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고전 읽기] 츠빙글리의 <하나님의 말씀의 명료성과 확실성>
츠빙글리의 <하나님의 말씀의 명료성과 확실성>
1. 들어가면서
마르틴 루터기 ‘이신칭의’에 집중했다면 츠빙글리는 ‘하나님의 주권 사상’에 중심을 두었습니다. 츠빙글리는 초기에 루터의 영향을 받지 않았고 인문학적 방법을 통해 성경을 연구하고 사역을 하는 과정에서 루터와는 전혀 다른 양상의 신학을 전개하게 됩니다. 루터와 츠빙글리는 비슷하면서도 어떤 부분에서는 극단적으로 견해가 달랐습니다. 특히 성만찬에서는 루터가 츠빙글리를 향해 ‘영이 다르다’라는 표현까지 서슴지 않을 만큼 극명한 차이가 났습니다. 이것은 루터의 신학이 중세의 신비주의적 성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루터의 신학은 신비와 모호함을 그대로 둔 상태로 신학을 전개했습니다. 특히 그의 ‘십자가 신학’은 ‘이신칭의’는 캔터베리 안셀무스의 부정신학(via negationis)을 어느 정도 전제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부정신학은 온전히 파악할 수 없는 하나님을 신비 속에서 파악하려는 일종의 몸부림이었습니다. 루터는 부정신학을 뛰어넘어 역설의 신학을 전개하기에 이릅니다. 루터의 십자가 신학은 루터 신학의 정수라 할 만큼 신비롭고 역설적이었습니다.
이에 비해 츠빙글리는 루터와는 너무나 다른 하나님 주권 사상을 강하게 드러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통치하시고 주관하신다는 보편적 원리에서 신학을 개진해 나갑니다. 하나님 계시의 우월성과 선택과 은총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 등이 츠빙글리의 중요한 신학의 토대입니다. 인간의 죄성과 타락에 무게중심을 둔 것과 다르게 츠빙글리는 신학의 중심을 하나님께 두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츠빙글리의 신학은 신론에 무게중심을 둘 수밖에 없었고, 성경을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이며 말씀으로 강조하기에 이릅니다. 루터의 이신칭의가 인간의 죄성에 무게 중심을 둔 것에 반하여 츠빙글리는 죄인을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에 더 중심을 두었던 것입니다.
츠빙글리는 하나님을 표현할 때, 하나님의 자존과 하나님의 선, 그리고 완전하심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자존은 그 어떤 것으로부터 의존되지 않으시고 영향받지 않으시며 홀로 계시는 것 자체(being)를 말합니다. 영원하시고 무한하시며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의 신성 속성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종종 ‘초월하신 하나님’으로 표현하곤 합니다. 두 번째는 ‘선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초월을 근대의 이성론자들은 이원론(二元論, dualism)으로 오도(誤導)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초월해 계시는 동시에 내재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창조하실 뿐 아니라 섭리하시며 작정과 구속을 통해 선(善)을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의 선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구속의 역사 속에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선은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와 구원이기에 ‘능동적인 선’입니다. 하나님의 완전성은 무소 부재와 전지전능,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역설적 주권을 통해 사람에게 드러나는 속성입니다. 츠빙글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지만, 신적 속성 자체가 아닌 인간과의 관계와 구속의 의미에서 해석합니다.
츠빙글리의 신학은 칼뱅에 의해 대부분 수용되며, 개혁주의 신학의 토대가 됩니다. 칼뱅과 제네바 개혁주의, 화란과 영국의 청교도로 이어지는 츠빙글리의 신학은 현대 개혁주의 신학의 아버지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츠빙글리는 루터와의 성만찬 합의에서 결렬됨으로 전쟁을 치러야 했고, 결국 젊은 시기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맙니다. 그렇기에 그이 신학은 많은 부분 완성되지 못했고, 다듬어지지 못했습니다. 그가 좀 더 오래 살았다면 루터를 능가하는 개혁주의의 신학을 마련했을 것입니다. 이제 츠빙글리의 중요한 설교인 <하나님의 말씀의 명료성과 확실성>을 하나님 주권 사상에 입각하여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2. 요약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
세상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은 가장 경이로운 인간을 창조하려 하셨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26-27) ‘우리가 만들자’라는 한 하나님이시며 세 인격의 하나님을 표현한다. 또한 ‘우리의 모양’이라고 하셨지, ‘모양들’이라고 하지 않으셨다. 다수의 본질이나 ‘신들’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하나 됨’과 인격의 ‘셋 됨’을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몸과 영혼 중에서 어느 것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을까? 만약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면 하나님은 해체되고 말 것이다. 이것은 비기독교적이며, 이단적이며, 신성 모독적이다. 요한은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요 1:18)고 말한다. 하나님이 인간의 모양을 가졌다고 말하는 어리석은 멜리톤과 신인동형론자들은 분명히 잘못되었다. 눈과 귀, 손 등은 하나님의 사역을 위한 표현일 뿐이다. 눈은 세상에 대한인지, 귀는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입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은 형상으로 하나님을 만들지 못하게 하셨다. 또한 ‘하나님을 볼 수 없다’고 하셨다. 그렇다면 우리의 마음과 영혼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말한다.
어거스틴 등 고대 교부들은 인간이 지성, 의지, 기억 세 기관으로 되어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 하나님의 존재와 삼위의 위격을 가진 하나님의 모양인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 안에는 이원성과 모순이 없다. 우리는 인간의 몸이 아닌 영혼과 관련해서 하나님의 형상 안에 인간이 존재한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영혼의 세 능력인 지성과 의지, 기억보다 더 특별하게 하나님의 형상을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이 존재한다. 특별히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보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에 대한 확고한 표지가 된다. 처음은 예시를 통해, 다음은 성경을 통해 설명하겠다.
인간을 식물과 비교해보자. 식물은 인간의 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식물은 인간과 너무 달라 교제나 사귐이 없다. 짐승은 식물보다는 약간 더 인간에 주목한다. 짐승은 식물보다 인간에 더 가깝고 구조도 비슷하다. 인간은 이성적일 뿐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본다. 본성상 하나님과 가까우며 연관되어 있다. 인간은 짐승보다 하나님을 더 닮아있고, 관계를 맺고 있다. 이것은 의심할 바 없이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는 것을 말한다. 바울은 ‘우리가 그의 소생’(행 17:28)이며, ‘하나님의 소생’(행 17:29)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영은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시 82:6)이라고 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참 이스라엘 백성이며 그분의 기업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을 갈망하고 그분의 말씀을 만물 위에 두고 믿는다.
인간에게는 열망이 있다. 영원한 복락에 대한 열망, 이생 이후의 생에 대한 소망이 있다. 모든 인간은 영원한 기쁨을 갈망하며, 마침내 끝나게 될 생에 대한 허무를 한다. 인간을 필연적으로 절망적 존재이다. 허무를 느낀다. 사람은 영에 속한 일들을 감당하지 못한다.(고전 2) 영원을 믿지 못하는 이들은 육적인 일에 몰두하기 마련이며, 본성적으로 스스로 저주받고 멸망 받을 것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혀있다. 그들은 오만하고, 약탈하고, 불경하고, 절망하며, 분노하고, 슬퍼하면서도 오류에서 떠날 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영원에 대한 갈망을 지우지 못한다. 인간 안에 있는 영원에 대한 갈망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는 증거다. 창세기는 사람이 흙으로 지어졌지만, 그 안에 하나님의 생기가 넣어졌다고 말한다.(창 2:7) 아담은 물질적인 생명뿐 아니라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갈망을 지니게 되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고, 심어졌다. 이것은 인간을 창조하신 분과 가장 가까운 관계를 누리도록 하기 위함이다.
우리 안에는 속사람이 존재한다. 바울은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속사람은 날로 새롭다고 말한다.(고후 4:16) 속사람은 날로 강해진다. 또한 선을 행하며,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한다.(롬 7:22) 이것은 우리의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의 형상이다. 인간의 본성을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지 못한다. 우리의 몸은 사망의 몸이며 비참한 존재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로 돌아가야 한다. 인간의 속사람은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하나님은 영혼의 신랑이요 남편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을 힘을 다해, 목숨과 뜻을 다해 사랑해야 한다. 그분의 말씀보다 우리를 더 위로하고 기쁨과 확신을 주는 것이 없다.
하나님의 말씀의 확실성과 권능
하나님의 말씀을 확고하고 강하다. 말씀하시면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말씀을 살아있고, 강력하며, 모든 것을 순응하게 한다. 모든 피조물은 그 목적에 부합하게 지어졌고, 보내지며 제한된다. ‘빛이 있으라’ 하시면 ‘빛이 있다.’. 이보다 더 강력한 말씀이 있을까? 땅은 싹이 돋고, 물은 물고기를 내라 하시자 곧바로 되었다. 이것이 말씀의 위력이다. 타락한 하와에게 임신하는 고통을 더한다고 하시자 그렇게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김없이 이루어졌다. 출애굽 때도 모세를 통해서 하신 말씀이 모두 이루어졌다. 이제 예수님으로 돌아가 보자. 예수님은 나병 환자에게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마 8장) 하시자 나음을 입었다. 백부장의 하인도 말씀하신 즉시 나았다.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자 그에게 나와 돼지 떼에게 들어가 몰사했다. 밤새 수고한 제자들에게 ‘오른편에 그물을 내리라’ 하자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이 잡았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한이 없고 불가능이 없다. 다만 하나님의 ‘때’에 이루어진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가능하시지만, 아무 때나 말씀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말씀의 명료성
말씀의 명료성이란 무엇일까? 말씀이 이해되기를 원하신다면 왜 비유로 말씀하셨을까? 비유와 잠언과 수수께끼로 말하는 이유는 사람들의 이해에 호소하여 그들을 지식으로 인도하고 그 지식을 확대하기 위해서이다. 비유나 격언은 우리에게 숨겨진 의미를 찾도록 자극한다. 이러한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이 지성에 작용하고 오래 남게 되어 마음 깊이 뿌리 내리게 한다. 씨뿌리는 비유를 살펴보자. 이 비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비유는 불경한 자들을 몰아낸다. 그들은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아도 보지 못한다.(이사야 6장)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면 황폐하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할 때 수많은 재앙이 따른다고 성경은 경고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는 향기로운 냄새와 맛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생명의 냄새가 되고, 어떤 이들에게 죽음의 냄새가 된다.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그만큼 말씀과 멀리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지성에 비추어 이해하고 고백하며 확실하게 하신다. 다윗은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시 119:130)라고 말했다. 이것을 동시적인 혹은 선행적인 말씀의 명료성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탄생 시에 외적으로 현현했다. 목자들은 주님의 영광을 보았고, 천사들의 이야기를 듣고 찾아갔을 때 예수님의 탄생을 눈으로 목격했다.(눅 2장) 노아는 하나님께 방주를 지으라는 말씀을 들었고 순종했다. 하나님으로부터 그 말씀이 왔다는 것을 확신했기에 순종했다. 아브라함도 아들을 바치라는 말씀을 듣고 순종했다. 이성적인 모순이 존재했지만, 말씀에 순종했다. 모세도 지팡이로 홍해를 가리킬 때 갈라졌다. 하나님의 말씀을 명료성과 확신으로 다가온다.
신약 성경을 살펴보자.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이신 아들이 모든 사람에게 비춘다고 했다. 빛이 비침으로 모든 이들에게 밝음이 되었다. 사마리아 여인도 ‘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요 4:25)라고 했다. 성경에 대한 이해는 그리스도에게서 직접 온다. 우리는 누군가를 통해 배우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나누어주신 이해력을 따라 배우고 확신한다. 아버지께 배운 자들은 예수님께 가기 마련이다.(요 6:45) 아버지께서 이끌지 않으면 ‘내게로 올 자가 없다’(요 6:44)고 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배워야 한다고 말하지만 성경은 하나님께 배우라고 하신다. 바울은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2:12)고 하셨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사는 하나님의 영으로 알려지신다.
기독교인은 모두가 제사장이요 영적인 예물을 드리는 자들이다. 문제가 있거나 이해되지 않는다면 그분께 직접 물어야 한다. 사람의 의견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모든 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다. 복음서에 기록된 말씀으로 가라. 그러면 그분이 우리에게 빛으로 비추시고, 깨닫게 하신다. 중재자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성령을 통해 직접 가르치시고 이해시키신다. 하나님의 뜻은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교사가 되어 가르치시는 것이다. 말씀을 명료하고 결코 우리를 어둠 속에 내버려 두지 않는다. 말씀은 진리를 가르치고, 구원과 은총으로 사람들의 영혼을 비춘다. 말씀을 자기를 놓고 하나님을 붙잡도록 하신다. 이제 하나님의 말씀이 이해되도록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먼저, 옛사람을 죽이고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둘째, 우리 안에 옛사람이 죽고 그분만을 신뢰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셋째, 포기하지 말고 계속해서 읽고 위로를 받아야 한다.
넷째,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에게 증언된다.
다섯째, 하나님의 말씀은 높은 자를 낮추시고, 낮은 자를 높이신다.
여섯째, 하나님의 말씀을 가난한 자와 겸손한 자를 위로하고 교만한 자를 대적한다.
일곱째, 말씀은 자신을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
여덟째,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거짓 교사들도 있다.
아홉째, 하나님의 말씀이 새롭게 들려진다면 분명 하나님의 역사이다.
열째,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에 대한 확신을 준다.
열한째, 말씀이 그대를 부수고 무너뜨리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다.
열두째, 하나님을 경외할 때 슬픔보다 기쁨이 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영의 확실한 사역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 영을 허락하소서. 아멘
3. 나가면서
츠빙글리의 설교는 한 편의 논문처럼 치밀함과 실용성이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신학을 전개하면서 철학적 사변에 의지하기보다 성경에 나타난 사건과 이야기를 끌어와 들려주는 방식을 취합니다. 현대의 조직신학적 성향을 다분히 가지고 있지만 논증하는 방식은 사뭇 다릅니다. 츠빙글리는 성경의 명료성을 성경 자체로 한정시키지 않고, 인간의 이성 속에 작용하는 성령의 조명과 확신케 하심을 함께 다루고 있습니다. 인간의 안목으로 판단하기에 모호한 부분들을 성경적 논리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사역과 성령의 일하심을 추론해 나가고 있습니다.
종교개혁가들이 그렇듯 츠빙글리도 어거스틴의 성령과 문자(De Spiritu Et Littera)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성령이 없으면 인간의 이성을 통해 성경을 파악하고 해석하기 때문에 그릇된 길로 갑니다. 성경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해야 합니다. 츠빙글리는 기록된 말씀에 집중하면서도 해석을 위해서는 성령의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또한 전후 문맥을 통해 해석하고, 다양한 의미와 역사와 문화적 상황 등을 고려했습니다. 이러한 츠빙글리의 성경 해석법은 세례와 성만찬 해석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됩니다. 루터가 중세의 신비적 전통에 기대어 철학적 사유에 기댔다면, 츠빙글리는 성경의 문자 그 자체를 받으려 했습니다. 신약의 관점에서 구약을 해석했고, 신구약의 단절보다는 연속 선상에서 합력하는 관계로 보았습니다. 구약은 신약의 빛 아래서 읽어야 하고, 구약에 의해 신약의 의미가 더욱 명확히 드러난다고 보았습니다. 츠빙글리는 신구약이 상호보완하고 협력하여 하나님의 뜻을 분명해 드러낸다고 보았습니다.
츠빙글리는 루터의 주장처럼 그 어떤 교회의 전통이나 권위보다 성경의 권위를 우위에 두었습니다. 이점에서는 루터보다 더 좁은 의미로 해석했음이 분명합니다. 루터는 성경이 언급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 어느 정도 선택의 자유가 있다고 보았지만, 츠빙글리는 성경적 원리에 의해 상당 부분 자유가 억제되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츠빙글리를 따른 개혁주의가 더욱 과격하고 엄격한 반 중세적 성향으로 나아갔지만, 루터교회가 중세 가톨릭적 성향을 그대로 보존했던 이유는 이러한 성경해석의 차이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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