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소화
능소화
능소화의 전설
아주 먼 옛날 소화라는 궁녀가 살았다.
임금의 성은을 입어 빈이 되었다. 임금은 소화를 위해 궁권 한 켠을 내어주었다.
그날 이후 임금은 소화를 찾지 않았다.
하루 또 하루
한 달 또 한 달
임금은 소화를 찾지 않았다.
빈들은 임금을 독차지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소화는 다른 빈들의 음모로 궁궐의 깊고 깊은 곳으로 밀려났다.
달 밝은 날 누군가의 발소리를 들었다.
님이 오는가?
바람 소리였구나.
정원을 서성이며 또 하루를 보낸다.
언젠가는 오시겠지.
그리움은 소화의 몸을 축냈고, 결국 죽음을 맞이 한다.
"내가 죽으면 담가에 묻어 주오. 그곳에서 나의 임을 기다릴 것이오."
사람들은 소화를 거하던 처소 담 근처에 묻어 주었다.
소화의 무덤에서 나무가 자라더니 여름이 되자 주황색의 잎이 두터운 꽃을 피웠다.
어디론가 가야했다. 조금이나마 가사를 덜고 싶은 아내는 좋은 카페를 찾아 달라고 했다. 장흥까지 한 걸음에 달려 갔다. 먼듯 멀지 않고, 가까운듯 가깝지 않는 장흥이다. 그곳에 예전에 봐두었던 카페 하나가 있다.
카페 같지 않는 입구
나무 문으로 만들어진 입구를 들어서면 능소화가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저 문으로 아름다운 여인이 다소곳하게 들어 올 것 같다.
사진이 완성되었다. 아내가 능소화 아래 자리를 잡았다.
사진의 완성은 구도가 아니다.
사진의 완성은 사랑이다.
아내에게 능소화를 담아 내밀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사진은 완성되었다.
능소화 관련 시
능소화
- 김영남
오해로 돌아선 이
그예 그리움으로
담을 타는 여인
아래 벗겨진 신발
모두 매미 소리에 잠들어 있구려
내 아직 늦지 않았니?
당신을 향해 피는 꽃
- 박남준
능소화를 볼 때마다 생각난다
다시 나는 능소화, 하고 불러본다
두 눈에 가물거리며 어떤 여자가 불려 나온다
누구였지 누구였더라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니 담장 밖으로 고개를 내밀던
여자가 나타났다
혼자서는 일어설 수 없어 나무에, 돌담에
몸 기대어 등을 내거는 꽃
능소화 꽃을 보면 항상 떠올랐다
곱고 화사한 얼굴 어느 깊은 그늘에
처연한 숙명 같은 것이 그녀의 삶을 옥죄고 있을 것이란 생각
마음속에 일고는 했다
어린 날 내 기억 속의 능소화 꽃은 언제나
높은 가죽나무에 올라가 있었다
연분처럼 능소화 꽃은 가죽나무와 잘 어울렸다
내 그리움은 이렇게 외줄기 수직으로 곧게 선 나무여야 한다고
그러다가 아예 돌처럼 굳어가고 말겠다고
쌓아올린 돌담에 기대어 당신을 향해 키발을 딛고
이다지 꽃 피어 있노라고
굽이굽이 이렇게 흘러왔다
한 꽃이 진 자리 또 한 꽃이 피어난다
능소화
-이원규
꽃이라면 이쯤은 돼야지
화무십일홍
비웃으며
두루 안녕하신 세상이여
내내 핏발이 선
나의 눈총을 받으시라
오래 바라보다
손으로 만지다가
꽃가루를 묻히는 순간
두 눈이 멀어버리는
사랑이라면 이쯤은 돼야지
기다리지 않아도
기어코 올 것은 오는구나
주황색 비상등을 켜고
송이송이 사이렌을 울리며
하늘마저 능멸하는
슬픔이라면
저 능소화만큼은 돼야지
저 능소화
- 김명인
주황 물든 꽃길이 봉오리째 하늘을 가리킨다
줄기로 담벼락을 치받아 오르면 거기,
몇 송이로 펼치는 생이 다다른 절벽이 있는지
더 뻗을 수 없어 허공 속으로
모가지 뚝뚝 듣도록 저 능소화
여름을 익힐 대로 익혔다
누가 화염으로 타오르는가, 능소화
나는 목숨을 한순간 몽우리째 사르는
저 불꽃의 넋이 좋다
가슴을 물어라, 뜯어내면 철철 피 흘리는
천근 사랑 같은 것,
그게 암 덩어리라도 불볕 여름을 끌고
피나게 기어가 그렇게 스러질
너의 여름 위에 포개리라
능소화
- 김광규
7월의 오후 골목길
어디선가 해피 버스데이 노래를
서투르게 흉내내는
바이올린 소리
누군가 내 머리를 살짝 건드린다
담 너머 대추나무를 기어올라가면서
나를 돌아다보는
능소화의
주황색 손길
어른을 쳐다보는 아기의
무구한 눈길 같은
그녀 초승달 따다 - 능소화
-이수인
이루지 못한 사랑으로 피어난 꽃
이글거리는 팔월 정오의 질투로
더욱 도도한 황금빛 꽃잎
그 화려함에 누구라도 발걸음 멈추지
정숙하기로 인현왕후만 하였고
요염하기로 희빈 장씨만 못하였겠느냐만
나인의 몸으로 지체 높은 임과 나눈 하룻밤
이승에서는 다시 못 볼 꿈이 되었구나
아무도 너를 두고 지나칠 수 없는 까닭은
능치 못할 황금빛 유혹의 미소
임 두고 차마 썩지 못한 네 독한 살내음
태양은 멀어지고 파랗게 질식하는 창공
능소화
- 나태주
누가 봐주거나 말거나
커다란 입술 벌리고 피었다가, 뚝
떨어지는 어여쁜
슬픔의 입술을 본다
그것도
비 오는 이른 아침
마디마디 또 일어서는
어리디 어린 슬픔의 누이들을 본다
능소화 연가
-이해인
이렇게
바람이 부는 날은
당신이 보고 싶어
내 마음이 흔들립니다
옆에 있는 나무들에게
실례가 되는 줄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가지를 뻗은 그리움이
자꾸자꾸 올라갑니다
저를 다스릴 힘도
당신이 주실 줄 믿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내게 주는
찬미의 말보다
침묵 속에도 불타는
당신의 눈길 하나가
나에겐 기도입니다
전 생애를 건 사랑입니다
능소화
-김윤자
어머니, 지금
일흔 세 개 생명의 촛대 들고
능소화 허릿길 휘휘 돌아
하늘로 오르신다.
가슴에 또아리 튼 몹쓸 병마는
하나씩, 둘씩 빛을 지우고
여름이 지는 날, 한줌 소나기에
부서지는 잿빛 희망
흙마당에 덩그러니 누워
채 눈감지 못한 저 눈부신 슬픔
시린 세월, 눈먼 꼭둑각시로
사랑의 독항아리
씨물까지 다 퍼주고
바싹 마른 우렁이 껍질, 빈몸
어머니, 혼자서는 일어서지도 못하여
연황빛 고운 입술
하늘 이슬로 목축이시며
삭은 나무 등을 빌어 오르시더니
하룻밤 찬비에
저리도 쉬이 으스러지실까.
삶이 미완성이듯,
능소화 역시 미완성이다.
삶은 여정이고,
여정이기에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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