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고전 읽기]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생애와 사상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생애와 사상
1. 종교개혁 이전의 역사적 상황
종교개혁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운동이 아닙니다. 중세가 초대교회의 영향을 받아 일어난 시대적 현상이듯, 종교개혁 역시 중세가 낳은 시대적 아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개혁 사건은 혁명적이라 부를 만큼 중세와 너무나 다른 격변(激變)의 시기를 가져왔습니다. 종교개혁이 처음부터 폭풍처럼 몰아친 것이 아니었으며, 새로운 종교의 탄생을 기대하거나 원하지도 않았습니다. 루터의 95개조 사건은 교회의 개혁과 재건을 위한 루터의 작은 소망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나비의 날갯짓이 지구의 건너편에서 폭풍이 될 수 있듯, 그것은 사방에 휘발성 물질이 뿌려진 곳에 불타는 성냥을 던진 것이 되었습니다. 순식간에 활활 타올라 유럽은 걷잡을 수 없는 폭풍 속으로 휘말려 들어갔습니다. 그럼, 누가 휘발성 물질을 그곳에 뿌려 놓은 것일까요? 어느 누구를 꼭 집어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몇 사람은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철학적으로는 유명론을 주창한 윌리엄 오컴을 들 수 있습니다. 중세는 오래 전부터 보편과 개체에 대해 실념론과 유명론이 반론에 반론을 제기하며 끊임없이 대립해 왔습니다. 조선시대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의 이기론(理氣論) 논쟁과 비슷하다면 될까요? 결국 중세는 말기에 가까워 오면서 개체만이 실제라는 유명론쪽으로 기울게 됩니다. 유명론에 강력한 힘을 실어 준 사람이 바로 윌리엄의 오컴이었습니다. 오컴의 유명론은 보편교회만이 참 교회라는 중세적 교회관에 치명타를 날리고, 새로운 교회 즉 새로운 종교(기독교)의 탄생을 철학과 신학적으로 옹호하는 결과를 낳은 것입니다.
또한 교회의 타락과 사제들의 무지로 인해 교회는 점점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중세의 수도원 운동은 후에 타락의 온상이 되기도 했지만, 교회의 개혁과 부흥을 위한 몸부림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학과 철학의 변화, 교회의 타락, 그리고 또 하나의 휘발성 물질이 중세 역사 위에 뿌려집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과학이었습니다. 지동설을 이론적으로 주장한 니콜라스 코페르니쿠스의 등장은 지구 중심의 세계관을 뒤 흔들어 놓게 됩니다. 또한 농업 중심의 경제는 십자군 운동 등을 통해 상업 위주로 전환하게 됩니다. 농업은 한정된 지리적 공간 속에서 이루어지지만 상업은 ‘이동’을 통해 이윤을 남겨야 합니다. 대발견시대 또는 대항해시대가 14세기가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점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철학적, 지리적, 사회적, 문화적 배경은 지식과 권력을 독점하던 가톨릭교회를 조금씩 허물어갔습니다. 점점 이성의 눈을 뜨고, 다른 세계와의 교류를 통해 삶과 존재에 대한 물음이 드세게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배경 속에서 종교개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존 위클리프의 출현은 앞으로 도래하게 될 새로운 종교의 탄생을 알리는 전조가 분명합니다. 이제 그의 생애와 사상을 간략하게 살펴봅시다.
2. 존 위클리프의 생애
피터 마셜은 <종교개혁>이란 책에서 존 위클리프(1320년경 ~ 1384년)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잉글랜드 신학자 존 위클리프는 교황의 최고 권위를 성서의 최고 권위로 대체해야 하고 성직자가 어떠한 세속적 권위도 행사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등 당대 교회를 놀랄만큼 급진적으로 비판했다.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안다면 이러한 정의가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역사가들마다 이견이 존재하지만 대체로 위클리프는 1320년 또는 1328년에 태어납니다. 루터가 95개조를 주창한 때가 1517년 10월 31일인 것과 비교해 볼 때 무려 200년이 빠른 시기입니다. 에드워드 1세가 일으킨 마지막 십자군 전쟁이 1272년이었으니 존 위클리프의 출현은 서부 유럽의 기독교 왕국이 혼란의 시기를 보내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가톨릭교회의 교황의 권위는 하늘보다 높았고, 세속적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중세의 마지막 신비주의를 표방한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가 1418-1427경에 쓰인 것을 보아도 존 위클리프의 등장은 무려 백년 가까이 이릅니다.
존 위클리의 유년 시절과 학창시절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습니다. 다만 그가 옥스퍼드의 베일리어 대학에서 수학했다는 것만 전해집니다. 1340년대는 영국에 흑사병이 돌아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갑니다. 아마도 위클리프도 흑사병으로 인해 잠시 학업을 중단한 것으로 보입니다. 졸업 후 잠시 베일리어 대학의 학장이 되기도 했지만 일 년 만에 그만둡니다. 자신의 연구 수행을 위해 두 개의 성직록을 받습니다. 특이한 점은 비거주자의 신분으로 수행한 것입니다. 1372년 박사학위를 취득합니다.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지만 교황 그레고리 11세가 그에게 좋은 자리를 약속했지만 실망하고 국왕을 섬기는 직분을 얻습니다. 국왕이었던 에드워드 3세는 그에게 루터워스 교구를 하사하고, 위클리프는 그곳에서 죽을 때까지 떠나지 않습니다. 1377년 웨드워드 3세가 사망하고 리처드 2세가 즉위합니다. 그러나 그는 겨우 열 살에 불과했기 때문에 에드워드 3세의 4남이던 랭커스터 공작이 섭정을 합니다. 랭커스터 공작은 위클리프의 명성을 듣고 그를 왕궁에 초대하기에 이릅니다.
당시 교황청은 로마와 프랑스 아비뇽 교황이 대립하던 상황이었습니다. 전통을 이어받은 아비뇽 교황은 백년전쟁 동안 프랑스의 편에 서서 영국을 적대적으로 대했습니다. 영국은 그런 아비뇽 교황을 좋아할리 없었습니다. 아비뇽 교황이 다시 로마로 돌아가면서 교황은 친프랑스 추기경들을 추방합니다. 쫓겨난 프랑스 추기경들은 그들만의 교황를 선출함으로 새로운 국면에 들어섭니다. 위클리프는 이러한 시기에 외교관과 논쟁가로 활동하면서 교황과 교회의 민낯을 가감 없이 보게 됩니다. 어느 교황이든 친영국적인 사람은 없었습니다. 위클리프는 사태를 조망하면서 교황과 교회에 대한 회의감을 갖기 시작합니다. 위클리프는 교황이나 교회가 영적 한계를 벗어나 세속적인 방법으로 권력을 추구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며, 악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또한 교회의 부정을 옹호하는 식의 전통은 결코 성격적이지 않다고 역설합니다. 또한 그 어떤 권위보다 성경이 우위에 있으며, 교황이라할지라도 성경의 권위 아래 있다고 주장합니다.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 교황제도는 무너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더 나아가 1215년 가톨릭교회가 라테란 공의회를 통해 확정한 화체설을 부정합니다. 위클리프는 화체설을 미신이나 가현설과 다르지 않으며, 성육신을 부정하는 비성경적 가르침이라고 주장합니다. 위클리프의 주장은 당대로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파격적인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적지 않은 권력자들이 의문을 제기하고, 심지어 옥스퍼드 대학의 학자들까지 반론을 제기합니다. 결국 옥스퍼드는 1381년 경 그를 이단으로 정죄하기에 이릅니다. 위클리프는 쫓겨나다시피 하여 궁정에서 나오게 되고 조용히 저술활동에 전념하게 됩니다.
1384년 위클리프는 병으로 숨을 거둡니다. 그 직후 영국은 격정의 시간이 시작됩니다. 리처드 2세가 쫓겨나고 섭정이던 랭커스터 공작인 콘트의 존의 아들인 헨리 4세가 왕위를 찬탈합니다. 그렇지만 헨리 4세는 왕위의 정당성을 온전히 인정받지 못했고, 수많은 반란자들과 싸워야 했습니다. 결국 병으로 죽게 되고 세익스피어에 등장하는 헨리 5세가 즉위하게 됩니다. 천재적인 두뇌와 탁월한 리더십을 가진 덕에 그는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고, 프랑스까지 세력을 떨치게 됩니다. 헨리 5세는 화체설을 부인한 위클리프와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을 극심하게 핍박합니다. 위클리프는 죽어서도 편하지 못했습니다. 1415년 콘스탄스 공의회에서 대립교황이던 요한 23세는 위클리프의 개혁을 이어받은 얀 후스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위클리프를 부관참시하여 그의 저작들을 함께 화형식을 거행합니다.
3. 업적과 영향
역사가들은 존 위클리프를 ‘종교개혁의 샛별’이라고 부릅니다. 위클리프는 영국 안에서만 영향력을 미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영국을 넘어 영국해협을 지나 대륙으로 불씨를 옮겼습니다. 이곳에서는 성경 번역과 롤라드파에 대한 간략한 사항만을 언급하지만, 그의 영향은 두 가지 안에 조밀하게 엮어져 있습니다.
1) 성경 번역
비록 미완성이었기는 하지만 존 위클리프의 가장 위대한 사역이며, 앞으로 폭풍을 일으킬 나비의 날갯짓과 같은 것은 성경번역입니다. 그는 비록 불가타 역을 참조하기는 했지만 성경을 라틴어가 아닌 모국어인 영어로 번역을 시도했습니다. 현재 GBT(GLOBAL BIBLE TRANSLATORS)로 알려진 성경번역 선교회는 위클리프 국제 연대의 회원 단체입니다.
GBT : GBT는 성경 번역 선교를 위한 위클리프 국제 연대(Wycliffe Global Alliance)의 회원 단체로서 1985년에 설립되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의 언어로 된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전세계의 여러 성경 번역 단체들과 함께 자신들의 말로 된 성경이 없거나 성경 번역이 중단된 모든 지역에 성경 번역팀을 준비시켜 보내고 있습니다.[출처 GBT 홈페이지]
성경 번역 선교회는 위클리프가 시도했던 성경 번역 정신을 물려받은 것입니다. 종교개혁은 ‘오직 성경으로’에서 시작했고, 다시 ‘오직 성경으로’ 돌아갑니다. 그 어떤 권위나 전통보다 성경의 권위 위에 둘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종교개혁의 모토는 철학과 인문주의 영향을 받았지만 위클리프의 전통을 물려받은 것이기도 합니다. 성경 번역이 중요한 이유는 먼저는 그릇된 가톨릭의 절대적 권위를 무너뜨립니다. 라틴어로된 성경은 고등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들은 알 수 없기 때문에 사제들을 통해서만 성경을 읽고 배울 수 있습니다. 성경 번역은 모든 사람들이 직접 성경을 읽고 연구할 수 있도록 만듭니다. 링컨의 말로 알려진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위클리프가 모든 사람들에게 성경을 읽도록 하기 위한 구호였습니다.
위클리프는 <하나님 주권론>과 <시민 주권론>의 논문들을 통해 장차 도래할 민주주의를 위한 이론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종교개혁과 근대가 모든 권력이 시민에게 있고, 모든 성도는 직접 하나님께 기도하고 성경을 읽을 수 있다는 파격적인 선언은 위클리프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아직 종교개혁은 백 년하고도 오십년이 더 남았음에도 위클리프는 선구자로서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2) 롤라드파(Lollads)의 개혁운동
위클리프의 파격성은 성경 번역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교회사에 길이 남을 ‘롤라드파’가 위클리프에 의해 탄생합니다. 그는 자신이 이해한 복음을 널리 전파하기 위해 일종의 ‘순회 전도자들’을 결성합니다. 그들은 대부분 중.하층민들이었고, 위클리프를 헌신적으로 따랐습니다. 교회 사가였던 레토렛은 이렇게 기술합니다.
“그들은 길 가에서나, 마을 풀밭에서나, 교회 앞 마당에서나 또는 교회 안에서나, 청중을 모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느 곳에서나 전도했다. 그들은 발목까지 끌리는, 손질하지 않은 밭 빛깔 천으로 만든 법의를 입고, 손에 긴 지팡이를 들고, 샌들도 신지 않고 돈전대도 가지지 않은 채, 사람들이 주는 음식을 먹고, 그들에 제공하는 잠자리에서 잤다.”
롤라드파는 부패한 수도원을 개혁하려 했던 탁발수도사들과 닮아 있습니다. 그들은 청빈과 가난, 겸손과 도덕적 청결을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나 그들과 확연히 다른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롤라드파가 위클리프의 신학사상을 그대로 물려받았다는 것이며 탁월한 설교자들이라는 점입니다. 그들은 전국을 떠돌며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성경을 들고 다니면서 강해했습니다. 비록 전성경이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번역된 일부의 신약 성경과 시편 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성직자들의 우화나 성인들의 생애를 이야기한 반면 이들은 성경을 직접 강해하고 가르쳤습니다. 성경을 읽고 그것을 풀어주고 해석하는 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초기에는 성경을 강해하는 것이 중점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가난한 사람들이 많아지고, 교회와 성직자들의 부패를 지적하며 공격했습니다. 그들의 이러한 변화들은 얼마 가지 않아 핍박을 불러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1381년 영국에서는 프랑스와의 백년전쟁으로 인해 농민들이 삶이 피폐해져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을 정도까지 이릅니다. 세금을 내지 못한 농민들이 늘어나자 곤트의 존 (John of Gaunt)은 관리를 보내 알아보도록 합니다. 화가 난 농민들은 관리를 내아 쫓아 버리고 폭동을 일으킵니다. 이것이 바로 ‘1381 농민 봉기 (Peasants′Revolt)’입니다. 역사가들은 최초의 국민운동으로 부릅니다.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들의 빈부의 격차는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고, 흑사병이 돌고 있음에도 먹을 것이 없어 시달려야 했던 농부들은 나라에 대한 불만이 하늘을 찌를 듯 했습니다. 롤라드파는 농민을 선동했다는 오해를 받게 되고 핍박은 더욱 심해집니다. 1384년 존 위클리프는 평화롭게 눈을 감았지만 롤라드파는 더욱 큰 어려움에 봉착합니다. 1401년, 의회는 가톨릭의 지지를 받아 롤라드파가 설교한다면 그들을 화형에 처해야 한다는 ‘이단자 화형법’을 통과시킵니다.
헨리 4세는 1406년에는 반롤라드 법령을 만들고, 1407년에는 캔터베리 대주교가 런던 공의회를 열어 몇 가지 사항들을 선언합니다. 먼저는 허가 받지 않고 성경을 번역한 것을 정죄하고, 교회의 허락 없이 전도할 수 없게 합니다. 이것을 어겨 화형을 당한 롤라드파가 적지 않았습니다. 치명적인 사건은 1415년 콘스탄스 공의회에서 일어납니다. 가톨릭교회는 260가지의 위클리프 사상을 정죄하고, 그의 서적들을 불태우고, 위클리프의 시신을 무덤에서 꺼내 화형식을 거행한 다음 스위프트 강에 뿌리는 결정을 하게 됩니다. 1428년에 시행되기는 하지만 위클리프와 롤라드파는 끊임없는 박해 속에 놓이게 됩니다. 어두울수록 아침은 더욱 가까워지는 법. 화형식을 당한 위클리프의 재는 스위프트 강물에 뿌려집니다. 그러나 영국의 역사가인 토마스 풀러의 영국 종교개혁의 초석을 놓은 위클리프에 대해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들이 위클리프의 뼈를 불살라 시내의 급류에 던져버렸다. 그 던진 뼈의 재 가루는 아본강으로, 아본강은 그것을 세버른강으로, 세버른강은 그것을 좁은 바다로, 좁은 바다는 다시 큰 대양으로 흘러가게 하였다. 그리하여 재가 된 그의 뼈는 이제 온 세상에 퍼지게 되었다.”
4. 나가면서
존 위클리프의 생애는 이후 일어날 종교개혁자들과 닮아 있습니다. 루터가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듯 존 위클리프는 영어로 번역했습니다. 종교개혁가들이 학교를 설립해 교리를 가르치고 설교자들을 키웠던 것처럼 위클리프는 롤라드파를 결성하여 순회설교자들을 길러냈습니다. 영국의 부흥을 이끌었던 웨슬리 역시 순회 설교자들을 통해 영적 대 각성 운동을 성공시킬 수 있었습니다. 여러 면에서 아직 미성숙하고 부족하지만 위클리프의 신학과 생애는 이후의 모든 사람들의 좋은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그의 신학적 특징들을 좀 더 면밀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Book > 국민일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독교 고전 읽기] 존 위클리프의 성만찬론(De Eucharistia 1379) (0) | 2019.04.23 |
---|---|
[기독교 고전 읽기] 존 위클리프의 <목회직론> (0) | 2019.04.23 |
[기독교 고전 읽기] 토마스 아 켐피스 <그리스도를 본받아> (0) | 2019.04.23 |
[기독교 고전읽기]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신적 위로의 책> (0) | 2019.04.02 |
[기독교 고전읽기] 하나님께 이르는 영혼의 순례기, 보나벤투라 (1) | 2019.04.0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