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고전 읽기] 츠빙글리의 <주의 만찬론>
츠빙글리의 <주의 만찬론>
1. 들어가면서
츠빙글리의 성만찬론은 종교개혁사에서 매우 의미심장한 의미를 갖습니다. 루터와의 결별로 인해 가톨릭세력이 힘을 받게 됩니다. 다른 하나는 성만찬 논쟁에서 합의를 보지 못함으로 루터를 따르던 독일 중심의 종교개혁 운동은 루터파(Lutheran)가 되고, 츠빙글리는 중심으로 상징설을 주장한 이들은 개혁파(Reformed)로 완전히 갈라서게 됩니다. 현재 대부분의 유럽과 미국 등은 루터파가 아닌 개혁파의 후손입니다. 개혁파는 화란, 영국, 스코틀랜드 등의 다양한 나라로 번져나가면서 약간씩 상이한 교파를 형성하지만, 기본교리는 대부분 일치합니다. 하지만 루터파의 경우는 츠빙글리와의 결별 이후 독일 안에 머물게 되어 고립되고 맙니다.
약간 극단적인 평가이기는 하지만 루터의 성만찬은 공재설로 불리며 ‘임재’에 초점을 맞춥니다. 츠빙글리의 경우는 영적으로 임재하며 주의 죽으심을 ‘기념(상징)’하는 것이라 주장합니다. 루터와 츠빙글리의 성만찬은 ‘임재’와 ‘기념(상징)’의 대결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조직신학자인 벌코프, 루이스(Berkhof, Rouis, 1873-1957)의 경우 츠빙글리의 성만찬을 칼뱅 이후 성만찬론에 비해 덜 완성된 또는 부족한 성만찬의 개념으로 평가합니다. 물론 츠빙글리의 성만찬론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후대의 평가들은 츠빙글리가 갖는 시대적, 그리고 신학적 소용이 충분히 성숙할 수 없었던 시기라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츠빙글리의 성만찬을 읽을 때 루터의 공재설과 츠빙글리의 상징설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합니다. 루터나 츠빙글리 모두 가톨릭교회의 화체설(transubstantiation)을 부정했습니다. 화체설은 성만찬을 할 때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몸과 피가 ‘된다’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거룩한 피를 흘리면 안 되기 때문에 일반 신자들에게는 잔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루터는 그에 반대하여 마태복음 26:26의 ‘이것은 내 몸이다”(Hoc est corpus meum)’말씀을 근거로 예수님의 몸이 실제로 성만찬에 ‘임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사실 루터의 주장은 모호하기 그지없는 표현입니다. 표현상 ‘임한다’고 말하지만, 실재로는 ‘몸이 된다’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츠빙글리는 루터의 이러한 주장이 성경이 의도하는 바가 아니며 오히려 누가복음 22:19 등의 구절을 통해 알듯이 성만찬을 '기념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그 외의 구절 고전 11:24, 25) 결국 두 사람은 모든 부분에서 합의를 보았지만, 성만찬에서 결별함으로 아직까지 다른 길을 걸어야 했고, 종교개혁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만찬론을 읽을 때는 단순히 성만찬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성경해석의 차이로 인한 갈등이었습니다. 신론 중심의 츠빙글리 신학과 인간론 또는 기독론 중심의 루터의 신학은 성경해석에 있어서 미묘하지만 분명한 차이가 존재했던 것입니다. 츠빙글리는 루터가 가진 신비주의적 성경해석에 반하여 과도하게 역사-문법적 해석법을 적용하려 했던 것입니다. 루터와 츠빙글리는 엄연히 초대교회 안디옥학파의 성경해석법을 따랐습니다. 하지만 루터는 신비주의적 성향이 강한 탓에 알레고리적 성향을 가진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관점을 절충적으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루터의 성경 해석은 나쁘기보다는 적당한 수준에서 조화를 이루었기 때문에 훌륭했습니다. 하지만 성만찬을 이해함에 있어서는 중세적 신비주의를 완전히 배제하고 싶었던 츠빙글리와는 대립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두 사람의 성경 해석의 차이가 가져온 성만찬 논쟁을 염두에 두시고 츠빙글리의 성만찬론을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2. 요약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주의 말씀을 들으라. 울리히 츠빙글리가 모든 기독교인에게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가 평강을 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독생자를 보내 주시고 빛과 진리를 주셔서 영광과 진리를 알게 하셨다. 그분은 기도하면 들어 주신다고 약속하셨다. 나는 주의 몸의 성례에 관해 여러 번 썼다. 이제 다시 알고 있지만, 오해를 불식시키고 비판을 변호하기 위해 글을 쓴다. 난 그들의 악의가 ‘이것이 내 몸이다’라는 본을 오해한 것에서 왔다고 생각한다. 둘째는 이러한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그 본문의 의도를 밝힐 것이다. 셋째는 성경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하겠다. 마지막 넷째는 반론에 대한 답을 하고자 한다.
첫 번째 항목
어떤 이들은 십자가에 달린 그분의 몸과 피에 참여하고 빵과 포도주의 물리적 실체가 육신적인 몸과 피의 실체가 변화된다고 말한다. 그 다음 그들은 빵 아래에 있는 그리스도의 몸을 먹는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내 몸이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라 말한다. 이것을 논박하기 전에 성례가 무엇인지부터 알아보자.
성례는 거룩한 일의 표징이다. 주의 몸의 성례라고 말할 때 우리를 위해 죽임을 당하신 그리스도의 몸의 상징인 그 빵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신 몸이며, 그 몸의 성례가 빵이며, 그 피의 성례는 포도주로, 우리는 이것에 감사함으로 참여한다. 표징과 그것이 가리키는 것은 동일한 것이 될 수 없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의 성례는 몸 자체가 될 수 없다.
교황 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전능과 권세를 통해 말씀대로 된다고 주장한다. 나병 환자에게 ‘깨끗함을 받으라’고 했다면 깨끗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들의 주장은 분명히 옳다. 그러나 ‘이것은 내 몸이다’라고 말한다면 빵은 ‘몸’이어야 한다. 사소한 말장난으로 들리지만 생각해보라. 만약 빵이 오지 그리스도의 많은 지체 중 ‘몸’만 된다면 기이하지 않은가. 두 번째 허점을 들여다보자. ‘나는 포도나무다’라고 말씀하실 때 이것은 비유다. 주님은 포도나무가 아니라 비유적으로 사용했으며, 상징적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내 몸이다’에 적용해 보자. 어불성설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이것은 내 몸이다’를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것으로 해석한다면 명백한 오류다. 모든 성경은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만다면 치명적 오류들이 한둘이 아니다.
두 번째 오류를 생각해 보자. 그들은 성찬식에서 ‘내 몸이다’의 약속대로 ‘실체’가 된다고 말한다. 그것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 보자. 그런데 빵이 실제로 몸 즉 살이 되었는가. 만약 그들의 말이 맞다면 빵은 더 빵이 아니라 살이다. 하지만 그것은 살이 아니라 ‘빵’이다. 빵의 실체가 살의 실체로 변용되지 않았다. 이 얼마나 무서운 오용인가. 세 번째 오류는 주님은 이미 부활했다. 그렇다면 부활하신 주님의 몸을 먹는단 말인가? 우스운 것은 교황을 인정하는 자에게 교황의 법령을 통해서 그들의 오류가 드러난다. ‘교회 법령집’ 본문에도 ‘나는 우리가 제단 위에 놓는 빵과 포도주가 축성 이후에는 단지 성례, 즉 표징에 불과하다’고 했다. 이들도 성례를 상징과 표징에 불과하다 했다. 그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아니며, 본질적으로나 문자적으로서가 아니라 단지 상징적으로 사제가 그것을 만지며 쪼갠다. 신자의 입으로 씹는 것도 마찬가지다.
결론을 내려보자. 우리는 이 말 ‘내 몸이다’라는 말씀은 문자적으로 받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문자적으로만 말씀하시지 않는다. 우리는 이제 빵이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두 번째 항목
이제 그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주님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마 12:50)들을 ‘가족’이라 하셨다. 광야에서 오천 명을 먹이시면서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서 하라’(요 6:27)고 하셨다. 그 양식을 인자가 주는데, 인자는 하나님께서 인 치신 자이다. 주님은 자신을 친히 ‘생명의 떡’이라 소개하며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고 하셨다. 아들을 아는 자는 마지막 날에 살아 아니라 하셨다. 주님은 다른 곳에서 자신에게 오는 자들을 마지막 날에 살리리라고 약속하셨다.(요 6:44) ‘이것은 너희를 위해 주는 내 몸’이라는 표현은 주님께서 감당하신 고난이며, 몸은 죽음에 내어 주는 구속적 의미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 하셨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코자 하는 것은 영이니 몸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내 몸이 받아 먹으라’는 무슨 뜻일까? 이러한 구절들은 성경은 절대 문자적으로만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한다.
바울은 출애굽 때 홍해 사건을 세례로 비유하면서,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 10:3-4)고 했다. 이것은 명백히 구약의 조상들도 오신 분에게 소망을 두었다는 것을 말한다. 주님은 부활하셔서 몸을 입으셨다. 그러나 그분의 은총은 모든 곳에 쏟아진다.
세 번째 항목
첫 번째 항목에서 ‘이것은 내 몸이다’를 문자적으로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을 밝혔다 두 번째 항목에서는 성경을 통해 성례 시에 실제 몸으로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밝혔다. 이제 세 번째로 성경 전체로서 지니고 있는 뜻을 살펴보자. 사도신경에 주님은 부활하시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며, 거기로부터 심판하러 오신다. 그렇다면 성례 시에 실제의 몸으로 임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나는 포도나무다’하신 것을 ‘나는 내 몸이다’와 같이 해석하면, 주님은 포도나무에도 들어가 계셔야 한다. 이것이 맞는 말인가? 마태복음 13장에서 ‘씨’를 ‘말씀’이라 하셨다. 분명 씨는 말씀이 아니다. 이것은 비유다. 빵도 몸이 아니다. 빵은 만찬 안에서 그 몸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렸다는 것을 기억하게 한다. 유월절에 죽음의 천사는 어린양의 피가 문설주에 발린 집은 유월(넘어가다)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이것을 ‘기념’했다. 이것은 앞으로 올 시대의 표상이 되었다.
성만찬은 빵을 우리에게 주시며 예수의 십자가의 죽임을 기억(기념)하게 하셨다. 이런 의미에서 ‘빵’은 우리를 위해 내어주신 주님의 ‘몸’이다. 주님은 떡과 잔을 주시며 ‘이것은 내 몸이’ 또는 ‘내 피니’ 말씀하시고 ‘나를 기념하라’(고전 11:24,25) 하셨다. 애굽에서의 탈출은 구속의 모형이고, 표징이다.
네 번째 항목
‘참여함’이란 단어의 뜻은 공동체적 의미다. 우리는 축복함으로가 아니라 감사함으로 그리스도의 공동체에 참여한다. 여기서 ‘한 몸’ ‘한 빵’은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교회이다. 교회는 우리를 위해 몸과 피를 준 그리스도를 고백한다. 바울은 ‘다 한 빵에 참여한다’고 했다.(고전 10:17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리스도는 몸으로 우리의 성찬에 임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하다.
3. 나가면서
루터의 글이 서정적이고 예리하다면 츠빙글리의 글은 치밀하고 대담합니다. 중세의 신비적 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한 루터는 한사코 츠빙글리의 글을 인정하지 못합니다. 객관적 시선으로 바라볼 때 츠빙글리의 글은 반론의 여지가 없어 보였지만 루터는 아니었습니다. 루터가 보기에 츠빙글리의 성만찬론은 인간의 기교적 행위와 기념 행위에 불과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루터와 츠빙글리는 주님이 직접 ‘몸이 된다’는 화체설을 부정했지만, 합일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루터는 화체설까지는 아니지만, 주님은 분명히 성찬 때에 ‘함께’ 계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츠빙글리는 성경을 조목조목 주해하고 분석함을 통해 그리스도가 실제로 임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던 것입니다. 루터의 공재설과 츠빙글리의 기념설은 비성경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뭔가 확연히 부족하고 어색했습니다. 츠빙글리 성만찬론은 받아들인다면 성만찬은 단지 ‘기념’ 행위에 불과한 것이 됩니다. 루터는 츠빙글리의 이러한 논리에 도무지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너무나 경박해 보이는 츠빙글리의 성만찬론은 루터에게는 ‘영이 다른 사람’으로 비추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후에 다시 다루겠지만 칼뱅은 루터의 공재설과 츠빙글리의 기념설을 결합하여 ‘영적 임재설’을 주장합니다. 성령, 즉 그리스도는 영을 통해 성만찬 때에 우리와 함께한다고 말합니다.(기독교 강요 제4권 17장) 루터와 츠빙글리는 전혀 다른 지역에서 비슷한 시기에 종교개혁을 일으켰습니다. 만약 그들이 성만찬론에서 합의했다면 역사는 어떻게 하면 되었을까요?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두 사람의 갈라섬은 두고두고 아쉬움을 남깁니다. 칼뱅은 명료하고 천재적인 이해력을 가지고 루터와 츠빙글리가 쌓은 토대 위에 종교개혁 신학을 정교하게 세우게 됩니다. 탁월한 칼뱅의 저술들은 루터와 츠빙글리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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