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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밭의 비유, 깨닫는 자, 마 13:10-23

샤마임 2020. 1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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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밭의 비유(깨닫는 자)

마 13:10-23

1.개요

마태복음 13장은 7가지 비유로 되어 있습니다.
① 네 밭의 비유(1-23절)
② 가라지의 비유(24-30절, 36-43절)
③ 겨자씨 비유(31-32절)
④ 누룩비유(33절)
⑤ 감추인 보화 비유 
⑥ 진주장사 비유(45-46절)
⑦ 그물 비유(47-50절)

비유의 특징을 보면 확연히 초반부와 후반부의 비유가 다르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초반부 비유인 네 밭, 가라지, 겨자씨, 누룩 비유는 성장과 관련이 있습니다. 나머지 감추인 보호와 진주장사, 그리고 그물 비유는 가치의 전환과 종말론적 심판이 담겨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전체 주제이기도하고, 13장의 비유의 전제이기도한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우리 가운데 임하며, 임했고, 실현되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마태복음 13장의 비유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네 밭의 비유는 나머지의 비유를 여는 문인 동시에 전체를 담아내고 있는 큰 그릇과도 같습니다. 네 밭의 비유에서 가장 핵심적인 단어는 ‘깨듣다’입니다. 즉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고, 깨닫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깨닫느냐 깨닫지 못하느냐에 따라 그들의 운명이 갈라지고, 그들의 누구인지 드러내줍니다. 11절에서는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라 표현되어 있고, 13절 14절 15절 19절 23절에서는 ‘깨닫다’라는 표현이 연이어 등장합니다. 모든 비유를 마친 51절에서는 예수님께서 ‘깨달았느냐’라고 묻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고향으로 돌아가서 회당에서 가르치시는데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놀라지만 예수의 지혜와 능력이 어디서부터 왔는지를 알지 못하고 배척합니다.(57절) 그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이 말씀은 결국 고향의 사람들이 ‘깨듣는 것’에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함으로 영원한 저주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오늘은 ‘깨닫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네 밭의 비유를 이해해 봅시다.


2. 좋은 땅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이다.


23절로 곧장 가보겠습니다. 그곳에 보니 좋은 땅에 무엇인지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23절을 읽어 봅시다.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이 말씀을 역으로 해석해 봅시다. 깨닫지 못하는 자는 좋은 땅이 아닌 나머지 길가, 돌밭, 가시밭에 떨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씨가 떨어졌으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상태가 바로 깨닫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11절에서는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자들을 말합니다. 주님은 그러한 자들을 이사야 말씀을 인용하여 그들의 상태가 어떤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이사야 6:9-10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사야 6:9-10] 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10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이사야 6장은 이사야의 소명장입니다. 이사야가 타락한 이스라엘을 걱정하며 근심하며 기도할 때 하늘에 높이 들린 보좌를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말씀하시자, 이사야가 ‘나를 보내소서’라고 대답합니다. 바로 이때 하나님께서 이 백성들이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아도 알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과 귀를 둔하게 하여 듣지도 보지도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언제까지 그렇게 하느냐? 이 땅이 황폐하여 질 때 까지, 즉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여 더 이상 이곳에 사람이 살 수없는 지경에 이를 때까지 하시겠다는 것이죠. 마치 애굽 왕 바로가 하나님의 기적과 이적을 보고 마음을 완악하게 하여 고칠 생각을 하지 않을 때 하나님은 계속하여 심판하시고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게 하십니다.

우리는 ‘깨닫다’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자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첫 번째 조건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 즉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3. 깨닫는 자의 삶


그렇다면 깨닫는 자들은 어떠한 삶을 살아갈까요? 18-23절까지의 상황을 봅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단어의 중의 하나는 ‘뿌리’ 또는 ‘뿌리내림’입니다. 뿌리는 씨앗이 싹이터서 자라기 위한 필수 요소입니다. 땅에 깊이 뿌리를 내려야 땅 속에 있는 수분과 양분을 흡수하여 자라나게 됩니다. 그런데 좋은 땅 외에는 뿌리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없습니다. 19절에서 길가를 보십시오. 역시 뿌리가 없습니다. 20절의 돌밭은 21절에서 ‘그 속에 뿌리가 없다’고 말합니다. 세 번째 가시떨기는 분명 싹이나 자라는 것 같은데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말함으로서 뿌리에 대한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누락시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좋은 땅에 뿌려진 씨앗은 깨닫고 열매를 맺는다고 말합니다. 즉 땅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는 것이죠.

우리는 앞서서 깨닫는다는 말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뿌린를 내린다는 말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땅으로부터 생명을 공급받아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비유의 표현대로 한다면 좋은 땅이란 좋은 사람의 마음의 상태이기 때문에, 결국 말씀의 씨앗이 잘 자라도록 최적화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좋은 땅은 씨앗을 위해 모든 것을 준비가 된 땅을 말합니다. 잡초가 없어야하고, 돌을 물론 제거되어야 합니다. 또한 흙 속에 충분한 수분과 영양분이 있어야 합니다. 말씀이 잘 자랄 수 있는 환경이 바로 뿌리내리는 삶의 비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잘 뿌리내리도록 잘 가꾸어진 삶이 바로 좋은 땅의 두 번째 조건입니다.

길가의 삶은 말씀을 간직하지 않는 자의 삶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는 자를 말합니다. 아무렇게 말씀을 방치하는 사람입니다.

돌밭은 말씀에 대해 즉각적으로 반응하지만 뿌리를 내리지 못합니다. 즉 영양분을 공급받지 못해 말라 죽게 됩니다. 21절의 넘어진다는 헬라어는 ‘스칸달리조’인데 ‘올무에 걸리다’ 또는 ‘유혹에 빠져 범죄하다’라는 뜻입니다. 돌밭의 삶은 대단한 감정적인 사람이며, 상황에 너무나 쉽게 흔들리는 사람입니다. 은혜도 쉽게 받지만 죄도 빠르게 짓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감각적으로 받고, 자신에게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면 즉각 버리는 자들입니다.


세 번째 가시떨기는 세상에 대한 염래와 재물, 즉 걱정과 근심에 쌓여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이들의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도 있고, 순종의 삶도 있습니다. 문제는 말씀에 의해 주도된 삶이 아닙니다.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두 다리를 걸치고 있는 사람입니다. 대단히 신앙이 좋은 것 같은데 결국에는 하나님이 아닌 세상을 선택한 데마와 같은 사람입니다. 

좋은 땅은 어떤 사람인가요? 오직 말씀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하나님의 말쓰믈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성령이 충만하여 그의 삶을 주도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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