 곧 성도의 길이며, 십자가의 길은 하나님의 길입니다.

 

루터의 찬송

 

모두 찬양 드립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여,

인간이 되기까지 낮아지신 당신께!

동정녀 어머니에게서 땅 위에 나시고,

천사들은 당신의 찬송을 찬송합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영원한 아버지의 오직 한 아들

그의 보좌로 구유를 택하십니다.

우리의 비천한 구유를 택하십니다.

우리의 비천한 피와 살을 입으시고

이제 우리에게 영원한 선으로 오십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중략-

 

이 모든 것을 우리를 위해 행하셨습니다.

주님, 당신께서

그리고 당신의 헤아릴 수 없는 선이 나타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을 인해 온 교회가 이제 노래하며

영원한 감사를 당신께 드립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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