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현 목사의 [만찬, 나를 먹으라]를 읽고
만찬은 혁명이다.
김기현 목사의 [만찬, 나를 먹으라]를 읽고
죠이 선교회
‘만찬은 혁명이다.’ 현대 교회는 만찬을 잃어 버렸다. 도식화되고 상징화된 성만찬 예식은 소통이 아닌 불통이고, 순종이 아닌 반역에 가깝다. 초대교회가 핍박 받았던 이유 중 하나는 ‘만찬’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으로 불리는 그들은 배타적 공간에서 식사를 하며 교제한다. 식사의 재료는 인육(人肉)이라는 오해였다. 예수의 죽으심을 기념하기 위하여 재정된 만찬을 오해한 것이다. 만찬은 외부자의 시각으로 볼 때 위험 천만한 혁명적인 것이었다.
저자는 이 책의 의도가 앞선 책 <예배, 인생 최고의 가치>의 2부로 소개 한다. 그렇다면 이 책은 예배 안에서의 만찬으로 한정지을 수 있겠다. ‘나를 먹으라’에서 ‘나’를 이중적 의미를 담았다. 나는 예수님이시다. 그렇다면 만찬은 예수를 먹는 행위다. 예수는 친히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고 요한복음을 통해 말씀하신다. 그 다음의 ‘나’는 ‘나’이다. 예수께서 그러하셨던 ‘나’는 성도와 이웃에게 밥이 되어야 한다. 나는 누군가의 음식이고, 누군가를 살려야하는 양식이다. 바로 이곳에 만찬의 혁명성이 존재한다.
인간은 이기적이다. 남을 희생시키고 ‘나’를 살린다. 그러나 만찬은 ‘나’를 죽여 타인을 살린다. 세상의 원리와 어긋나고, 생물학적 본성에도 반한다. 예수가 자기를 죽여 세상을 구원하듯 만찬은 예수의 제자로서의 자기희생적 삶을 따른다. 제자로서의 표지를 드러내는 삶으로서 열두 가지로 분류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냄으로서의 표식, 기억, 부활, 나눔이 있고, 친교와 화합의 의미로서 대접, 식사, 용서, 일치가 필요하다. 마지막은 ‘나’의 개인적 삶으로서 실천, 생명, 대결, 기쁨이 제시 된다.
베드로가 예루살렘에서 오는 유대인들로 인해 외식했다. 바울은 이것을 공개적으로 책망한다. 책망의 내용이 특이한데,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것’이지 율법이 아니라고 말한다. 무슨 말인가. 이방인과 식사하지 않는 것이 무엇이 큰 죄란 말인가. 만찬의 핵심은 세상의 모든 경계와 구분을 넘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었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베드로의 외식은 이러한 예수께서 정하신 만찬의 의미를 무너뜨리고 율법으로 회귀(回歸)하는 것이다. 만찬의 혁명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주의 만찬은 용서'(88)다. 구약의 피뿌림 의식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속쇠사역의 그림자다. 구약에서의 밑구림들을 '한 곳으로 수렴'(89)한 것이 만찬이다. 용서는 단지 원수라는 한 부류만을 한계짓지 않는다. 만찬은 민족, 나라, 인종, 신분을 뛰어넘는 용서이다. 고린도 교회의 만찬의 패덕[悖德]을 지적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것이야 말로 사람과 사람을 차별하고 배제하며 교회를 분열 시키는 잘못이다. 교회란 하나님과 원수 된 우리가 십자가에서 몸을 주신 주님 덕분에 화목해지고, 그런 이들이 모여 서로가 서로에게 예수님 노릇하는 곳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영혼와 육체의 음식이 되어주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이의 양식이 되는 것이 만찬의 본질이자 교회의 참 모습입니다."(105)
만찬을 회복해야 한다. 혁명적 교제와 나눔, 그리고 실천의 표지인 만찬의 회복이야 말로 교회의 생명력을 회복하는 지름길이다. 그곳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교제와 나눔이 있고, 사랑과 일치가 상시한다. 초대교회는 만찬을 하며 자신도 예수처럼 몸이 찢겨지는 순교적 삶을 각오했다고 한다. 적은 무리로 세상을 두렵게 하였던 초대교회의 비밀은 만찬에 있다. 함께 먹음으로 밑으로부터의 혁명을 차근차근 만들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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