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고전읽기]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신적 위로의 책>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신적 위로의 책>
1. 간략한 생애와 사상
오늘은 중세의 신학자요 철학자이며 독일의 신비주의자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신적 위로의 책>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독일식 명칭은 에크하르트 본 호흐하임(Eckhart von Hochheim)이며, 마이스터는 장인 또는 대가의 의미를 갖습니다. 에크하르트를 높여 부르는 존칭입니다. 1260년경 고타 근방인 호흐하임에서 태어납니다. 15세인 1275년에 도미니크 수도회에 입회하여 수도사의 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로부터 약 25년 후인 1300년 경에 에르푸르트 수도원장이 되며 튀링겐에서 교구장에 임명됩니다. 알베르투스 마그누스(Albertus Magnus)에게 수학합니다.
알베르투스 마그누스는 독일의 신학자요 철학자였으며, 특히 자연과학에 특출한 영민함을 보인 인물이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신학자요 철학자로 알려진 토마스 아퀴나스와 함께 스콜라철학을 완성시킨 인물입니다. 지난번에 살펴본 보나 벤투라가 플라톤 철학의 영향을 받았다면 토마스 아퀴나스와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등의 걸출한 인물들은 당대에 유행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의 영향 아래 있었습니다. 플라톤 철학이 보수적 관점을 가졌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진보적이며 개혁적인 성향을 지녔습니다. 후에 교황청에 이단으로 지목된 사건과도 연관이 깊습니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도 마그누스의 영향을 받아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사유의 기본 전제로 삼습니다.
1300년 즈음에 파리로 파송되어 프란체스코와의 논쟁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로 인해 에크하르트는 명성을 얻게 되고 1302년에는 파리대학에서 마기스테로의 칭호를 받으며 교수자격을 얻게 됩니다. 약 3년 정도를 머물다 1303년 말에 에르푸르트로 되돌아갑니다. 1304년 작센의 도미니크 관구장이 되지만 파리로 돌아가 3부작을 저술하기에 이릅니다. 바로 이 즈음, 파리 총회는 그를 비판의 대상으로 삼아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1307년부터 1311년까지 보헤미아 교구의 주교가 되어 그곳에 머물려 수도원을 개혁하며, 여성 수도원을 건립하기도 합니다.
1320년에 프랑크푸르트에서 이단 혐의가 있다며 교황청에 보고됩니다. 그러나 곧바로 시행되지 않고 5년이 지난 1335년 경에 이단조사가 착수됩니다. 그러나 1329년에 그의 모든 책은 금서(禁書)로 낙인이 찍혀 읽지 못하도록 막습니다. 1327년 요한 23세에게 항소하지만 거절당합니다. 결국 아비뇽으로 이동하는 중에 사망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영향을 강력하게 받았음에도 에크하르트는 신플라톤 주의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에크하르트의 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한국 안에서 그것을 밝혀내기는 쉽지 않습니다. 에크하르트는 종교 개혁자 루터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독일의 신비주의 사상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뿐 아니라 쿠자누스의 신학과 철학, 셸링과 헤겔 등 독일의 관념론과 현대의 실존주의자인 하이데거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어쨌든 교회사가 R.W 서던의 주장처럼 그는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우뚝 서 있는 이름’임에 틀림없습니다.
2. 주요 내용과 요약
<신적 위로의 책>은 헝가리의 왕 안드레아스 3세의 왕후였던 아녜스를 위해 저술한 것입니다. 아녜스는 수도원 밖, 즉 세속에 머물렀지만 끊임없이 수녀원을 세우고 지원해 주었습니다. 정확한 저술 연대를 불가능하지만 1318년경으로 추측합니다. 책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첫째 부분은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참으로 그리고 온전히 위로를 받을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둘째 부분은 서른 개의 근거를 제시합니다. 셋째 부분은 고통 중에 남긴 말과 행위를 모범으로 제시합니다.
[요약]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고후 1:3)
인간을 괴롭히는 세 가지 불행이 있다. 하나는 재산의 손실, 두 번째는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들에게 오는 불행, 세 번째는 자신에게 닥쳐오는 불행이다. 나는 이 문제들에 대해 위로할 수 있는 몇 가지를 적고자 한다.
제1부
우리는 무엇보다 지혜로운 사람과 지혜, 참된 사람과 참됨, 의로운 사람과 의로움, 선한 사람과 선함이 서로 얽혀 있고, 연결되어 있고, 관계 맺고 있다. 선함은 선한 사람 안에 자신을 낳고, 선함인 모든 것을 낳는다. 선한 사람과 선함은 완전히 하나다. 아들이 아버지를 자신 안에 모시듯, 선함은 선한 사람 안에 있다.
선함의 아들로서 선한 인간, 의로움의 아들로서 의로운 인간 곧, 신의 아들은 오직 의로움의 아들인 한에서, 이들 의로움은 낳아지지 않으면서-낳는 그런 것이며, 이들로부터 낳아진 아들은 의로움이 갖고 있는 존재, 그리고 의로움인 존재와 동일한 나의 존재를 갖는다. 신 가운데는 슬픔도 고통도 없다. 고통은 신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것이다. 의로움은 어떤 고통도 가할 수 없다. 고통을 없애기 위해 우리는 신에게 나아가야 한다.
두 번째는 의로움을 기뻐해야 한다. 선하고 의로운 사람은 외적인 손실이 닥쳐와도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확신은 그 어떤 것도 괴롭히지 못하게 한다. 결국 세 번째 이유로 넘어가는데 그것은 오직 신만이 모든 선한 존재, 본질적 진리, 그리고 유일한 샘이며 원천이라는 것이다.
제2부
[서른 개의 근거를 제시한다고 하지만 정확하게 제시하는 것은 아니며 몇 가지의 설명을 통해 설명해 나갑니다. 중요한 대목만을 추려 정리합니다.]
어떤 고통에도 즐거움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바울은 하나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위로를 제공한다고 말한다.
모든 고통은 사랑과 애착 때문에 생긴다. 그러므로 나는 덧없는 사물들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 이것은 하나님을 온 마음으로 사랑하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과 세상은 겸하여 사랑할 수 없다. 함께 사랑할 때 결국 하나님을 버리게 된다.
비록 저주와 고통이 따른다 해도 하나님과 함께 하기를 갈구해야 한다. 하나님은 신자들의 모든 것을 아시고 사랑하신다.
하나님을 위해 모든 것을 잃을 때 백배를 받는다.(마 19:29) 하나님께서 다시 채워 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얻는 자는 모든 것을 얻는 것이다.
손실은 고통이 아니라, 고통과 불행과 손실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위로가 아닌가. 우리는 오직 전인적으로 하나님을 닮아가기를 갈망해야 한다. 만약 돌이 황금이 된다면 더 많은 돌을 구하러 다닐 것이다. 우리가 받는 고통은 후에 황금이 될 돌과 같다. 그러므로 고통은 오히려 위로가 된다.
비움은 채우는 것이다. 세속을 벗어날 때 하나님으로 채워지고, 거룩한 것들로 충만해진다. 모든 피조물로부터 벗어나 하나님께 머물러야 한다.
인간이 고통받고 불행한 이유는 이것이다. 인간이 신에게 멀어져 있고, 피조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또한 신과 같지 못하고 그리고 신적 사랑에 차갑게 반응하고 있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끊임없이 위로받지 못하는 것이다.
덕은 신과 선을 위해 고통받고자 한다. 덕이 누리는 지복 전체는 신을 위하여(현재) 고통받음 가운데 있는 것이지, 이미 고통받았음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때문에 우리의 주님은 ‘의로움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씀하신다.(마 5:10)
내적 작용은 신적이며, 신과 같은 종류이며, 신적 속성을 지닌다. 내적 작용은 자신의 신성을 자신 안에 지닌다. 신의 심성에 의해 그리고, 그 가운데서 자신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창조한다. 내적 작용은 아들을 받아들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품속에서 아들로서 태어난다.
하나 가운데서 그리고 하나로부터 만 성령의 유출과 원천이 있다. 성령이 신의 정신이고 신 자신이 정신인 한, 성자가 인간 속에 잉태된다. 신의 아들인 모든 사람들에서 이러한 유출이 있게 된다.
[아마 이 부분이 에크하르트의 신 플라톤주의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목인 듯한 듯합니다. 번역이 난해하기도 하거니와 저자 자신의 글이 워낙 난해하기 때문에 개신교인들이나 철학을 전공하지 않은 이들에게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신성 속에 계시는 아들은 자신의 고유한 속성에 따라 아들-존재, 신으로부터 태어난-존재, 원천, 근원, 그리고 성령의 유출, 신의 사랑의 유출, 그리고 완전하고, 올바르고 전적인 하나의 향기, 곧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향기 이외에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 주시지 않는다.
신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사랑하고 자기 자신을 위해 모든 일을 행하신다. 이것은 그분이 사랑을 위해 사랑하시고 작용 자체를 위해 작용하신다는 것을 뜻한다. 선한 사람이 사랑하는 것은 낳아지지 않은 신-성부이고, 사랑하는 사람은 낳아진 신-성자이기 때문이다.
만약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자 한다면, 당연히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다. 신의 아들이 신성과 영원 속에서 고통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아들이 사람이 되어 고통당할 수 있도록 아들을 시간 속으로 보냈다. 그런데도 만약 그대가 신의 아들이 되고자 하면서도 여전히 고통을 당하고자 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전적으로 잘못하고 있는 것이다.
신의 아들은 그대들을 위해 고통받을 수 있기 위해, 본성상 인간에게 은총을 베풀고자 인간이 되였다. 당신에게 고통에 빠진 친구가 있다면, 고통받는 자와 함께 있고 또한 그렇게 함께 있음으로써 그를 위로하고 자신이 그에게 줄 수 있는 모든 위로를 갖고 그를 위로하는 것은 너무나 확실히 당연한 일일 것이다.
[에크하르트는 위의 사실을 통해 7가지의 가르침 또는 위로의 근거를 제시한다. 대략적으로 요약하면 이렇다. “신이 최고의 가치라면 신과 함께 고통받는 것보다 가치 있는 일은 없다. 그렇기에 무엇을 더 원하겠는가? 신은 고통받는 우리와 함께 하신다. 우리가 고통받는 친구와 함께 한다면 신의 긍휼이 함께 한다. 사랑한다면 함께 고통을 감내하는 것은 당연하다. 신이 나를 위해 고통받는다면 나에게 위로가 된다. 결국 신은 고통 가운데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와 함께 고통을 당하신다.” 에크하르트의 고통받는 신의 개념은 성육신의 의미를 광대하게 확장시켰으며, 기타모리 가조와 몰트만의 ‘하나님의 아픔의 신학’을 천년이 가까운 시기에 미리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에크하르트의 통찰은 근대의 신학을 뛰어넘는 높은 차원의 신의 개념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신학적으로 모호하고 위험한 것은 사실입니다.]
만약 선한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다면 고통은 고통도 불행도 아니다. 오히려 고통은 큰 행운과 지복일 것이다. 진리이신 아들은 의로운 때문에 고통을 받는 것은 복되다고 말씀하신다.(마 5:10)
제3부
고통이 나쁜 것인가? 아니다. 교부의 책에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나님께서 고통을 가져가 주기를 원하는가?’ 물었다. 아들은 ‘오히려 내가 기꺼이 고통을 당할 수 있도록 신이 나에게 은총을 베풀어주시기를 신께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답했다. 고통을 받는 것에 대해, 하나님은 최상의 것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한 만약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통 주시기를 원한다면 그것을 기쁨으로 받아야 한다.
3. 나가면서
에크하르트의 주장은 중세라는 시대에 걸맞지 않는 기이합니다. 그에 주장 속에는 교회나 교황의 권위에 관련된 이야기는 거의 찾을 수가 없습니다. 또한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복음이 아니라 정신(그노시스)으로서의 교리를 치밀하게 추구합니다. 그는 이전이나 이후의 어떤 신비주의자들보다 파격적으로 신과의 합일을 추구합니다. 특히 이 책에 나오는 ‘영혼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태어 난다’는 표현 등은 그의 해석을 직접 들어보기 전에는 이단의 교설처럼 보입니다. 또한 ‘아들이 되어라’라는 등의 주장 등은 아들-신이 된다는 의미로 오해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합니다. 에크하르트의 주장은 정신이 곧 신이라는 헤겔의 철학과 그와 맥을 같이하는 관념론의 전조를 읽을 수 있습니다. 역사가들이 에크하르트를 진정한 독일 정신의 기원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통과 가난, 애통하는 자들에 대한 성육신적 은유는 현대의 신학을 능가하는 탁월한 안목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고통 받으셨고,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고통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합니다. 비록 믿음과 정신이 혼용되고, 영혼과 신성이 모호하게 그려지고 있음에도 말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임재와 사람들 안에 내재한 ‘하나’ 즉 종교성을 적나라하게 그려냅니다. 수많은 곳에서 어거스틴의 주장들을 끌어와 자신의 주장을 옹호하는 것을 볼 때 교부 문헌에 정통했음을 보여줍니다. 디트마르 미트(Dietmar Mieth)는 ‘인간 에크하르트’에서 에크하르트의 성경 해석은 ‘신앙의 이해(intellectus fidei)’를 넘어 ‘신앙의 유비(analogia fidei)’가 우외를 차지한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표현은 이해를 추구한 안셀무스나 토마스 아퀴나스를 뛰어넘는다는 우회적 표현입니다.
에크하르트는 지금까지 살펴본 어떤 학자나 신비주의자들보다 특이하고 독보적인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는 중세의 인물이며, 개신교적 신앙관과 맞지 않습니다. 배울 점이 많으나 동일하게 경계해야 할 부분도 적지 않습니다. 에크하르트의 책은 이 책 외에도 다섯 권 정도가 더 번역되어 있지만 대부분 절판되었으며, 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다음 번에는 중세의 가장 탁월한 경건서이자 중세를 뒤흔들어 종교개혁의 문을 열게 만든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 받아>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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