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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 전서 개요

샤마임 2019. 6.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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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 전서 묵상 개요

저자

데살로니가 전.후서의 저자는 바울입니다. 학자들은 '우리'로 불려지는 것을 감안해 바울이 구술하고 실루아노(실라)가 기록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고대 편지의 대부분의 이렇게 기록되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학자들의 논리는 타당합니다. 이것은 후에 따로 다루겠습니다.

기록 연대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AD 50년 말이다 51년 사이에 기록되었을 것으로 봅니다. 이것은 신약의 최초의 문헌이자 바울의 최초 서신인 갈라디아서 다음으로 두 번째에 해당됩니다. 저작 연대는 서론에서 따로 다룹니다. 

기록 장소

고린도로 추측됨

기록 목적

핍박을 받고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을 향한 위로와 격려

[지도는 성서유니온선교회 <LAB 데살로니가>에서 가져옴]

데살로니가 교회의 역사적 신학적 상황

바울의 저작설

데살로니가 전후서는 다른 바울 서신서에 비해 독특합니다. 갈라디아서와 로마서는 바울의 신학의 정점이라 할 만한 이신칭의와 율법의 문제들이 다수 실려 있습니다.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의 경우 기독론과 교회론이 중요하게 다루어집니다. 고린서 전후서는 윤리적 문제와 다양한 이슈에 대한 바울의 신학적 답변이 주를 이룹니다. 그럼에도 많은 부분에서 신학적 이슈들을 공유합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 전후서는 다른 서신서와는 공유되는 부분이 극히 적습니다. 특히 바울 신학의 중요한 주제인 이신칭의나 율법에 관한 언급이 단 한 차례도 없습니다. 물론 바울의 성향이 없지는 않습니다. 유난히 핍박과 종말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언급되고 있으며, 사랑과 섬김에 대한 칭찬이 주를 이룹니다. 이러한 성향으로 인해 바울의 저작이 아니라는 주장이 적지 않게 제기되어왔고, 현재도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아마도 실라에 의해 많은 부분 가필되거나 수정되었을 가능성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비록 실라가 기록한 것이라 할지라도 바울이 읽고 수정하고 교정을 했기 때문에 바울의 저작으로 돌려져야 합니다. 마치 대통령 연설을 비서가 작성했다 할지라도 대통령이 직접 읽고 교정했기 때문에 대통령의 발언으로 돌리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바울 서신들은 대체로 타인에 의해 기록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바울은 빌레몬에게 편지하면서 나 바울이 친필로’(19) 쓴다고 고백하는 것을 볼 때 직접 글을 쓰는 것은 매우 드문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2차 전도여행(행 15:40-18:22)

2차 전도여행은 AD 50-52년 사이에 이루어진다. 피키릴리는 2차 전도여행의 시작이 48과 50년 사이 어느 시점으로 본다. 만약 48년까지 앞당긴다면 2차 전도여행은 약 4년 정도라는 긴 시간이 될 것이다.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지만 1차 전도여행과 2차 전도 여행 사이에 예루살렘 총회(행 15장)이 있었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개연성은 적어 보인다. 누가는 예루살렘 총회를 통해 갈라디아서 등에서 심각하게 논의된 이방인과 율법과의 문제를 해결되었다고 선언한다. 2차 전도여행은 그 이후에 이루어진다.

2차 전도여행은 1차 여행보다 훨씬 광범위한 지역을 여행한다. 소아시아 남부에 해당하는 밤빌리아 지역에 한정된 1차 여행에 비해 2차는 빌립보와 고린도까지 이어지는 유럽으로 확대된다. 거쳐간 지역을 살펴보자.

안디옥-다소-더베-루스드라-비시디아 안디옥-드로아-네가볼리-빌립보-아볼로니아-데살로니가-베뢰아-아덴-고린도-겐그레아-에베소-밀레도-가이샤라-예루살렘-안디옥

2차 전도여행의 특이점은 에베소교회와 빌립보교회, 고린도교회가 설립되었다는 점이다.

출처: https://392766.tistory.com/2388 [Pensées]

기록 목적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를 하게 된 목적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한 바울의 걱정 때문이었습니다. 데살로니가는 바울의 2차 전도여행 때에 세워집니다. 바울 일행은 2차전도 여행 때 소아시아를 넘어 유럽으로 들어갑니다. 마케도냐 지방으로 넘어가 세운 첫 교회는 빌립보 교회입니다. 기도처를 찾다 강가에서 자식 옷감 장사인 두리아를 만나 그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누가는 주께서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16:14) 했다고 증언합니다. 그곳에서 귀신들인 여종을 고쳐주는 것이 문제가 되어 옥에 갇힙니다. 바울과 실라가 밤 중에 찬야할 때 감옥의 터가 흔들리게 되고, 놀라 달려온 간수에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16:31)고 전도합니다. 그 후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지나 데살로니가로 들어갑니다.(17:1) 데살로니가에 도착한 바울 일행은 안식일이 되자 곧바로 유대인 회당으로 들어가 먼저 복음을 전합니다. 세 안식일 동안 예수가 그리스도이심(τι οτός στιν Χριστός, ὁ Ἰησος)’을 증언합니다. 그로 인해 야손과 아리스도가 바울 일행을 영접합니다. 특히 야손은 자신의 집을 개방하고 바울 일행을 맞이합니다. 누가는 회당 예배 시에 경건한 헬라 귀부인들도 있었다고 증언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유대인들은 바울을 시기합니다.

결국 유대인들은 바울을 저지하기 위해 협작꾼들을 모아 폭동을 일으킵니다. 폭도들은 야손의 집에 들어가 바울과 실라를 찾았지만 찾지 못합니다. 분노한 유대인들은 그대로 물러가지 않고 야손을 끌어다 읍장(πολιτάρχης)들에게 데려간다.(17:6) 그들이 고소한 죄목은 가이사가 아닌 예수를 (퀴리오스)’로 섬긴다는 것이었습니다. 야손이 그들을 집에 들였기 때문에 고소한 것입니다. 당시 황제를 거스르는 죄는 매우 심각하고 위중하게 보았습니다. 읍장들은 소동했고, 보석금을 받고 겨우 놓아 줍니다. 유대인들은 그것을 빌미로 바울 일행을 뿌리 뽑을 생각이었습니다. 읍장들은 이 문제를 심각하게 보았습니다. 또한 가식적인 소동이라 할지라도 유대인들이 불필요하게 소동하는 것도 통치자 입장에서는 좋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상황이 좋지 않게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인지한 신자들이 움직입니다. 먼저 바울과 실라를 근처 베뢰아로 가도록 요청합니다. 그러나 대적자들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베뢰아까지 따라가 괴롭힙니다.(17:13) 그러자 바울은 하는 수 없이 다시 아테네(아덴 행 17:15)로 이동하게 됩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를 떠나면서 남겨진 이들을 걱정했습니다. 먼저 그들은 충분한 신앙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럴만한 여유도 없었을 뿐 아니라 그럴만한 분위기도 아니었습니다. 어떤 편에서는 바울과 실라가 도망가는 듯한 느낌도 적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일어날 박해가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바울을 데살로니가 교회가 걱정되어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고린도로 가기 전 바울은 몇 번에 걸쳐 다시 데살로니가로 가려고 했습니다.(살전 2:18) 그러나 번번이 길이 막혀 갈 수가 없었습니다. 아마도 유대인들이 데살로니가에서 뵈레아로, 뵈레아에서 다시 아테네까지 쫓아와 소동을 일으켰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바울이 아덴에서 며칠도 머물지 못하고 바로 떠난 것을 보면 충분히 그럴 소지가 있습니다.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있을 때 실라와 디모데가 합류합니다.(18:5) 에덴에 있는 동안 걱정이 떠나지 않았던 바울은 디모데를 다시 데살로니가로 보낸 듯합니다.(살전 3:1-4) 바울이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워가는 동안 디모데가 돌아옵니다. 디모데는 바울이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소식을 가져옵니다. 그들은 핍박과 고난 속에서도 신실한 믿음을 소유할 뿐 아니라 박해 속에서도 서로 사랑하고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소망 가운데 지내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의 소식을 듣고 곧바로 데살로니가 전서를 기록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인지 데살로니가 전서는 유난히 위로와 격려가 많습니다. 또한 종말에 재림한 그리스도의 소망에 대한 언급도 반복됩니다.

2차 전도여행 때 바울이 고린도에 50년 말과 51년까지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아마 50년 말이나 51년이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델피(또는 델피아, Delphi) 비문에 의해 바울이 고린도에 머문 시기는 주후 50년 말에서 51년 말까지로 보입니다. 기원후 49년 즈음에 로마 황제 글라우디오가 로마에서 유대인들을 추방시킵니다. 유대인들은 즉시 로마를 떠나야 했고, 로마에서 활동해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고린도에 내려오면서 바울과 만나게 됩니다.(18:2) 아굴라 부부는 본도 출신이며 바울처럼 천막을 짓는 일을 해서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데살로니가 전후에서는 나타나지 않지만 다른 서신들을 통해 추측해보면 바울이 얼마나 데살로니가 교회를 사랑하고 아꼈는지 드러납니다. 데살로니가 서신 안에 기록된 칭찬은 고스란히 고린도 후서(8:1-5, 11:9)와 로마서(15:26) 등에 나타납니다. 예측대로 데살로니가 교회는 극심한 고난 가운데 있었고,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고난은 아랑곳하지 않고 예루살렘 교회가 힘들 때 극심한 가난(고후 8:2)가운데에서도 힘에 지나도록 도왔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잊지 않았고, 고린도 교회에 편지할 때 언급합니다. 그만큼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사랑하고 자랑스럽게 여겼던 것입니다.

핍박 가운데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에 바울이 해주고 싶은 교훈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는 위로, 다른 하나는 고난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입니다. 다른 한 가지가 있다면, 갑자기 떠난 바울에 대한 비난을 변호하는 것이었습니다. 일부의 교인들을 알았지만 상당수는 갑자기 떠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잘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 일행은 데살로니가로 돌아가려고 여러 번 시도를 했지만 실패했으며, 지금도 여전히 다시 돌아가고 싶다고 전합니다.(3:10)

감사와 위로

데살로니가 전서의 가장 우선된 목적은 고난 가운데 있는 교인들을 향한 위로와 격려였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를 떠나면서 가졌던 생각처럼 그들은 적지 않은 핍박을 통해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염려했던 것과 다르게 그들은 대부분의 방면에서 바울이 기뻐할만한 많은 모습을 나타냈습니다. 바울은 1장과 2장에서 집중적으로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습니다. 그들은 비록 핍박 가운데 있었지만 잘 견디고 있었습니다. 또한 어려운 가운데서도 서로 사랑하며 한 마음으로 연합되어 있었습니다. 특별히 짧은 기간 이었음에도 그들은 바른 신앙을 갖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삶의 열매들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것이 분명하다고 말합니다.(1:4) 그들의 이러한 모습은 주변의 지역들 형제들에게 이 되었습니다.(1:7)

종말론

데살로니가 전후서는 종말에 대한 언급이 많고 반복됩니다. 데살로니가를 기록한 49-51년 사이는 상대적으로 온화한 시기였고, 안정된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데살로니가 교회는 유대인들에 의해 적지 않은 소동이 일어났고, 가이사가 아닌 를 섬긴다는 이유로 의혹의 눈총을 받았습니다. 어떤 이유인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데살로니가 교회는 종말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드러냈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예수에 대한 믿음과 재림의 에대한 소망을 갖게 된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재림으로 인해 세상이 심판을 받고 자신들은 구원을 얻을 것이라 확신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점에서 그들을 칭찬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바론 종말론을 가르칠 필요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재림(παρουσία)이란 단어는 전후서에는 무려 6번이나 사용합니다. 재림 즉 파루시아(παρουσία)’가 최초로 사용된 곳이 바로 데살로니가 전서입니다. 파루시아는 구약의 신적 현현에 대한 헬라어 번역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파루시아를 데살로니가 전서에서는 윤리적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종말론적 삶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일부 교인들이 핍박을 받아 죽었습니다. 바울은 이들에게 종말에 일어날 일에 대해 소개합니다. 그들은 재림(파루시아)의 때에 부활하게 될 것이며, 그의 영광에 동참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망 없는 자처럼 슬퍼할 필요가 없습니다.(4:13) 그 때에 하늘로 올라가 영원토록 주님과 함께할 것입니다.(4:17)

언제 종말이 일어날 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주의 날은 도둑처럼 갑자기 임할 것입니다.(5:2) 그러니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날마다 주의 파루시아를 기대하며 소망을 품고 서로 격려하고 사랑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4장에서 종말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여 5장에서 종말이 일상의 삶과 연결됩니다. 바울은 종말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거룩한고 순결하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항상’ ‘쉬지 말고’ ‘범사는 종말의 때까지 하나님 앞에서 흠 없이 살아가야 하는 성도의 시간을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데살로니가 전서는 종말론을 주로 개인적이고 일상적인 것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는 전반적으로 고난 가운데 있는 신자들의 삶에 집중하며, 그들이 어떻게 종말론적 삶을 살아가야 하는가를 설명하려는 의도에서 기록된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전서의 구조

데살로니가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전반부는 1-3, 후반부는 4-5장입니다. 전반부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소문을 듣고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왜 데살로니가로 돌아가지 못했는지에 대한 변론과 디모데로 인해 회복되었음을 이야기합니다. 4-5장은 실제적 권면들이 이어지고 종말에 대한 가르침이 이어집니다. 저는 F.F Bruce의 구조를 약간 수정하여 다음과 같이 정리했습니다.


전반부: 위로와 격려(1-3)

1. 인사와 감사(1:1-10)

1) 인사(1:1)

2) 격려(1:2-10)

2. 변증(2:1-3:10)

1) 교회를 향한 진실한 변증(2:1-12)

2) 유대인들의 대적(2:13-16)

3) 데살로니가로 다시 가지 못함에 대한 변론(2:17-20)

3) 디모데를 보낸 이유(3:1-10)

4)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한 기도(3:11-13)

후반부: 실제적 교훈과 가르침(4-5)

1. 전통을 지키는 것에 대한 권면(4:1-2)

2. 성적 순결에 대한 권면(4:3-8)

3. 형제 사랑에 관한 권면(4:9-12)

4. 죽은 성도에 대한 가르침(4:13-18)

5. 때와 시기에 관한 가르침(5:1-11)

6. 다양한 의무들에 대한 가르침(5:12-22)

7.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한 기도(5:23-24)

8. 맺음말(5:2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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