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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전서 2. 2:1–12 교회를 향한 변증

샤마임 2019. 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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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전서 2. 2:112 교회를 향한 변증

 

[본문]

 

1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이 헛되지 않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아나니 2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라 3 우리의 권면은 간사함이나 부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속임수로 하는 것도 아니라 4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5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하는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언하시느니라 6 또한 우리는 너희에게서든지 다른 이에게서든지 사람에게서는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였노라 7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마땅히 권위를 주장할 수 있으나 도리어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8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

 

9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 10 우리가 너희 믿는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거룩하고 옳고 흠 없이 행하였는지에 대하여 너희가 증인이요 하나님도 그러하시도다 11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 12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

 

[묵상]

 

교회의 분란은 의외로 사소한 것에서 출발할 수도 있습니다. 전혀 그런 사실도 없고, 마음도 없었음에도 서로 신뢰하지 못함으로 인해 불필요한 오해나 주변 사람들의 의혹의 눈초리로 인해 분란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지금 그런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교회에 분란이 일어날 때, 또는 오해가 생길 때 항상 즉각적으로 대처할 필요는 없습니다. 종종 누군가의 오해나 비판이 있을 때 묵묵히 침묵하며 시간을 흘려 보내야할 필요도 있습니다. 그렇게 지다다보면 문제는 해결되고 오해가 풀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의 의도적인 의혹과 비판이 일어날 때 즉각적으로 풀어야할 때도 있습니다. 만약 오해를 풀지 않고 내버려 두면 의혹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나중에는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도 합니다. 바울은 지금 데살로니가 교회에 일어나고 있는 의혹에 대해 즉각적이고 적극적으로 해명합니다. 교회 안의 의혹을 넘어 교회 밖에서도 바울 일행을 조롱하며, 비겁하다고 비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어떻게 해서 데살로니가로 가게 되었는지, 왜 데살로니가로 다시 돌아가지 못했는지, 지금 상황이 어떤지를 차근차근 설명해 나갑니다.

 

존 스토트는 본론에 해당하는 부분을 이렇게 구분합니다.

 

서론(2:1-2)

a. 바울의 공개성

b. 바울의 고난

1. 바울이 그의 방문을 변호함(2:3-16)

a. 청지기(3-4)

b. 유모(5-8)

c. 아버지(9-12)

d. 사자(13-16)

2. 바울이 그의 부재를 설명함(2:17-3:13)

 

매우 매력적인 구분이지만 전체적인 흐름과 문맥을 따라 저는 부르스의 구조가 더합당해 보입니다.

 

부르스는 본문을 세 개의 문단으로 나눕니다.

 

2:1-4 데살로니가에서 선교사들을 영접함

2:5-8 선교사들의 그 곳에서 자신들의 행위

2:9-12 선교사들이 그 곳에서 본을 남김

 

너희가 친히 아나니

(Ατογρ οδατε)

 

헬라어 문맥을 따라 번역해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스스로 알고 있다입니다. 좀더 감정을 넣어 해석하면 ‘(우리가 지금 이렇게 된 것을) 너희가 스스로 알고 있지 않느냐? (그런데 왜 그렇게 혼란스러워 하느냐?)’로 번역이 됩니다. 바울은 너희가 (이미) 알고 있다는 호소를 통해 자신의 변명이 거짓이 아님을 밝히려 합니다. 5절에서 다시 동일하게 반복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볼 때, 바울의 데살로니가 교회가 자신들을 믿지 못한 것에 대해 약간의 서운함과 아쉬움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너희라면 우리를 충분히 이해해 주리라 믿었는데 그렇지 못해 아쉽다

 

라는 바울의 속내가 들여다 보입니다. 바울은 아마 의도적으로 이렇게 호소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즉 우리가 너희를 보통 사이로 생각하지 않는다. 너희를 우리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너희들 스스로가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추측은 8절을 통해 확인됩니다. 부르스는 이 구절이 1:5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1:9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갔는지와를 동일한 것으로 이야기 합니다. “여기서 강조된 것은 데살로니가인들에 의해 선교사들이 영접 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인격적인 행동입니다.

 

데살로니가 갔을 때 바울의 일행은 성치 못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에서 귀신들려 점치는 아이를 회복시켜 준 일로 인히 모함을 받아 매를 맞고 지하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리고 간수장의 간곡한 부탁으로 그곳에서 쫓겨나가다시피 나와야 했습니다. 그곳을 떠나 도착한 곳이 바로 데살로니가였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도 그들은 여전히 핍박과 고난 가운데 있었습니다.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고 많은 헬라인들이 바울의 설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시기한 유대인들이 협작꾼들을 모아 소동을 일으키고 황제를 거역한다며 기소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상황을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전’(2)했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너희가 충분히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권면은

(ἡ γρ παράκλησις μν)

 

권면이란 헬라어 단어 파라칼레시스(παράκλησις)’호소하다’ ‘위로하다’ ‘격려하다의 뜻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권면이란 단어 속에는 이런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너희들에게 권하는 말들이 너희를 속이고 거짓으로 꾸며 너희들에게서 뭔가를 얻으려 한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 아니다.”

 

누군가는 저 말 잘하는 이들을 보라 저들은 오직 말로만 우리를 행복하게 하고 기쁘게하여 우리를 속이고 있다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이 비판에 대해 단호하게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이유는 분명합니다. 먼저는 너희가 안다는 문맥 속에, 우리가 죽을 고비를 넘기며 이렇게까지 수고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복음을 전한다. 왜 그렇게 하는가?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4)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산헤드린 앞에서 담대하게 외쳤던 것과 적지 않게 닮아 있습니다.(5:9) 바울이 강조하고 싶은 오직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기쁘게하려는 것이다입니다.

 

존 스토트는 복음을 위탁 받은 청지기의 이미지를 강조하며 바울의 청지기 됨을 이렇게 네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 하나님도 바울을 시험해 보시고 그가 적합한 사람이라는 것을 발견하셨다.

둘째, 거듭된 시험의 결과, 하나님은 그를 복음의 청지기로 삼으심으로써 그에게 복음을 위탁하셨다.

셋째, 바울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하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했다.

넷째,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바울이 말하고 싶은 결국 거짓이 아니다. 또한 거짓말을 할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권면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며, 오직 하나님을 위한 것임을 말합니다.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바울은 좀더 강력하게 자신들을 변호합니다. ‘너희도 안다는 바울 일행의 행동들이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 아첨하는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첨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타인을 불필요하게 칭찬하거나 거짓으로 높이는 것을 말합니다. 아첨의 목적은 이익이고, 아첨의 본심은 탐심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분명하게 다른 사람에게 영광을 구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영광을 구한다는 표현은 문자적 의미보다는 칭찬받고 존경 받고 싶은 마음입니다. “어떤 전도자들은 높은 곳에 서서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을 존경하고 지켜세워 주기를 바랐다.”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들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 알았고, 그렇기 때문에 복음 전도는 사람들에게 영광을 얻으려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 드리는 삶의 예배요, 감사의 표식이었습니다.

 

바울은 사람의 영광을 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마땅히 권위를 주장할 수”(7) 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스스로 유모가 되어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위해 수고를 자처했습니다.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같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기꺼이 섬겼던 것입니다. 참으로 그들은 바울의 영적인 자녀들이었습니다. 애씀과 수고를 통해 그들은 영적으로 태어났고, 하나님 앞에서 생명 있는 자녀로 자라고 있습니다. 바울은 유모가 자식을 돌보는 정도를 넘어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8)한다고 강조합니다.

 

우리는 바울이 유모라는 은유적 표현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목회자들은 진리를 가르친다는 이유로 강압적이고 위압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죄와 이단에 대해서는 강경하지만 다른 부분에 있어서 어머니처럼 헌신적이며 부드러운 태도로 성도들을 대했습니다. 특히 초신들에게는 더욱 조심하여 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동안 본이 되고자 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기억’(9)하는 모습은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았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복음을 전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그들에게 물질적 후원을 받는 것이 악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받을만한 합당한 이유가 있음에도,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바울 일행은 스스로 먹고 자는 것을 해결하기 위해 일했다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15-16에 의하면 빌립보 교회는 바울 일행에게 약간의 도움을 주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이 이러한 수고를 아끼지 않은 이유는 한 가지 때문입니다. 그것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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