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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법-다시 읽기의 장점

샤마임 2012. 1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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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기의 장점

 

다시 읽기는 말 그대로 ‘다시 일는 것’이다. 다시 읽기는 음심에 비유한다면 곰국이다. 곰국은 처음 한 번만 고고 내 버리지 않는다. 두 번 세 번을 곤 다음에 뼈 속까지 완전히 우려낸 다음 버린다. ‘곰삭다’는 라는 말을 이런 것을 두고 한 말이다. 필자는 그동안 다시 읽기나 천천히 읽기는 거의 하지 않는 전형적인 다독과 속독의 독서법을 지향해 왔다. 독서란 많은 정보를 흡수하는 것이라고 착각한 탓이다. 그러나 이러한 다독과 속독은 시간이 지날수록 남는 것이 없는 손해 보는 장사였다. 물론 다독이 전혀 남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독과 속독은 콩나물시루에 물주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물을 주는 즉시 밑으로 모두 흘러내려 남는 것이 거의 없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콩나물이 자라는 것을 볼 수 있다. 문제는 투자한 것에 비해 효율이 너무 낮다는 것이다. 또한 대충 읽기 때문에 때로는 오해와 편견에 사로잡힐 때가 있으며, 저자의 주장과 논지를 놓치고 설익은 밥처럼 어설픈 견해에 빠지기도 한다. 며칠 전 C. S. 루이스의 책을 읽고 일기장에 적어 놓았다.

 

“오늘 낮에 C. S. 루이스의 [영광의 무게]를 읽으려는 데 대충 속독으로 읽으려 하자 읽히지가 않았다. 생각을 요하는 그의 책은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의 책은 천천히 생각하여 읽어야 한다.” 9월 28일

 

속독은 저자의 의도를 온전히 읽어 낼 수 없다. 우물에서 숭늉 찾는 꼴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책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반드시 천천히 읽기 또는 다시 읽기를 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러한 다시 읽기는 자기계발서나 단편적인 지식을 전달하는 책에는 적합하지 않다. 성경이나 고전, 생각을 요하는 깊이 있는 책의 읽기 법이다.

 

다시 읽기는 무엇이 좋은가?

 

이 부분은 김기현 목사의 성경 읽기 법을 참고해 보자. 김기현 목사는 반복해서 읽는 것의 유익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첫째, 반복은 말씀을 기억하는데 유리합니다. <중략> (둘째) 지적인 측면에서 반복은 이해하게끔 합니다. 이해에 이르는 단순하지만, 뛰어난 방법은 반복 읽기입니다. <중략> (셋째) 반복은 말씀을 ‘내면화’ 하는 데 유익합니다. 반복은 말씀을 머리에서 가슴으로 인도합니다. 말씀의 반복 읽기는 양분을 빨아들이는 것과 같습니다. <중략> (넷째) 반복은 말씀을 ‘생활화’하는 데 유용합니다.” [( )은 필자가 정리한 것임]

 

1.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 있다.

 

김기현 목사의 말에 의하면 다기 읽기는 편린(片鱗)된 지식들은 내면화하여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 있다. 속독은 자전거 타는 방법을 배운 것이고, 다시 읽기는 자전거를 실제로 타는 것을 몸으로 체득하는 것이다.

 

2. 깊이 있는 생각을 하게 한다.

 

다시 읽기는 사고의 확장을 필연적으로 가져온다. 고대헬라의 괴짜 철학자였던 제논은 흐르는 강물을 보며 항상 새로운 강물이라고 했다하지 않았던가. 어제 본 얼굴이 오늘 다르고, 오늘 본 얼굴은 내일 다르다. 다시 읽기는 독자의 생각을 한계 짓지 않는다. 그것은 텍스트는 그대로 있지만, 독자는 늘 변하기 때문이다.

 

전에 설교 준비를 하면서 한 본문을 수십 번 읽고 또 읽는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내가 아는 수준에서 본문이 읽혀진다. 그러다 두세 번 읽으면 본문의 흐름에 익숙해지고 본문의 정확한 의도를 찾아낼 수 있다. 열 번 정도를 읽고 나자 본문이 처음 읽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이런 뜻도 있고, 저런 뜻도 있다는 것이다. 시편 1편 말씀을 예로 들어보자.

시편 1편은 복 있는 사람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먼저 악인들의 특징들에 대해 열거한다. 그리고 의인의 특징과 삶을 보여준다. 마지막에 악인과 의인들의 운명을 이야기하고 마친다. 다시 읽기를 하면서 의인의 삶은 왜 복된 삶인지를 궁극적으로 알게 된다. 처음 발견하지 못한 이면의 것을 보면서 생각을 확장해 가는 것이다. 의인은

공동번역은 1절과 2절을 이렇게 번역하였다.

“행복하여라! 악인들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들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원문은 감탄사인데 공동번역을 이것을 놓치지 않고 잘 살려 놓았다. 악인은 세 번에 걸쳐 점진적으로 악에 고착화된다. 처음에는 귀가 솔깃하여 한 번 해보다 점차 그것에 익숙해지면서 결국 완전히 악의 자리에 앉아 버린다.

 

 

3. 놓친 부분을 다시 읽을 수 있다.

 

독서를 정식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세 번을 읽어야 한다. 처음은 개요 읽기, 두 번째는 줄거리 읽기, 세 번째는 천천히 읽기다. 다시 읽기는 처음 발견하지 못했던 부분을 발견한다. 필자의 경우를 예를 들어보자. 아브라함의 소명이 담긴 창세기 12장의 일부분이다.

 

그동안 필자는 창세기 12장 1-3절까지에 함몰된 읽기를 했다. 즉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을 가볍게 읽는 주준에서 그쳤고 그 이후의 사건에 대해선 대충 읽고 넘어가 버렸다. 그러나 다시 읽기를 통해 그동안 발견하지 못한 새로운 사실들이 눈에 들어왔다.

 

5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브람은 곧바로 갈대아 우르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하란에서 머물렀다. 그것도 잠깐이 아닌 상당히 오랜 기간이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이란 구절 속에 있다. 아브라함은 하란을 잠지 들렀다 지나는 곳이 아닌 장사와 삶을 유지했던 터전이었던 것이다. 또 하나의 사실은 가나안 땅에 들어와 처음 제단을 쌓은 곳은 ‘하나님의 나타나신 곳’이다. 그곳은 다름 아닌 ‘세겜’이다. 후에 이곳은 야곱의 딸 디나가 성추행 사건이 일어난 곳이며,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할 뻔한 곳이다. 우리는 종종 야곱이 벧엘로 올라가지 않고 세겜에 머문 사실에 비판을 한다. 그러나 야곱이 왜 세겜에 머물렀는지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곳은 야곱의 할아버지인 아브라함의 특별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이렇듯 다시 읽기는 전에 보지 못한 사실을 보게 하고 다시금 새로운 관점으로 문제를 바라보도록 한다.

 

4. 다르게 읽을 수 있다.

 

동일한 본문이지만 읽는 날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경우가 있고, 강조되는 부분이 다르다. 두레교회 김진홍 목사의 간증에도 재미날 일화가 있다. 빈민들과 일을 하다 빚이 져서 구치소에 갇히게 되었을 때 롬 8:12을 읽으면서 깜짝 놀랐다고 한다. 그곳에 자신의 처지가 담긴 ‘빚진 자’의 이야기가 나왔기 때문이다. 그 전에는 이 구절이 있는지 없는 지도 몰랐다고 한다. 필자의 경우만 해도 그렇다. 마태복음 4장에서 사탄은 예수를 찾아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해보라고 유혹한다. 지금까지 필자는 이것은 생명의 떡이시고, 광야의 만나로만 연결시켜 해석 했다. 그러나 마태복음을 다시 읽기하면서 바로 앞장에 3:17에서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라고 선언하고 있다. 이미 하나님의 아들로 선언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사탄은 이것을 시험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사탄의 시험은 기존에 알고 있던 평범한 시험 이상이었던 것이다. 의도적이고 악의적인 반역이었던 것이다.

 

성경은 끊임없이 다르게 읽기를 요구한다. 현재의 상황에 맞게 다르게 읽도록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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