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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만담] 진짜 독서는 교양으로서의 독서다

샤마임 2018. 4.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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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만담] 진짜 독서는 교양으로서의 독서다


목사처럼 교만한 사람이 또 있을까? 나도 목사지만 목사님들 정말 너무 한다. 다들 그렇게 말한다. 나 또한 그말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언제가 그 이유를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의외로 간단한 답이 돌아왔다. 


'보수적'


이 말의 뜻을 현대 정치에서 일어나고 있는 좌우익의 문제로 보면 안 된다. 목사가 보수적이란 말은 진리에 있어서 폐쇄적이란 말이다. 그래서 답답한 것이다.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진리는 근본적으로 보수적이 된다. 


문제는 진리의 보수의 관계의 보수, 성격의 보수로까지 이어진다는 것이 문제다. 최근에 일어나는 여러가지 문제에 대해 보수파 목회자들이 그릇된 악과 해이한 도덕을 옹호하고 나섰다. 그 범죄자가 진리를 가진 자라는 이유 만으로. 


죄와 사람을 구분하지 않는 악이다. 이러한 생각을 악한 생각이다. 문제는 목회자들이 어떤 보수 범죄자를 볼 때, 그가 당하면 기독교가 훼손 당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니 비록 그가 죄를 지어도 보수이기 때문에 용납해야 한다고 확신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죄에 대한 옹호는 결국 기독교를 무너뜨리고 중세의 타락으로 떨어지게 한다. 교회는 개혁되었으니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종교개혁의 모토를 잊지 말라. 


그리고 목회자는 불필요하고 기독교를 변호하지 말라. 기독교는 기독교다. 하나님은 우상이 아니시다. 바알은 자신의 단을 훼파한 기드온과 직접 싸워야 한다. 왜 목회자들이 기독교를 잘못된 방법으로 옹호하는가? 그것도 죄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하나님께서 정말 살아 계시고 지혜 자체이시라면 왜 원수들의 공격을 방어하지 못하는가. 만약 성경이 진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왜 정당하게 비평에 대해 논리적으로 변증하지 못하는가. 이것은 정말 이상한 일이다. 성경이 성경으로 하여금 변증하게 하라. 


편협한 신앙에서 탈출하는 방법이 무엇일까? 타인의 입장에서 서보는 것이다. 역지사지의 독서법이다. 나는 이것을 '교양으로서의 독서' 또는 '통섭적 독서'라고 한다. 



바쁜 목회가 피상적인 성경 연구와 편협한 독서로 이끈다.


실용적 독서법이 있다. 책을 읽고 필요한 것만을 추출해 내는 독서법이다. 자기계발서나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책들, 또는 논문을 읽을 때 사용하는 기법이다. 중요한 논지나 단어, 핵심적인 논리를 집약적으로 요약하고 정리해 두는 독서법이다. 


목사는 실용적 독서법이 필요할까? 필요하다. 그러나 가능한 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실용적 독서로만 그칠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신학의 체계를 세워 나가야 한다. 그렇다면 실용적 독서법은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하거나 진정한 독서의 기초 단계에 머물러야 한다. 


목회자들의 진정한 독서는 무엇일까? 교양과 성찰로서의 독서다. 교양이라 함은 말 그대로 즉석으로 사용될 수 없은 독서, 어떤 의미에서 필요하지 않는 느긋한 독서이다. 소설, 고전, 깊은 연구도서들을 읽는 작업이다. 교양으로서의 독서는 단기간에 효고를 내지 못한다. 시간이 걸리고 무의해보일 때가 많다. 이 시간을 잘 견디는 것이 중요하다. 


편협한 목사들은 대체로 한 분야의 책만을 탐독한다. 이런 목회자는 그나만 괜찮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읽는 책들은 설교집과 간증집, 자기계발서나 베스트셀러 위주의 책이다. 그것이 필요없단 말은 절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인스턴트 식품과 같다. 한 끼는 떼울 수 있으나 결코 피와 살이 되지 못한다. 먹으면 먹을 수록 중독되고 건강을 헤치게 된다. 





목회자가 읽어야할 책은 딱 두 가지다. 하나는 인간을 이해하도록 돕는 책이고, 다른 하나는 성경을 깊이 읽도록 요구하는 책들이다. 새물결플러스의 <성전 신학>과 같은 책은 성경을 깊이 알도록 이끌어 주는 매우 좋은 책이다. 이레서원의 <공동서신의 신학>은 공동서신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도록 돕는 유용한 책이다. 성경에 깊이 뿌리 내리면서 목회적 관점에서 공동서신을 바라본 채영삼 교수의 역작이다. 


그에 비하여 ㄷ책은 가격은 엄청나지만 내용은 참으로 가겹다. 가볍게 술술 읽히는 책이다. 왜 저런 책을 가격도 비싼 양장으로 만들어 출간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저자의 인지도가 있어서 구매자들을 예상하고 출간한 책이지만 저런 책을 누가 읽을까? 한 한 부류다. 즉석해서 설교를 준비할 때 써먹을 수 있는 목사다. 아니면 천만명 중의 한 명 있을지 모르는 일반 교인으로, 누가복음을 이해하고 싶은 사람일 것이다. 


한 번 저런류의 책에 빠져들면 목사들은 더이상 설교 준비할 근육을 잃어 버린다. 목사는 매일 성경을 묵상하고 연구해야 한다. 그것을 차곡차곡 쌓아 자신의 언어와 담담 교회의 상황 속에 일상의 언어로 풀어내야 한다. 








진짜 독서는 교양으로서의 독서다.


교양의 사전의 의미를 들여다보자.


2. 학문, 지식, 사회생활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품위. 또는 문화에 대한 폭넓은 지식. 


간략하게 정리하면 교양은 귀족들이 자신들의 신분에 맞게 행동하는 예과 소통할 수 있는 기본적인 지식을 말한다. 그러나 최근의 교양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교양이란 단어도 무의미해졌고 굳이 그 단어가 필요치 않다. 인식이 변한 것이다. 필자고 말하고 싶은 교양은 직접적인 독서가 아니닌 간적적인 독서다. 얼마 전 유행되었던 '알뜰신잡'과 비슷한 개념이다. 알뜰신잡은 '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 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신비한이란 말이 불편하긴 하지만 전문적인 지식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알뜰신잡을 나는 '알아두면 뜰데 있는 신변잡기'라고 말한다. 독서가 그래야 한다는 말이다. 직접적으로 사용하기 힘들지만 여러가지 잡다한 지식을 쌓아 그것을 응용하여 목회라는 관점으로 풀어내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세포학에 대해 배우자. 


세포의 특징들을 잘 살펴보면, 세포의 기능과 역할들이 나온다. 이러한 역할들을 살피면 공동체의 주요한 특징들을 잡아 낼 수 있다. 철저한 자기 희생과 한계를 가진 세포, 그러나 보이지도 않는 작은 세포들의 연합을 거대한 동물을 만들 수 있다. 

잡다한 독서는 교양으로의 독서와 맥을 같이 한다. 목회자들은 신학과 역사, 철학에 대해서 어느 정도 조예가 있어야 하고, 다양한 주제를 섭렵해 나가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교양으로서의 독서다. 

최재천교수는 '통섭'이란 단어를 사용하는데 비슷한 의미다. 목회는 신학으로 해결할 수 없다. 조직신학에 치중된 한국의 신학은 인간의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없고 해석할 수 없다. 우리는 신학이란 고향을 집을 떠나 종종 역사와 철학이라는 옆 마을에도 가야하고 심리학과 생물학이라는 해외 여행도 다녀와야 한다. 

다양한 독서는 편견에 사로잡힌 관점을 넓게 해주고, 다양한 풍경과 경험을 제공해 준다. 목회자가 바라보는 교회와 일반 사람들이 바라보는 교회는 너무나 다르다. 한 권의 책은 한 사람의 관점이다. 다양한 독서를 통해 풍성한 관점으로 세상을 읽어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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